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몽·광개토태왕… 웅대한 민족의 기상 숨쉰다

지난해 3월부터 격주로 연재되었던 이용선기자의 문화유산답사기가 막을 내립니다. 앞으로 4회에 걸쳐 그동안 연재되었던 신라의 문화유산과 중국에 남아있는 고구려유적, 호남지방의 백제유적 가운데 대표적이고 인상깊었던 유적들을 정리하는 의미에서 다시 한번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동안 많은 관심과 조언을 보내주신 독자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편집자 주>

2008년 북경올림픽의 열기로 지구촌이 뜨겁게 열광하고 있을때, 중국에 남아있는 우리의 문화유산, 하지만 지금은 중국의 눈치를 살피며 답사를 다녀야 할 처지에 놓여진 고구려유적 답사에 나섰다.

먼길을 떠나 힘들게 찾아간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단체사진을 찍는 것도 중국 관리인들의 눈치를 살피며 해야하는 서글픈 현실이 고구려 유적을 대하는 마음을 더욱 애틋하게 하는 답사길이었다.

■ 천혜 자연의 보고 `백두산`

백두산은 기후의 수직적 분포가 뚜렷이 나타나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저지대에서 정상부까지 온대에서 한대에 이르는 수목의 변화상을 잘 보여준다. 500~1천50m 까지는 혼합림지대이다. 높이 1천750m 까지는 침엽수림지대로 원시림을 연상케 한다. 높이 2천100m 까지는 관목림지대로 여름 최고기온이 10도를 넘지 못하고 토양이 척박한 데다 바람이 강하기 때문에 이런 환경에 적응하는 이깔나무·월하나무 등이 주요 수종을 이룬다. 높이 2천100m 이상은 동토지대(凍土地帶)로 한대림지대이다.

천지는 수면의 해발 고도가 2천190m이며, 평균 수심 213.3m, 가장 깊은 곳이 384m 이고, 남북거리 4.85km, 동서거리 3.55km, 둘레가 14.4km에 이르는 매우 넓고 깊은 호수이다. 천지의 둘레로 해발 2500m의 봉우리만 16개나 되며, 그 중 9개가 중국에 있고 한반도 최고봉인 장군봉(2744m)은 북한에 있다.

■ 주몽 설화 간직한 `오녀산성`

오녀산성은 길림성 환인현 소재지에서 동북쪽으로 8.5km 거리에 있는 오녀산(해발 820m)의 남쪽등성이 두어 개를 포괄하여 쌓은 성으로서 고구려 시조 주몽이 B.C 37년 수도로 삼아 유리왕 22년(A.D 3년)까지 40여 년간 사용하였던 곳이다. 성은 동남쪽으로 큰 골짜기를 끼고 있고 서남, 동북쪽에 약간 낮은 곳이 있으나 서쪽, 북쪽 및 동북쪽의 대부분은 깎아지른 듯 한 수 십 미터 높이의 낭떠러지를 이루고 있는 험준한 지대를 이용하여 쌓았다. 820m의 산 정상에 200m가 넘는 직벽이 3면으로 절벽을 이룬 천혜의 환경에 성벽을 쌓아 난공불락의 요새를 이룬 것이다. 게다가 정상에는 넓은 평지가 있고, 수백 명의 식수를 해결할 수 있는 연못까지 있는 산성이다.

■ 천연의 요새 `백암성`

백암성은 당나라의 침략을 저지하고 고구려의 요동지역을 방어하는 성의 하나로서 개모성, 안시성, 요동성, 봉황성 등과 함께 고구려 서부 일선에 위치하고 있다. 남쪽으로는 태자하(太子河)로 불리는 큰 강이 자연 해자(垓子)를 이루고 있어 성벽을 쌓지 않았고, 동·서·북 3면은 험준한 지형을 따라 견고히 쌓은 석성에 적의 공격을 효율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치(稚)를 설치하였다. 성은 내성과 그를 둘러싼 외성으로 되어 있는데, 정상에는 사각형의 점장대(點將臺) - 성에서 전투를 지휘하던 곳 - 가 남아있다. 이곳에서 주위를 바라보면 태자하와 성 아래의 마을과 넓게 펼쳐진 들판이 한 눈에 들어오는 천연의 요새임을 알 수 있다.

장수왕릉과 광개토태왕비는 1만2천여기의 고분과 20여기의 고분벽화로 시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는 집안시에 있다. 집안은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로서 424년간(3~427년) 정치·문화의 중심지였다.

■ 동아시아의 피라미드 `장수왕릉`

동아시아의 피라미드라 불리며 우리에게 장군총으로 잘 알려져 있는 장수왕릉은 사다리꼴의 7층으로 높이는 12.4m로 일반적인 아파트 5층 높이이다.

기단은 32m며, 1층의 돌은 하나의 길이가 5.5m나 되는 엄청나게 큰 돌로 이처럼 잘 다듬은 돌이 1천100여개나 사용되었다.

장수 왕릉이 오랜 세월을 버틸 수 있는 가장 큰 원동력은 튼튼한 기초공사에 있다.

왕릉 주위의 바닥에 1m 전후의 큰 돌을 3m 정도의 넓이로 깔고, 그 사이를 다시 작은 돌을 다져 넣어 엄청난 무게의 왕릉의 밀려나지 않게 한 것이다. 그 밖에도 그렝이 공법과 퇴물려쌍기와 홈파기 등의 방법을 사용해서 1천500여년이 지난 후에도 후손들이 직접 보고, 만지며, 조상의 얼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 고구려 역사 숨쉬는 `광개토태왕비`

광개토태왕비는 높이가 6m39cm로 3층 건물 높이다. 사각기둥의 모양으로 어느 정도 다듬은 부분도 있으나 거의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자연 돌의 몸과 머리 부분만 약간 손질해 거칠고 투박한 돌 네 면에 글자를 쓰는 방식은, 잘 다듬어서 글을 새기는 중국의 비석제작방법과는 전혀 다른 고구려 고유의 방식으로 거석(巨石)문화의 유풍이기도 하다.

거의 자연석 그대로의 형태에 글을 새겼기 때문에 4면의 형태가 조금씩 다르다.

각 면에 13cm 간격의 가로 세로로 줄을 긋고 그 안에 비문을 새겼다.

글자 한자의 크기는 14~15cm나 되며, 글자의 깊이는 5㎜ 정도로 총 1천775자의 비문이 새겨져 있다.

비석의 내용은 광개토태왕 이전까지의 고구려 역사와 고구려 왕계를 서술한 서문의 형태와 영락(永)5년(395년) 비려정벌부터 동부여정벌까지 7차의 정복사업에 대한 해설 등이 적혀 있다.

/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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