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의성출신의 문학평론가 임헌영(68) 민족문제연구소장은 1941년 의성군 금성면 구련1리 임씨 집성촌에서 태어났다. 임 소장은 민족문학과 리얼리즘, 분단문제 등에 대한 평론으로 이름이 높은 한국의 대표적인 문학평론가다.

또 월간 다리를 시작으로 월간 독서, 한길문학, 한국문학평론 등의 주간을 역임했고, 세계한민족작가연합회 회장이자 에세이 플러스 주간, 계간 `서시`주간 등을 맡아 일하고 있다. 특히 1993년 9월부터 지금까지 무려 16년동안 현대문화센터에서 수필창작 강좌를 계속해 수필가들을 길러내고 있다. 오는 11월에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앞두고, 현재 마무리작업으로 분주하다. 임 소장을 만나 고향에서의 아련한 추억들, 삶의 역정, 최근의 근황 등을 들어봤다.

<편집자주>

-고향 의성에 대한 추억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고향마을은 황해도 풍천 임씨 집성촌이었고, 60호정도 되는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초등학교는 조문(召文)초등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때는 치솔이나 치약같은 게 없어서 이빨을 안 닦고 다녔어요. 그러면 담임선생님이 냇가에 데려가서 모래로 이빨을 닦도록 시키고, 냇물로 헹구고 이빨검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중학교는 의성읍에 있는 의성중학교를 다녔는 데, 30리정도 떨어져 있어서 중앙선 (경주-서울)기차로 한 정거장(11.7km)을 가야했습니다. 집에서 기차역까지 10리를 가야했는 데, 통학하는 일이 무척 낭만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매일 학교가기 위해 기차를 타니까 싫어졌어요. 새벽밥 먹고 10리 가서 기차타고 가면 배고파서 도시락을 까먹게 돼 저녁까지 쫄쫄 배가 고팠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겨울에는 의성의 숙모님 집 하숙생틈에 끼어 학교에 다녔고, 날이 풀리면 다시 집에서 통학했습니다. 이때 처음 소설을 읽어봤습니다. 또 그때의 6·25전사자 영결식이 기억이 많이 납니다. 유골이 의성군에 오면 모든 중고등학교 학생들을 모아서 영결식을 하는 데, 군인들이 마스크와 장갑을 끼고 유골함을 내놓고 묵념을 하면 가슴이 서늘해지면서 `왜 저렇게 사람이 죽어야 하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릴 때 꿈은 무엇이었습니까.

▲어릴 때는 시인이 되고 싶었어요. 중학교 2학년때부터 일기를 꼬박꼬박 쓰면서 대학교때 시를 써봐도 안되고, 소설도 써보니 잘 안돼요. 그래서 평론을 써 봤는 데, 평론은 돼요. 소설가 최인훈씨의 `광장`이 61년에 나왔는 데, 제가 `광장론`을 썼습니다. 촌놈이 와서 광장론을 써 중앙대학교 교지에 투고를 했는 데, 이게 교지에 실려서 유명해졌어요. 그 일로 최인훈씨를 만나 지금까지 교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가끔 학생들에게 “시나 소설을 쓰다 안되면 평론을 써라. 평론가 만들어주겠다”고 농담을 하곤 합니다.

-안동사범학교 시절의 에피소드를 소개해 주신다면.

▲안동사범학교 1학년때는 기차로 통학했는 데, 기차가 자주 연착을 했습니다. 그래서 너무 피곤해 안동서 자취생활을 했는 데, 방 하나 얻어서 4명이 같이 지냈습니다. 그때부터 문학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책을 많이 빌려 읽었는 데, 학교 도서관은 물론이고, 안동읍내 도서대여점 두 군데 책을 모조리 읽었습니다. 쇼펜하우어나 니체의 철학은 물론 성명학, 관상, 수상학 등 동양철학에도 심취했죠.

-고향에서 교사생활을 잠시 한 것으로 아는 데, 그때는 어떻게 지냈습니까.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생각에 모교인 조문초등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했는 데, 외롭고 답답한 시간이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청춘을 보내야 하나하는 생각때문에 독서에만 심취했습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월급으로 생긴 여윳돈으로 동료 교사들과 술독에 빠져 지냈습니다. 평생 먹을 술 그때 다 먹었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교사생활을 그만두게 된 것은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뭐라고 할까요. 답답하고, 인생의 억울한 것을 벗어나고 싶었고, 힘없게 느껴지는 것을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60년 12월에 사표를 냈는 데, 직접적인 계기는 3·15부정선거를 보고 참담함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서울서의 생활은 어땠습니까.

▲상경후 돈벌이로 미군부대를 다니며 초상화 외판을 했습니다. 미군 가족이나 애인 사진을 받아서 그림을 그려주고, 30불~100불 정도를 받아 화가에게는 20~30불 주고, 나머지를 갖는 것인 데, 돈벌이가 잘 됐습니다. 당시 미군부대 출입을 위해서는 패스(통행증)가 필요했는 데, 그 값이 대학 4년 등록금 전액수준이었기에 통행증없이 몰래 들어갈 수 있었던 평택에 자리를 잡아 서툰 영어로 영업을 했습니다. 그러다 5·16혁명이 나서 모든 미군부대 출입이 금지되는 바람에 학교에 다닐 수 밖에 없었죠. 대학 4년동안 16번 이사를 했습니다. 3개월에 1번씩 이사를 다닌 셈이죠. 별짓 다했습니다. 주로 입주 가정교사를 했는 데, 쫓겨나면 갈 데가 없어 친구 하숙하는 데, 같이 밥을 먹었습니다. 나중에 중대신문 기자가 되고, 입주 가정교사를 하게 돼 형편이 나아졌죠.

