공무원인 희정(문소리)은 아홉살 아들의 영어교육에 과도하게 매달려 남편(박원상)과 갈등을 빚는다. 채식주의자인 주훈(최규환)은 술까지 마시지 못해 직장에서 회식 때마다 어려움을 겪는다.

권과장(손병호)은 외국에 유학 보냈던 두 아이와 아내가 잠시 한국에 돌아오자 마음이 들뜨지만 어느새 가족간에 벽이 생긴 것을 알고 허무함을 느낀다. 권노인(박인환)은 평생을 같이 살아온 아내 송여사(정혜선)가 남편의 오랜 푸대접을 참다 못해 이혼서류를 들이밀자 당황한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제작 지원하는 첫 장편 영화인 `날아라 펭귄`은 조기유학에서 황혼이혼까지,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을 다뤘다.

임순례 감독이 연출한 이 신작엔 이렇다 할 형식적 실험도 없고, 잔뜩 공들인 미장센도 발견하기 어렵다.

등장 인물들이 이어달리기를 하듯 저마다의 사연을 차례로 펼쳐 보이는 4부 구성의 느슨한 이 장편은 종종 TV 드라마를 보는 듯 평이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게다가 이 영화는 캐릭터에서 에피소드와 구체적인 대사까지, 전형성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그런 전형적 묘사들은 오히려 이 영화에서 가장 큰 힘이 된다. (한 작품 속에 들어 있는) 10개의 클리셰는 창작자의 게으른 태도와 빈약한 상상력을 드러내지만, 100개의 클리셰는 한데 모여서 그 자체로 거대한 벽화를 그려낼 수 있다는 것을 `날아라 펭귄`이 실증하는 셈이다.

이것은 전형적인 묘사를 통해 한국인의 전형적인 삶이 지닌 부박함을 드러내려는 영화고, 결국 스크린을 거울로 만들려는 작품이다.

`날아라 펭귄`에서 대단한 사건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극중 거의 모든 상황은 지극히 익숙하다.

하지만 평온한 줄 알았던 일상이 잠시 흔들릴 때 그 허약한 뿌리가 드러난다.

그리고 너무나 친숙한 광경들이 영화를 빼곡히 채울 때 우리 삶의 익숙했던 습관들과 우리 사회의 익숙했던 관습들은 일순간 요지경 속의 기이한 그림이 된다.

극중 모든 인물이 최선을 다해 하루하루를 사는데도 불구하고 왜 행복한 사람은 없는 걸까. 미래를 위해 현재를 견디고 가족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데도 왜 그들은 서로 불화하는 걸까. 영화는 차이를 백안시한 채 한 가지 방식만을 따르려 하는 한국인들의 동질화된 삶이 지닌 작은 폭력들과 허망한 속내를 자연스레 노출시킨다.

`날아라 펭귄`은 종반 직전까지의 모든 갈등을 급작스런 해피 엔드를 통해 일거에 무화시켜 아쉬움을 준다.

장편 영화로서 단단하지 못한 구조는 이야기 방식에 대한 의문을 남기기도 한다. (그동안 서로 다른 연출자들의 단편들로 구성된 옴니버스 영화를 제작 지원해온 인권위가 기획의 방향을 바꿔 처음으로 시도한 장편인데도, 왜 임순례 감독은 굳이 네 편의 단편이 연결되어 있는 듯한 형식을 택했을까.)

하지만 <날아라 펭귄>은 외외로 유머러스하고 충분히 흥미롭다. 배우들은 편안하게 연기했고 감독은 부드럽게 찍었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목표로 삼은 것들을 대부분 성취했다.

2부와 3부가 좀 더 눈길을 끄는 이 영화에서 특히 인상적인 대목은 주훈이 채식주의자가 된 사연을 토로할 때다.

영화를 만드는 이의 목소리가 그대로 담겨 있는 듯한 그 장면은 임순례 감독의 인간적 지향이 어느 지점을 향해 있는지를 그대로 보여주면서 뭉클한 감동을 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