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정치역정… 한국 현대사 질곡 투영
반세기 정치역정… 한국 현대사 질곡 투영
  • 연합뉴스
  • 등록일 2009.08.18 22:20
  • 게재일 2009.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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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만장했던 영욕의 삶



후광(後廣) 김대중(DJ) 전 대통령은 통일운동과 민주화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대한민국 현대사의 거목(巨木)이었다.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으로 그가 헤쳐나간 반세기 정치역정에는 한국 현대사의 질곡이 오롯이 투영돼 있다. 민주화와 민족통일을 향한 의지는 투옥과 연금, 망명의 고통을 딛고 마침내 인동초(人冬草)처럼 피어올라 헌정사상 첫 수평적 정권교체와 해방 후 첫 남북정상회담이란 열매를 맺었다.

그러나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그가 놓지 못했던 남북화해라는 화두는 미완의 유업으로 남았다.



■섬소년에서 정치인의 길로

김 전 대통령은 목포 앞바다에 솟아있는 섬, 하의도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교육열이 남달랐던 어머니가 전답을 팔아 뒷바라지해 준 덕분으로 목포로 유학, 목포상고(현 전남제일고)에 수석 합격했다.

졸업 후 강제징집을 피해 일본인이 운영하던 해운회사에 취직했다 해방 후 이 회사 관리인으로 사업수완을 발휘, 목포일보까지 경영하는 등 청년실업가로 성장했다.

그는 해방공간에서 몽양 여운형 선생이 좌우익을 망라해 구성한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했다 좌익계열이 주도권을 잡자 환멸을 느껴 탈퇴했다. 그러나 건준에 몸을 담은 이력은 그를 평생 `색깔론`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한 멍에였다.

54년 실시된 제3대 민의원 선거 때 목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쓴 잔을 마신 그는 56년 장 면 박사가 이끌던 민주당에 입당, 본격적인 정치의 길로 들어섰다.

64년 김준연 의원의 구속동의안 처리 때에는 본회의장에서 5시간19분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연설로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 방해)를 해내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



■40대 기수론에서 6월 항쟁까지

71년 첫 대선 도전에서 97년 4수 끝에 최고 통치권자에 오르기까지 36년간의 대권 도전사는 좌절과 재기의 반복이었다.

67년 7대 총선에 당선된 뒤 그해 5월 한평생 정치적 동지이자 라이벌이었던 김영삼(YS) 전 대통령과 원내총무 경선에서 첫 대결을 펼치지만 고배를 마셨다.

그러나 70년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이철승 의원의 막판 지원으로 YS를 누르고 이듬해 대선에 나섰으나 박정희 대통령에게 95만표차로 석패했다.

그의 대권 도전은 야당의 대표 정치인으로 도약한 계기가 됐지만 긴 가시밭길에 들어서게 만든 원인이 됐다. 박정희 정권이 정적으로 지목, 탄압을 본격화한 것이다.

유신이 선포된 72년부터 87년 6.29 선언까지 17년의 시간은 납치와 망명, 투옥, 연금으로 점철된 암울했던 시기였다. 73년 일본 도쿄에서 국정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납치돼 수장당할 뻔했으나 미 정보기관의 도움으로 살아났고, 74년에는 명동성당에서 `3.1 민주 구국선언`을 주도했다가 3년간 복역한 뒤 가택연금을 당했다.

79년 10.26 사태로 복권, 정치일선에 컴백했지만 80년 `서울의 봄`을 맞아 다시 민주화의 꽃을 피우려던 그의 꿈은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무산됐고, 내란음모 혐의로 구속돼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는 이후 군사정권에 대한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사형에서 무기, 무기에서 20년형으로 감형돼 죽음의 그림자에서 또 한 번 벗어났지만 82년말 미국으로 쓸쓸한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양김 분열 후 정권교체까지

그는 87년 13대 대선을 앞두고 YS와 후보단일화에 실패하자 평민당을 창당해 출마했다. 당시 YS로 단일화될 경우 민주진영의 정권교체가 보다 유력시되는 상황이었지만 두 사람은 끝내 권력욕 앞에서 갈라졌다.

대선에서 노태우, 김영삼 후보에 이어 3위에 그치면서 민주진영으로부터 지역주의에 기댄 야권 분열의 책임자라는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만 했다.

김 전 대통령 스스로도 훗날 “당시 내가 후보직을 사퇴하는 게 옳았다”고 회고했다.

92년 12월 대선에서 YS에게 패해 대권 3수에 실패하자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홀연히 영국 유학을 떠났다. 곡절 많은 정치인생에 마침표가 찍히는 듯한 순간이었다.

93년 7월 귀국한 김 전 대통령은 아태평화재단을 설립하는 등 통일운동에 전념하는 듯한 행보를 보이다 95년 7월18일 정계복귀를 선언하고 호남을 지역적 기반으로 한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면서 정치전면에 복귀했다. 우여곡절 끝에 97년 15대 대선을 앞두고 박정희 정권의 최대 실세였던 김종필(JP) 자민련 총재와 손잡았고, `DJP 공조`는 외환위기를 맞아 `준비된 대통령` 탄생을 갈망하는 국민 여론을 타고 정권교체의 꿈을 현실로 만들었다.



■DJ정부 출범… 불운했던 말년

국민의 정부 5년은 순탄하지 않았다. 대선 승리의 감격을 누릴 여유도 없이 당선 다음날부터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힘든 나날을 보내야 했다.

김대중 정부는 5년 동안 외환위기를 단기간에 극복하고 역사적인 6.15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분단의 벽을 허물어 남북화해와 통일의 기반을 구축하는 성과를 거뒀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집권세력 내부의 갈등과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의 견제,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측근 비리 사건이 잇따라 터져나오면서 YS처럼 조기 레임덕에 빠지는 고통을 맛봐야 했다.

퇴임후 그는 외부활동과 정치적 발언을 통해 건재를 과시했다. 2006년 10월 북한 핵실험 사태가 터지자 “북미관계가 안 돼서 진전을 하지 못한 것”이라며 햇볕정책 책임론을 반박했고, 2007년 대선 전에는 여당의 대통합 방향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의 `한마디`는 퇴임 후에도 민주당과 전통적 지지층에 무시못할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이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민주주의와 서민경제, 남북관계가 위기에 빠졌다고 비판하면서 민주개혁세력의 연대를 주문하는 등 왕성한 정치활동 때문에 현실 정치 개입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이명박 정부를 독재로 규정하는 등 대정부 투쟁의 선봉에서 한나라당과 보수 진영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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