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영 서양화가
역사에서는 만약에라는 말이 결코 통할 수 없다고 한다.

만약에 삼국을 고구려가 통일 했더라면 지금의 북경을 포함한 중국의 절반이 우리국토가 되었을 텐데, 6·25 때 맥아더가 좀 더 북진을 했더라면 지금의 남북한은 없었을 텐데, 그랬더라면 어땠을 텐데, 등등 과거를 뒤돌아보고 회한에 젖어보는 것은 나라의 역사뿐만 아니라 각자의 인생길에서도 이 같은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경우가 있을까? 그러나 지나온 과거를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는 것이고 보니 어디까지나 반면거울로 삼을 뿐이다.

타임머신이 발명되어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갈 수 있는 시대가 올 것이라는 상상이 한창 유행한 때가 있었다.

그렇게 되면 한 국가의 떠올리기 싫은 역사는 물론이고 각자가 살아온 인생길에서 떠올리기 싫은 과거는 깨끗이 지워버리고 싶은 염원을 풀 수 있지 않을까하는 끝없는 상상에 즐거워 한 적도 있었다.

“잘살아보세” 라는 새마을 노래가 온 산천을 진동했던 때가 70년대 벽두다. 경제개발의 기치가 하늘을 찔렀고, 경제부흥만이 우리의 살길이라고 외치며 온 국민을 거세게 독려하던 70년 후반에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미술과를 나온 사람이 갈 곳이라 해봐야 교직 아니면 그다지 길이 없었던 때였지만 교직에는 별 흥미가 없었던 나는 같은 동기생과 광고사를 하나 만들어 동업을 해 보자고 뜻을 모았다.

그때는 광고사라 해봐야 간판집이 고작이었던 시절이라 광고사를 만들어 보자고 한 것은 매우 앞서가는 엉뚱한 발상이었는지도 모른다.

지금이야 광고조형물은 물론이고 메스미디어나 인터넷을 통한 광고뿐만 아니라 상상을 초월하는 광고업체들이 봇물을 이루고 있고 그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만 해도 헤아릴 수 없다고 한다.

분명히 이러한 시대가 올 것이라고 여긴 나는 이 문제를 가지고 어느 날 고향엘 내려가서 아버지께 약간의 사무실 임대비만이라도 대 주시면 힘껏 한번 해보겠다고 말씀 드렸다.

결과는 예측한데로 단호한 거절 말씀과 “네 자리는 다 마련해 두었으니 어디에 누굴 찾아가라.” 엄명이 있었을 뿐이었다. 결국 아버지의 강권으로 본의 아니게 어느 사립 고등학교의 교사로 처음 교직의 길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80년대 초반 교직에 있어본 분이라면 당시 선생님들이 얼마나 홀대를 받으며 하찮은 직업으로 분류되었는지를 잘 알 것이다. 얼마나 인기가 없는 직업이었는지 “멀쩡한 사람이 선생질 하네”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지금이야 하늘에 별 따기 보다 더 어려운 것이 교직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하니 세상 참 많이도 변했다.

그래서 시작한 나의 교직생활은 숱한 갈등을 안겨주기도 했다. 같이 교직에 입문했던 많은 동료들, 특히 공과 계통이나 상경계통 출신들은 학기 중에도 월급 많이 준다는 곳이 나타났다며 사표를 쓰고 나가버리는 것이 다반사였다.

“지금 나가면 학생들은 어떡하라고, 학기만이라도 마저 채워주고 나가달라.”는 교장의 애원을 몰라라 뿌리치고 떠나가는 선생님들을 볼 때마다 나는 무능하여 남아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곤 했다.

학교운영의 최 일선에 있어야할 교감은 도중에 빠져나간 교사를 채우느라 전국의 대학을 돌면서 일 년 내내 동분서주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가장 먼저 도마 위 고기가 된 것이 교육정책이다.

그렇다보니 교직사회도 엄청 많이 달라졌다. 때로는 내가 왜 이 길에 들었든가? 후회도 했고, 때로는 보람도 느끼며 그렇게 힘든 길을 걸어온 날들도 벌써 30년의 세월이 지났다. 변해도 너무 많이 변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최근 들어 많은 청소년들이 선호하는 직종의 하나로 교직을 꼽는다고 한다. 아직도 다른 직종에 비해서 보수가 많지는 않지만 비교적 안정적이라는 것 외에는 다른 매력이 없는데도 말이다. 모험이나 굴곡을 싫어하는 요즘 젊은이들 눈에는 그렇게 비치는 모양이다.

드러나 보이는 겉모습보다는 깊은 사명감이 없고서는 견디기 어려운 분야가 교직이다.

돌아보면 그나마 다행으로 여기는 것은 쥐꼬리 같은 사명감이라도 있었기에 지금까지 이 자리를 버틸 수 있었다는 자위를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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