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종前 문경중 교장
문인 중에는 전공분야가 선뜻 떠오르지 않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박일송(朴一松) 문인도 그러한 것 같다.

발넓게 수필, 시조, 시를 다 끄적이지만(?) 기억나는 대표작이 얼른 생각나지 않는다.

박일송은 강원도 원주지역의 터줏대감이었다.

예총의 전신인 문총 원주지부를 창설하고 문광부장관이 주는 향토문화상까지 받았다.

5·16후 문총이 예총으로 탈바꿈하자 자연스럽게 예총 원주지부장과 문협원주지부장자리도 그의 몫이었다.

흔히 우리 문단의 기인으로 김관식 시인과 천상병 시인을 쌍벽으로 치지만, 문단 기인 3총사를 들자면 앞의 김·천 두 시인에다 박일송씨를 보태면 손색없는 문단 기인 3총사로 전혀 손색이 없다.

박일송씨는 생전에 자주 내세우는 무용담(?)이 하나 있는데 일본 학병 장교로서 중국에서 무용담을 세운게 아니라 국군 예비역 대령으로 군을 전역하고 원주에서 문총지부장으로 있으면서 왕년의 일본학병 시절 후배 장교인 박정희 소장이 마침 원주의 1군 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취임하게 되어 그 전부터 알고 지내던 박일송과 술자리를 같이하게 됐는데 왕년의 일본군 선배 장교던 박일송이 취중애 박소장의 뺨을 때렸다.

자세한 이유는 박일송씨가 말하지 않아 알 수 없다.

박일송씨는 박 소장이 대통령이 된 뒤에도 박정희 뺨을 때린 사람은 자기밖에 없다고 기고만장(?)하게 무용담을 털어놓곤 했다.

사실 박정희 소장의 뺨을 때린 사람은 하나 더 있다.

장면정권 때 1군사령부 국정감사를 왔던 민의원 국방분과 위원장 이철승 의원이 군사령관이 폭음 않도록 술자리를 간섭한(?) 박정희 부사령관의 뺨을 `갈겼다`.

이철승 의원은 일본에 갔다 5·16을 맞고 박 소장을 폭행(?)한 것이 죄 밑이 되어 일본에 장기간 피신성 체류를 한 적이 있는데, 박 대통령의 관용으로 무사귀국이 허용된 적이 있다.

박 소장 뺨을 찰싹 한 것보다 더 기찬 기행경력이 박일송씨에게 있으니 국제 봉명학회를 조직하여 당연직 총재가 되어 미국 케네디 대통령과 일본 나카소네(?) 수상에게 감사패를 수여하여 한국의 돈키호테(?)로 전매특허를 받았다.

금슬이 더할 수 없이 좋던 부인이 병사하고, 80대의 박일송은 20대 처자와 공식석상에도 곧잘 나타났다.

늙은 다윗왕과 동녀(童女) 아비삭 같은 관계인지, 그 관계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이 세상에는 아리송하다면 모든 의문은 해소된다.

박일송 선생은 자타가 문인(文人)으로, 대우하는 것이 사실이다.

모든 면에 어설픈(?) 내 눈에는 박일송씨는 서예가로서, 일가(一家)를 이룬 분으로 확신한다.

1990년부터 해마다 연초(年初)가 되면 연하장 대신 휘호를 내려주신다.

`심청사달(心淸事達)/ 봉명산방(鳳鳴山房)/ 1991.2.14 박일송`이란 휘호를 필자에게 보내주셨는데 정성스럽게 표구를 하여 거실벽에 걸어두고 하루에도 여러 차례 뜻을 되새겨본다.

`심청사달`, 마음이 맑으면 모든 일이 잘된다는 뜻이다.

오늘날 가정일이, 국가 일이 잘 풀리지 못하는 것은 국민과 정치가의 마음이 올곧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남을 저주하고 원망하기 전에 내 마음부터 점검해야 한다.

박일송 선생이 내게 마지막으로 휘호를 보내 주신 것이 2001년 5월이다.

문단의 모임에도 잡지의 지면에도 박일송 선생의 자취가 보이지 않는다.

박일송 선생의 생몰 여부를 문단 심장부에서도 까맣게 모르고 있다.

필자가 몇 년 추적하여 박일송 선생께서 2007년 타계하셨음을 알아냈다.

기인(奇人)으로 사시느라고 남다르게 고통과 고생이 크셨으리라.

삼가 선생의 명복을 빌며, `심청사달의 좋은 글 뜻이 우리 국민 전체에게 실천되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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