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종前 문경중 교장
나는 음력으론 `동짓달 스무여드렛날` 태어났으니, 뱀띠(신사생)인데, 북의 거물보다 한 달 이틀 앞서 태어났다.

겨울 뱀띠는 동면 중이라 팔자가 편하다는데, 나는 양력으로 말띠라서, 평생을 말(馬) 같이 어려운 인생을 살았다.

일흔이 내일모레지만, 가장(家長)의 중책을 지고 살고 있으니, 말띠와 `현실 속의 말`이 묘하게 들어맞는다.

신문이나 방송에 언어순화를 한다고, `똥`이란 말을, 숨기고 `X` 또는 `O`로 표기하는 데 나는 정서상 공감할 수 없다.

차라리 `똥`보다 `뱀`이란 말을 `X` 또는 `O`로 표기함이 더 적절할 것 같다. `뱀`은 실물을 보나, 글자로 표기하나, 똥보다 더한 혐오감을 느낀다.

서론이 길면, 자동적으로 본론이 짧아지기 마련이어서 이만 줄이고 본론으로 돌입하려 한다.

`양두사`는 머리가 둘 달린 뱀으로, 중국 고대 손숙오 이야기에서 처음 `양두사`란 말과 만나게 되었을 뿐, 실물을 볼 수 없었다.

십여년 전 X중학교 과학자료실에서 액침표본으로 된 `양두사`를 처음 보고 놀라움을 누를 수 없었다.

그 뒤 TV화면에서 살아서 움직이는 큰 양두사를 보고 나서 양두사도 현존하는 뱀인 것을 확실히 알게 됐다.

머리가 하나 있는 뱀보다 머리가 둘인 뱀이 여러모로 더 나을 것 같지만 숫자가 극소수인 것으로 보아 두 마리의 뱀이 언젠가 지구 상에서 사라질 날도 올 것 같다.

머리가 둘 달린 뱀은 한 마리의 뱀일까?

두 마리의 뱀일까?

궁금하기도 하겠지만 이스라엘의 지혜서 `탈무드`가 명쾌한 대답을 해준다.

가장 간단하게 식별하는 방법은 뜨거운 물을 양두사의 한쪽 머리에 퍼붓고 나서 반응을 보면 된다.

뜨거운 물을 뒤집어쓴 뱀 대가리는 성질이 나서 펄펄 뛰는데 뜨거운 물을 덮어쓰지 않은 남은 머리가 태연한 자세 그대로면 분명 몸은 하나지만 확실히 두 마리의 뱀이다.

하나의 머리가 공격을 받으면 다른 하나의 머리도 공격을 받은 것처럼 동고동락할 때 비로소 양두사는 한 마리의 뱀인 것이다.

북한은 지난 6일 새벽 2~4시 사이에, 4천만 t의 물을 기습방류하여 임진강 둔치에서 단잠을 자던 대한민국 국민 6명이 비명횡사하고 시신 수색에만 연인원 1만7천명이 동원되어 사건 4일 만에 임진강을 샅샅이 뒤져 시신을 천신만고 끝에 겨우 찾았다.

한 사람의 죽음은 그 사람만의 불행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가정이 파괴되고 이웃과 사회에도 심각한 영향을 끼친다.

북한은 기습방류로 무고한 생명이 비참한 최후를 맞았음에도 입술에 발릴 말일망정, 미안하다든지 유감으로 생각한다는 최소의 예의도 갖추지를 못했다.

그러면서도 입만 열면 `민족끼리`를 스님 염불처럼 상투적으로 뇌까린다.

1950년 6월25일의 6·25 사변도 새벽 4시30분에 기습을 했고 2009년 9월6일의 황강댐 기습방류도 새벽에 이뤄졌다.

이 땅의 `붉은 악의 역사`는 새벽에 기습적으로 이루어졌다. 북한이야 늘 그렇다고 치자.

한국의 야당도 이번 사태에 대한 논평이 가관(可觀)이다.

`이번 사태는 남북소통이 안 돼서 그렇다`고 남쪽에 살면서도 북쪽에 늘 이해심(?)이 두터운 그들은 이번에도 북쪽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번 사태는 `남북소통`이 안돼서 일어난 게 아니라 `남북 물 소통`이 너무 잘되어 참변이 난 것이다.

북한도 종북세력도, 탈무드가 말하는 `한 몸`이 아니다.

나라의 어려움을 두고도 얼토당토않은 동문서답만 하니 동포로 애국정당으로 믿어온 우리만 바보다.

남북통일에 앞서 오늘의 우리나라 사정은 남남 통일이 더 시급한 화두다.

야당은 북과의 민족공조(?)에는 뛰어난 수준이지만 정부와의 국내공조는 초보단계에도 미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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