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형편집국/국장
백로(白露)가 지나고 추분(秋分)을 앞둔 가을이다.

신문 기자로서의 일상사가 뭔가 특별할 것이 있을 것 같지만 다람쥐 챗바퀴 돌듯 하니 계절이 바뀌는 것 말고는 별다른 자기 인식에 소홀한 것 같다.

시시각각, 매일매일 사회 구석구석을 체감하면서 감동과 환희도 있을 테지만 요즘엔 썩은 냄새가 온천지에 진동하는 구역질병을 앓고 산다.

그러던 차에 본지 객원논설위원으로 있는 안동대학교 한문학과 신두환 교수가 낸 책을 한권 샀다.

`선비, 왕을 꾸짖다`란 제목의 이 책은 상소로 보는 역사이야기다.

“요즈음 어사는 역마를 타고 포졸을 거느리고 마패를 노출시키고 본색을 드러내 뭇사람이 알게 하옵니다. 강산누각과 기암절승지, 이름난 절간을 찾아 활개를 펴고 놀이를 일삼으니 가는 길마다 그 고을에서 알아차리고 극진히 대접하니 이러한 어사는 보내지 않는 것보다 못하고 백성들에게는 도움은 커녕 해만 끼치옵나이다”

평안북도 용천 기생 초월이 헌종에게 올린 상소문 중 일부다.

2만1천여자의 방대한 초월의 상소문은 당대의 시폐를 묘사한 서사와 진솔하고 과감한 표현이 한 시대를 울린 조선 말기 최고의 문제작이다.

자기의 남편에 대한 성찰에서부터 출발하여 임금에 이르기까지 조정의 모든 관료들의 부패상을 신랄하게 비판한 당대 최고의 사회고발 상소다.

“군왕은 마땅히 경술(經術)을 좋아하여 날마다 유신(儒臣)과 더불어 경사를 토론하고 정치를 토론하여 그 이치를 묻고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이룩하기에도 겨를이 없는 터인데 만고에 걸쳐 변할 수 없는 윤상(倫常)을 무너뜨림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습니까?”

고려 충선왕 때 관리들의 잘못을 따지는 `감찰규정`이란 벼슬에 있던 우탁은 왕이 선왕의 후궁을 범했다는 소문을 듣고는 상복을 입고 도끼를 든 채 대궐에 들어가 왕의 패덕(悖德)을 지적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지부상소(持斧上疏)로서 글자 그대로 도끼를 들고 가서 왕에게 드리는 상소로 `내 말이 틀리다면 도끼로 내 머리를 쳐 달라`며 목숨을 걸고 상소한 것이다.

신하들이 놀라 벌벌 떨고 왕도 부끄러워 다시는 선왕의 후궁과 통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신라시대 김후직이 무덤 속에서 했다는 충간은 `묘간(墓諫)`이라고 해 선비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진평왕이 사냥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자 김후직은 사냥을 그만두기를 간했으나 왕은 듣지 않았고, 김후직은 병으로 죽기 전 왕이 사냥하러 다니는 길가에 자신을 묻어달라고 유언했다.

어느 날 왕이 사냥을 가는데 어디선가 “가지 마십시오” 하는 소리가 들렸고 왕은 묘에 얽힌 사연을 알고 크게 뉘우쳐 사냥을 가지 않고 정사에 힘썼다고 전해진다.

현전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상소다.

선조 7년에 율곡 이이가 올린 만언봉사(萬言封事)는 선조가 먼저 상소를 요청하고 이에 답한 상소다.

임진왜란 전 선조는 나라의 병폐를 인식하고 구국의 계책을 율곡에게 요청한 것이다.

1만 글자로 된 장문의 상소는 정치·경제·사회 전반의 문제점과 개선책을 담고 있으며 선조를 감동케했다.

저자는 `상소문은 왕조시대의 사라진 글이 아니라 그 서슬 퍼런 정의감과 직설의 정직함은 오늘을 살아가는데도 절실히 필요한 정론`이라고 정의했다.

죽음을 무릅쓰고 간했으며 도끼를 들고 들어가 알렸으며 벼슬을 버리면서 직간을 했다.

머리를 찧으며 이마에 피를 흘릴때까지 간했으며 자결을 하면서까지 지키고자 했던 것, 이것이 바로 선비가 가야만 하는 `우국애민`의 길이었다고 했다. 이 가을, 자신의 몸가짐을 청아하게 하고 지부상소를 올릴 강직함이 있는지, 그 상소를 받을 허물은 없는지 되새겨볼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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