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새벽에 시를 쓴다. 껍질 벗겨진 은사시나무의 실존에 대하여. 아니, 반성문을 쓴다. 그 나무껍질 벗긴 내 죄에 대하여. 내 죄는 부끄러움이나 자책에서 끝날 수 있지만 상대의 실존은 치명타를 입거나 고사(枯死)할 수 있음에 대하여.

어느 봄날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다. 모 영내 은사시나무 삼십여 그루가 허리 껍질이 벗겨진 채 방치되어 있었단다. 은사시나무에서 꽃가루가 날려 식사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였다. 둥치에서 사람 허리만큼 올라온 부분의 껍질을 벗겨 방치하면 나무는 고사하는 모양이었다.

꽃가루 날려야 하는 건 은사시나무의 생존방식이고, 그게 방해가 되는 것은 인간의 실존이다. 따라서 불가피하게 자연을 이용해야 하는 입장에서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에 대해 뭐라 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하지만 거창한 생태주의자나 자연보호주의자 입장이 아니라 그저 단순한 `실존`의 문제로 생각해봤을 때도 그 기사는 내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아무리 봐도 `방치`가 `고사`로 이어지는 일련의 파노라마는 은사시나무에게 너무 가혹한 형벌이다. 차라리 적법한 절차나 당국과 협의를 거쳐 은사시나무를 벌채했다면 이런 쓰라린 기분은 들지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방치와 고사가 주는 끔찍한 비열함을 느끼지 않아도 되니까.

은사시나무가 말라가는 동안, 인간들은 아무 일 없이 그 주변에서 점심을 먹고 수다를 떨 것이다. 뿌리나 둥치의 고통에 대한 그 어떤 자책이나 미안함보다 제 밥그릇에 꽃가루 날리지 않는 무탈함에 대한 수다를.

은사시나무는 적어도 해목(害木)이 되기 위해 자라지는 않았다. 자라기 전 곧장 뽑아주어야 할 나무로는 `어린왕자`의 바오밥나무로 족하지 않았던가. 적어도 걷잡을 수 없는 뿌리 번식으로 어린왕자의 별이 파괴되어서는 안 되니까.

그에 비하면 은사시나무는 무죄다. 햇빛 아래, 앞뒤 다른 색으로 반짝이는 잎들은 뭇 사람들에게 노래가 되고 쉼터가 되었을 뿐이다. 제 생존 본능을 위해 봄 한철 꽃가루 날린 것이 유죄라면 그건 애교 정도로 봐줄 수 있지 않을까? 그걸 양보 못해 순한 죽음도 아닌 `고사하기 까지 방치`하는 그 비열함에 반성문을 쓰고 싶을 뿐이다.

더러 비열하고, 자주 자책하는 게 인간이다. 의도하지 않은 죄이기에 양심 있는 자는 그 자책이 오래간다. 그 때 망가진 제 영혼을 순진무구한 풀밭에 마냥 풀어놓고 싶어지는 게 인간이기도 하다.

포리스트 카터의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아름드리미디어, 2003)에서 우리는 잠시 위안을 얻어도 좋을 것이다. 성장소설이란 점에서는 `라임오렌지나무`와 닮았고, 자연 친화적 요소가 등장한다는 점에서는 `어린왕자`에 가깝다.

인간 속성이 아무리 비열하다 해도 자연에의 향수를 쉽게 잊지 못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우리 영혼을 따뜻하게 데워주기에 충분하다. 주인공 `작은나무`는 자연의 이치를 할아버지로부터 배운다. 단순하지만 지혜롭게 살아가는 인디언의 모습은 `방치`와 `고사`를 일삼는 우리 모습을 되돌아보게 한다.

아침이 오고 있다. 은사시나무를 위한 내 시는 여전히 미완성이고, 다만 나는 밑줄을 그을 뿐이다.

`할머니는, 사람들은 누구나 두 개의 마음을 갖고 있다고 하셨다. 한 마음은 몸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을 꾸려가는 것이다. 몸을 위해서 잠자리나 먹을 것을 마련할 때는 이 마음을 써야한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런 것들과 전혀 관계없는 또 다른 마음이 있다. 할머니는 이 마음을 영혼의 마음이라고 부르셨다. 만일 몸을 꾸려가는 마음이 욕심을 부리고 교활한 생각을 하거나 다른 사람을 해칠 일만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이용해서 이익 볼 생각만 하고 있으면 영혼의 마음은 점점 졸아들어서 밤톨보다 더 작아지게 된다. 몸이 죽으면 몸을 꾸려가는 마음도 함께 죽는다. 하지만 다른 모든 것이 다 없어져도 영혼의 마음만은 그대로 남는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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