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초 `새집증후군` 보상 판결 이끌어내

경북 포항출신의 김영화 전 한국환경기술진흥원장은 요즘 강의준비를 위한 저서집필에 한창이다. 지난 3월부터 연세대학교 외래교수로서 자신이 환경부에서 환경정책을 다뤘던 경험에다 자신의 저서인 환경영향평가론을 덧붙인 강의를 학생들에게 펼쳐보이고 있다. 최근에는 좀 더 충실한 강의를 위해 환경관련 논문과 최근 학계의 동향 등을 반영하기 위해 더욱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한국환경행정의 산 역사`이자 `환경행정의 달인`으로 불리는 김 전 원장을 만나 고향에서의 추억과 공직에서의 에피소드, 근황 등을 들어봤다.

<편집자주>

산림청·지주 수차례 방문… 국립공원 구역조정문제 해결

무조건적 환경보호보다 개발도 필요하다는 `환경개선론자`

환경·경제 동반성장 위한 `저탄소 녹색성장 전도사` 자처

-어릴때 고향에서 뛰어놀던 추억들 가운데 어떤 일들이 인상에 남아있습니까.

▲어릴 적 기억은 주로 농사일에 관한 기억뿐입니다. 학교를 마치면 소 먹일 풀을 베고, 잡초를 뽑으러 다녔죠. 그때 문득 든 생각이 이런 일을 평생 해서는 안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초등학교를 마친 뒤 검정고시를 통해서라도 고교에 진학하게 된 셈입니다.

-어릴 때 장래 희망은 무엇이었습니까.

▲어릴 때는 교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농촌에서 자라는 아이들에게는 선생님이 가장 좋은 직업으로 보일 때였습니다. 좀 더 커서는 가정형편을 고려해 공짜로 대학을 나올 수 있는 곳을 선택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육사는 아시다시피 학비는 물론이고 잠자리걱정이 없을 뿐 아니라 용돈 걱정도 없어서 좋았습니다.

-육사를 졸업한 뒤 군인의 길을 가지 않고, 공무원생활로 뛰어든 것은 어떤 계기가 있었습니까.

▲그 당시 고 박정희대통령이 `국가를 위해 추진력있고, 청렴한 공무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면서 공무원시험에 응시하도록 권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제가 박 전대통령을 매우 존경해 왔기 때문에 그 뜻에 따라 행정공무원 시험을 치르게 됐습니다. 군에서 봉사를 하나 공무원으로서 봉사를 하나, 국가에 대해 봉사를 하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생각도 있었고, 존경하는 분의 뜻을 따르는 것이 보람있다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공직자로 근무할 때 보람있었던 일이 있다면 어떤 일을 들 수 있을까요.

▲환경부 관리관(1급)으로서 중앙환경분쟁조정위원장으로 일할 때입니다. 당시 새집증후군으로 인한 아토피성 피부염에 대한 최초의 피해보상판정을 해 친환경주택건설 자재 개발과 친환경 벽지 및 도료 개발에 기여했던 일이 보람있는 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판정내용은 전국 일간지 1면에 보도될 만큼 관심을 모았습니다. 대형 건설업체가 경기도에 시공한 아파트 벽지 자재에서 포름알데히드 등 유해물질이 나왔고, 이 때문에 한살난 남자아이의 아토피 피부염이 생겼기 때문에 치료비와 벽지와 도료 등 내부장식을 모두 바꿔주도록 판정을 냈죠. 그 이후 지어지는 아파트에는 모두 친환경벽지 및 도료가 쓰이게 됐습니다.

-환경부 자연보전국장으로 근무했을 때는 주로 어떤 업무를 하셨는 지요.

▲당시 환경부가 10년간 해결하려고 노력해도 풀지 못했던 오랜 숙제로 국립공원의 구역조정문제가 있었습니다. 제가 이 업무를 맡은 뒤 땅을 가진 개인과 국립공원의 구역조정문제를 해결했죠. 대전에 있는 산림청을 수십차례 드나들며, 땅 주인들을 만나 끈질기게 설득하고 협의해 어렵게 국가적 숙제를 해결했죠. 또 동강유역 생태보전지역 지정문제도 어려운 과제였습니다. 당시 댐 건설이 중지된 후 생태보전지역을 지정해야 했는 데, 영월·평창·정선 지역담당 정책과장을 40여회 만났습니다. 땅을 보상해 사들이고, 비료나 농약을 못쓰게 하고, 유기농으로 유도하는 일들을 했습니다.

-가장 어렵고 힘들었던 때는 언제였습니까.

