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안동출신의 권영진(서울 노원을)의원은 안동시 남선면의 60호 남짓되는 산골짜기인 양짓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안동서 나온 그는 대구 청구고등학교를 거쳐 고려대 영문학과를 졸업했으며, 고려대 대학원에 다닐 때는 총학생회장도 지냈다. 현재 한나라당 초선의원들의 모임인 민본21 회원으로서 의정활동에 열심인 권 의원을 만나 그가 꿈꿔 온 것과 그가 꿈꾸는 것에 대해 들어봤다.

<편집자주>

-안동에서 초등학교를 8년 다녔다고 들었습니다. 무슨 이유에서입니까.

▲어릴 때 조그만 마을에서 자라다 보니 나이가 1~2살 많은 동네 형들과 함께 어울려 다니는 게 보통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형들이 학교에 갈 나이가 되니까 갈이 놀던 친구들이 하나도 없는 겁니다. 어디에 갔나하고 찾아보니 모두 학교에 갔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그냥 학교에 가서 같이 다녔습니다.

그때 학교는 천막을 치고 학생을 가르쳤는 데, 다른 친구들은 출석을 부르고 저만 출석을 안불러주는 겁니다. 그래서 할머니에게 졸라서 출석부에 이름을 올려달라고 통사정해 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나마 2학년 올라갈 때는 어리다고 진학도 안됐습니다.

그래서 1학년을 2번 다녔고, 5학년때는 안동시내로 전학을 갔는 데, 키도 작고 어려 보인다는 이유로 못받아주겠다고 해 다시 4학년으로 낮춰 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래서 초등학교를 8년 다녔습니다. 문제는 그 뒤인데, 중학교 다닐 때 본의아니게 선배들에게 많이 혼났습니다. 학교 교문앞에 서 있는 선도역할하는 형들 가운데 초등학교 친구들이 많았기에 “○○야!”하고 이름 부르다가 혼났습니다. 그랬던 추억들이 새록새록 납니다.

-청구고등학교에 다닐 때 재미있는 얘기가 있으면 소개해 주시죠.

▲청구고등학교가 축구로 유명한 학교입니다. 그래서 길거리에서 청구고를 물어보니 중앙상고를 지나서 언덕위에 있는 학교라기에 찾아갔는 데, 바람이 많이 불었습니다.

이쪽 축구골대와 맞은 편 골대 사이로 모래 먼지가 휘리는 장면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처음에는 `뭐 이런 학교를 다녀야 하나`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청구고 출신 축구선수는 유명한 친구들이 있습니다. 변병주, 박경훈, 백종철 등이 유명하죠.

-축구로 유명한 학교인 만큼 축구에 얽힌 에피소드가 있다면.

▲고교 2학년때 가을 전국대회때 청구고가 결승전에 진출했는 데, 선생님께 응원을 보내달라고 졸랐는 데, 허락을 안해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제 하숙비를 몽땅 털어 친구들과 함께 5명이 집단으로 무단결석을 하고 응원을 갔습니다. 열심히 응원을 했는 데도 지고 말았습니다. 다음날 시무룩하게 학교에 갔는 데, 교감선생님이 교문을 지키고 계셨어요. 교무실로 잡혀가 내내 벌을 서다가 마지막에는 `애교심이 가상하다`는 이유로 용서를 받았던 게 기억납니다. 그 다음해에는 이게 계기가 됐는 지는 몰라도 전국대회 결승전에 전교생이 응원을 갔던 것이 추억으로 남았습니다.

-통일원 통일정책 보좌관으로 근무했는 데, 어떤 계기로 들어가게 됐습니까.

▲저는 80학번 민주화운동 세대였습니다. 그래서 공부보다 데모를 더 많이 했죠. 저는 그때 우리나라가 분단이 된 상태에서는 선진국으로 갈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북한과 관련한 공부를 했습니다. 석사와 박사학위 논문도 북한과 통일문제가 주제였는 데, 1990년 석사학위 끝날 무렵 재야통일운동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제도권 통일운동으로 궤도를 바꿨습니다. 그뒤 통일원 공채시험을 쳐 5급 사무관으로 6년 7개월 근무했는 데, 통일문제는 관료적 합리성으로는 해결이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1997년 2월 통일원에서 사표를 내고 그만뒀습니다. 그때 저는 “통일은 의지만으로는 안되지만 언젠가는 된다. 그러나 통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통일이 돼야 하며, 통일 이후가 중요하다”고 봤습니다. 즉 남북이 함께 잘 사는 통일이 중요하고, 정작 통일사업보다 나라를 선진강국으로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게 결론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목적을 이루기위해서는 바로 교육이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학교로 돌아가서 박사학위도 하고, 교수생활을 하며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런 판단에도 불국하고 정치에 뛰어든 것은 어떤 이유입니까.

▲제 유전자 또는 DNA위에 정치가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1999년에 이회창 총재를 도와서 대통령을 만들기 위해 보좌역으로 일했습니다. 선진강국이 되려면 리더쉽이 중요하고, 민주화 이후 지도자는 국가경영자적 리더쉽이 필요하다는 측면에서 이회창 총재를 돕기로 했습니다. 정치권보다 다양한 경험을 가진 이 총재가 대통령으로서 좋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이 총재는 제게 “젊은 부대를 만들어달라”고 당부했고, 저도 열심히 뛰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한나라당에 젊은 사람을 찾아보기 힘든 때입니다. 저는 소장개혁 그룹으로 `미래연대`를 만들었습니다.

