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고 지는 바람 따라 청매(靑梅) 꽃잎이

눈처럼 내리다 말다 했다.

바람이 바뀌면

돌들이 드러나 생각에 잠겨 있는

흙담으로 쏠리기도 했다.

`꽃 지는 소리가 왜 이리 고요하지?`

꽃잎을 어깨로 맞고 있던 불타의 말에 예수가 답했다.

`고요도 소리의 집합 가운데 하나가 아니겠는가?

꽃이 울며 지기를 바라시는가,

왁자지껄 웃으며 지길 바라시는가?`

`노래하며 질 수도……`

`그렇지 않아도 막 노래하고 있는 참인데`

말없이 귀 기울이던 불타가 중얼거렸다.

`음, 후렴이 아닌데!`

- 황동규 시집 `꽃의 고요`(문학과지성사·2006)

`꽃의 고요`를 두고 부처님과 예수님이 한 자리에서 친구처럼 말씀들을 나누고 계신다. 어느 분의 말씀이 더 앞선 것인지는 굳이 따지지 말자. 대화의 순서가 서로 뒤바뀌어도 아무 상관이 없다. 부처와 예수가 함께 등장하는 그것도 서로 농하듯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시로 만들어진 것은 우리 시문학사에서 황동규 시인의 13시집 `꽃의 고요`가 처음이 아닌가 싶다. 지금 우리 사회는 종교 간의 벽은 높고 그 반목과 질시도 심하다. 부처와 예수가 한 `생명`에 관한 말씀을 나누고 있는 이 장면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자신의 시 속에 부처와 예수의 말씀을 빌려오는 것을 황동규 시인은 어떻게 생각해냈을까. 그 말씀들로 미혹(迷惑)하고 한계적 존재인 우리 인간의 삶과 죽음의 깊은 문제를 실감나게 그려내고 있는 시집 `꽃의 고요`가 나는 참 좋다. 꽃이 진다는 것은 한 생명이 다른 생명으로 건너감이다. “고요도 소리의 집합 가운데 하나가 아니겠는가?”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꽃이 질 때 “노래하며 질 수도….”라는 부처님의 말씀에 내 마음의 모든 문을 열고 놓고 오랜 생각에 잠긴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남들이 건방지다 할 것인가? 부처도 예수도 모두 사람 안에 있다. 진정코 사람 안에 부처와 예수가 살아 있어야 한다.

해설<이종암·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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