-우여곡절을 거쳐 1966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하신 이래 40여년 문학평론가로서 작품활동을 해왔는 데, 본인의 작품세계에 대해 말한다면

▲저는 문학이란 바로 인간의 생활 자체라고 생각합니다. 즉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풍요로운 삶과 영혼의 신념을 다루는 것이 문학이지만 그 속에는 고뇌도 기쁨도 있고, 개인의 고뇌와 민족과 인류의 고뇌까지 함께 포함되는 그런 문제를 다룬 것이 문학이라는 생각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1974년 문학인 사건으로 투옥된 적이 있고, 1979년 남조선민족해방전선(약칭 남민전)사건으로 투옥돼 1983년에 풀려나고, 1998년에 복권되는 등 옥고를 치렀는 데, 문학의 참여현장에서 문학을 실천하려고 한 것입니까.

▲저는 문학인으로서 문학을 남기고 싶지, 투사로 남고 싶은 게 아닙니다. 다만 박정희 정권에서 어용문인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정권과 정면 대결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을 문학인 사건으로 체험하면서 남민전에 참여했죠. 서슬퍼런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지하조직을 만들어 민주화운동을 할 수 밖에 없다고 판단했고, 그래서 독재정권과 맞서 싸운 거의 유일한 대중 지하조직이었던 남민전에서 `독재타도`를 외치며 정면으로 투쟁했던 겁니다.

-휴머니즘을 지향해온 문학평론가로서 시대의 험한 격랑에 떠밀려 왔다는 생각도 듭니다.

▲만약에 70년대의 비정상적 정치하에서 하나같이 새마을운동을 찬양하고, 당대의 권력자를 예찬하는 문학만 있었다면 과연 지금같이 풍요로운 문학이 있겠습니까. 문학은 인간의 삶과 마찬가지로 여러가지 스펙트럼, 다양성이 있는 것입니다.

삶을 그리는 게 문학의 올바른 양상인 데, 보통사람들이 어렵고 가난하며, 억압과 수탈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그린 것을 좌경이고, 정치적인 문학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꽃을 노래하는 것도, 열애에 빠진 것도, 배고픔과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것도 문학입니다. 정치를 비판하는 것도 문학의 다양한 스펙트럼 중 하나일 뿐입니다. 문학인들이 독재권력을 비판하는 걸 좌경이라고 한다면 세계문학사는 모두가 좌경이 됩니다.

-조만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한다고 들었습니다. 계획이 어떻게 됩니까.

▲11월에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할 예정입니다. 명단은 2년전에 발표했고요. 인명사전 발간과 관련, 재판에 걸린 것도 있지만 법적으로 진 것은 없습니다. 고발한 쪽이 패소했죠. 왜냐하면 한나라 한민족의 생존권을 보호해주는 것은 국권인 데, 국권을 손상시킨 행위를 역사적으로 밝힌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여론조사의 대상도, 권력 특정세력의 이해관계의 대상도 아닙니다. 무조건 해야 됩니다. 나라를 뺐겼고, 여기에 도움을 줬는 데, 이 문제에 대해 `지금 왜 그러냐`고 말하는 사람은 나라뺏긴 설움이 어떤 것일까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자기 민족과 나라를 손상시키면서 자기들은 잘 먹고 잘 산 것이니 불명예를 받아야 합니다. 어떤 변명이 있어서도 안됩니다. 또 반대 목소리가 크다면 그 목소리가 크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더욱 청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화합의 정신에 역행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있습니다.

▲화합에 역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전 발간은 징벌이 아니라 역사학적인 연구서입니다. 어떤 신분적인 제약도 없고, 이걸 계기로 다른 사람들이 연구를 깊이 해달라는 얘기입니다. 앞으로 나라가 위기를 당했을 때 절대로 배신해서는 안된다는 정신을 심어주는 일입니다. 프랑스는 굉장히 가혹할 정도로 독일 협력자를 응징했습니다. 6천명이 넘게 사형했고, 2백만명 넘게 조사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지금도 나치협력자로 밝혀지면 공무원은 해직되고, 법정에 서게 됩니다. 시효도 없습니다. 반인륜적 범죄는 시효가 없다는 거죠. 반인륜적 범죄는 인류평화와 반인도주의적인 전쟁을 지지·찬양 고무한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친일이라면 일본 정치가 군국주의였고, 군국주의가 동남아 전체를 침략하겠다는 것이었기에 유엔이 정한 반인륜적 범죄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은

▲고향에 자주 가고 싶습니다. 고향에는 아는 사람도 없고, 집안 친척도 없고, 동기들은 모두 작고했어요. 그런데도 고향이 점점 그리워져요. 지난 2007년 돌아가신 어머니도 수정사에 모셨기 때문에 일년에 두번씩 제사지내러 갑니다. 그래선지 서울에서 경북사람 만나면 그저 친근감이 생겨요. 개인적으로 제일 기쁠때는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위해 연구할 때입니다. 글 쓰기위해 이 책 저 책 자료를 찾아보며 연구하는 순간이 가장 기뻐요. 만년에도 바라는 것은 연구해 글 쓰는 것이고, 가장 하고 싶은 것은 한국문학사, 특히 현대문학사를 정리하는 것입니다.

/김진호기자 kjh@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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