2000년 총선때, 저는 출마하지 않았지만 미래연대를 통해 국회에 젊은 피가 수혈됐습니다. 오세훈 서울시장과 원희룡 의원이 당시 공동대표를 맡았고, 총선을 통해 멤버가운데 무려 14명이 국회의원에 당선됐습니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2년뒤인 2002년 대선에서 이회창 대통령 만들기에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민심을 제대로 읽지 못해 패배하고 말았고, 이 총재를 중심으로 한 꿈과 비전 역시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도 대학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어떤 길을 가야 할 것인가 고민이 커져갔습니다. 그러던 중 2003년 1월 다음해에 있는 2004년 총선에 출마할 결심을 굳혔습니다. 지역구는 서울 노원구 지역을 선택했고, 2003년 8월 그 지역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지역구를 선택할 때 무척 고심이 됐을 것으로 생각되는 데, 학교친구들이 많은 대구가 아니라 서울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실은 그 당시 대구에 있는 동기들을 두루 만났습니다. 한 50명쯤 될 겁니다. “대구에서 나와라, 같이 정치하자”는 친구도 있었지만, “대구에서는 큰 정치가 어렵다. 큰 물에서 정치를 해라”고 충고해 주는 친구가 적지 않았습니다. 저는 후자의 충고를 따랐습니다. 정치판 자체가 편가르기나 친구나 친인척과 사이가 소원해 질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는 충고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고향은 고향대로 두고, 정치는 서울에서, 큰 물에서 하기로 굳게 결심을 했습니다. 다만 노원구를 선택한 것은 노원구 중계동이 서울 다른 지역보다도 교육열도 높은 데다 2002년 노무현 대통령 선대위원장을 했던 임채정 전 국회의장이 출마한다고 해 정치거물인 임 전 의장에게 도전해야겠다고 마음먹었기 때문입니다. 출마를 결심한 이상 빨리 유권자에게 가야 한다고 생각해 이사도 서둘러 했습니다. 강북은 한나라당 입장에서는 불모지이지만 깃발을 세워보겠다는 각오도 있었습니다. 결국 낙선의 고배를 마셨죠.

-정치입문이 그리 순탄치는 않았던 셈인데, 낙선때 어떤 생각을 했습니까.

▲당시 낙선은 제 정치인생에서 큰 자양분이 됐습니다. 겨우 8개월 선거를 준비해 당선됐다면 유권자 한분 한분이 얼마나 소중한 지를 몰랐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저는 1.9% 표차로 낙선했는 데, 투표 3일전까지는 이기는 것으로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 당시 민주당 정동영 대표의 노인폄하 발언 여파가 역작용을 일으켜 상대후보의 표를 응집시키는 바람에 제가 떨어진 것으로 분석됐습니다. 저는 그때 `약자를 위한 정치`와 `나눔과 배려의 정치`를 펴겠다고 강조해왔기에 영구임대아파트 단지에서 상대방에게 몰표를 몰아주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왜 그랬을 까`. 저는 그때 어려운 분들을 마음으로 위하는 정치인이란 신뢰를 받지 못했다는 뼈저린 반성을 했습니다.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정치인이 되려면 지역에 뿌리를 깊이 내린 정치인이 돼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뒤 4년동안 원외위원장으로서 저는 열심히 뛰었습니다. 2006년 서울시 정무부시장으로서 장애인 단체로부터 감사패도 받았습니다. (권 의원은 이때 장애인 이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장애인 콜택시를 당시 120대에서 280대로 획기적으로 늘렸고, 바다구경조차 어려운 장애인을 위해 해변캠프를 조성하는 등 장애인 복지정책에 힘썼다.)

-오세훈 서울시장의 시정을 평가한다면.

▲오세훈 시장과는 고대 1년 선후배 사이인데다 미래연대 멤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서울시장과 정무부시장으로 취임한 뒤 “여러 사람이 반대하더라도 지금부터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을 장기계획으로 지금 당장 시작하자”고 의기투합했습니다. 그래서 문화, 디자인, 한강르네상스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이런 계획은 모두 8~10년 계획입니다. 임기 4년 막바지인 오세훈 시장도 그래서 한 번 더 서울시장에 출마해 프로젝트를 완성할 생각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초창기에는 시민들이 `디자인 서울`이란 화두에도 공감하지 않았는 데, 이제는 디자인 코리아로 발전했습니다. 잘 시작했다고 봅니다. 또 주거정책과 관련해서는 집이란 곳을 사고 파는 것이 아니라 사는 곳이란 개념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쉬프트 개념을 도입했습니다. 선풍적인 호응을 받고 있죠. 후분양제도도 함께 만들었습니다.

-장애인 정책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이게 된 계기가 있다면.

▲노원구가 서울에서 장애인이 가장 많은 지역구입니다. 그래서 자주 만나다 보니 자연히 관심을 갖게됐습니다. 특히 장애인들이 보통 사람들에 비해서도 작은 것에 고마워하고, 인간적으로 더 따뜻하다는 것을 잘 알게 되면서 더욱 많은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대한장애인체육회 배구협회장을 맡고 있기도 합니다. 더구나 장애는 후천적인 것이 90%인 만큼 누구나 잠재적인 장애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장애인 정책은 비장애인의 보험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끝으로 권 의원의 정치철학은 어떤 것입니까.

▲자유민주주의에서 좋은 공동체는 승자로서 앞서가는 사람은 세금내고 공정한 질서를 지키는 한 간섭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고, 패자나 낙오자에 대해서는 나눔과 배려로 지원을 해 줘야 합니다. 이런게 정치라고 생각합니다. 정치는 그런데서 의미와 보람과 사명이 있다고 믿습니다. 저는 민본21이란 초선의원 모임을 통해 보수정당인 한나라당에서 정책균형추 역할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어느쪽이든 한쪽으로 치우치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김진호기자 kjh@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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