▲환경부 기획예산담당관으로 예산업무를 3년동안 맡았는 데, 이 때가 가장 힘들었습니다. 그 기간동안 풍치를 앓으면서 어금니 4개를 뺄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그때 환경개선특별회계를 최초로 도입해 환경개선사업의 투자를 확대하고, 관리운영을 효율화하는 데 힘썼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부가금과 부담금 등을 거둬 일반 세금의 비중을 줄이는 자립형 특별회계 도입이 그때가 처음인 것으로 압니다.

-환경영향평가에 대해서는 저서도 쓰셨던 데, 환경영향평가를 한마디로 말하면 뭐라고 할 수 있습니까.

▲환경영향평가는 원래 미국에서 나온 제도인 데, 환경영향평가를 해서 하라거나 하지말라는 결정을 하는 의사결정제도입니다. 다만 미국은 땅이 넓은 나라여서 하지말라고 해도 다른 데 가서 개발사업을 하면 되지만, 일본이나 독일, 또는 우리나라처럼 땅이 좁은 나라에서는 의사결정도구로 쓰기는 어렵다는 생각입니다. 땅이 좁은 나라에서 개발사업을 어차피 해야 한다고 하면 환경영향이 적은 쪽으로, 또는 환경을 해치는 것을 예방할 수 있는 쪽으로 통제해서 환경을 관리하는 수단으로 바꿔 적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일부에서는 환경영향평가제도가 사업을 못하게 해야 하는 데, 사업자에게 면죄부를 만들어준다는 비판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환경에) 아주 나쁜 것은 못 들어오게 막아야 하지만, 아주 나쁘지는 않으나 피해가 있는 것은 피해를 줄이거나 오염을 줄이고, 사후에 계속 오염관리를 해서 환경피해가 없도록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환경운동과 관련해서는 어떤 지론을 갖고 있습니까.

▲환경운동을 하는 분들은 대략 두가지 부류로 나뉩니다. 첫째는 무조건 `개발은 환경파괴`라고 보고, 환경을 개발하지 않고 보호해야 한다는 환경보호론자가 있습니다. 둘째는 환경개선론자입니다. 환경도 놔 두면 자체적으로 퇴화하기 때문에 돈을 들여서 더 좋게 만들어야 하고, 개발도 일정 부분 필요하다고 보는 쪽이죠. 저는 환경개선론자 입니다. 경제성장이 환경을 개선하고, 환경이 성장을 지원하는 선순환 경제와 환경의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영어로 환경분야 회의도 주재할 만큼 영어에 능통하다고 들었습니다.

▲공무원 생활하면서 아침7시부터 시작하는 종로시사영어학원을 3년동안 다녔습니다. 두달이면 끝나는 코스를 매년 6회 반복해 약 18번 반복한 셈이죠. 그러다 보니 어느 날 눈이 많이 내려 학원에 늦게 도착했는 데, 들어서자 마자 교재의 몇쪽 몇번 문제를 공부하고 있는 지 알 정도가 되더군요. 그리고 난 뒤에 미국유학을 갔는 데, 공부하는 데 그리 어렵지 않을 정도로 영어를 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환경분야 회의라면 영어로 충분히 진행할 정도입니다.

-현재 정부에서 역점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는 저탄소 녹색성장은 어떻게 보십니까.

▲저탄소 녹색성장이야 말로 환경개선론자의 사상에 가장 잘 들어맞는 정책입니다. 저는 대학강의에서도 녹색기술과 녹색산업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녹색생활화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높이고 있죠. 에너지 절약이나 물절약, 생활용품절약, 걷기운동 확산 등과 같은 주제에 대해서도 강조합니다. 저 스스로는 `저탄소녹색성장의 전도사`라고 자부하고 있을 만큼 지지하고 있는 정책방향입니다.

/김진호기자 kjh@kbmaeil.com

김영화 전 한국환경기술진흥원장은

김영화 전 원장은 1950년 경북 포항시 북구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기북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검정고시를 거쳐 대구고등학교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태국의 아시아과학기술대학원에서 환경공학석사, 영남대에서 공학박사를 취득했다.

1978년 10월 육사출신을 위한 특별고시를 통해 행정사무관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했으며, 환경부에서 환경평가, 수질정책, 기획예산 업무를 담당했다. 대구지방환경청장, 영산강환경관리청장, 한강환경관리청장, 환경부 공보관을 거쳤으며, 환경부 자연보전국장과 환경분쟁조정위원장으로 역임한 뒤 지난 2004년부터 지난해 7월까지 한국환경기술진흥원장으로서 환경기술개발에 힘썼다.

지금은 연세대학교 외래교수로서 환경영향평가와 관련해 후진양성에 힘쓰고 있다. 저서로는 지난 2001년에 출간한 `최신 환경영향평가론`이 있는 데, 지난 2006년 2쇄에 들어가 대학과 대학원에서 교재 또는 참고서로 쓰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저작권자 © 경북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