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싣는 순서

① 들어가며-공민왕과 홍건적

② 공민왕은 왜 안동을 피난처로 택했나?

③ 임시수도 70일- 나라와 백성은 어떻게 대항했나?

④ 공민왕이 남긴 문화유산

⑤ 문화유산의 전승방안

안동은 지리적으로 경북북부의 중심지이기도 하지만 웅부로 명실상부하게 자리매김한 것은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이곳으로 몽진을 온 이후부터 이다. 공민왕은 수도 개성을 버리고 남쪽으로 파천하면서 왜 하필이면 임시수도로 안동을 택했을까? 왕이 다녀간 뒤 안동은 어떤 모습으로 바뀌었으며 현재의 안동인들에게는 공민왕의 파천이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 본지는 창사 19주년을 맞아 특별취재팀을 편성하고 관계 전문가들의 자문을 얻어 `공민왕과 안동`을 5회에 걸쳐 기획 연재한다.

<편집자주>

공민왕이 남긴 발자취

1361년 12월 임진일 고려 31대 공민왕은 2차 홍건전의 난을 피해 안동에 와서 난이 평정될 때까지 70일간 이곳에 머무른다.

전란 70일 동안 안동은 임시 수도의 역할을 하며 왕을 극진히 모셨다. 공민왕이 머물고 간 안동에는 이와 관련된 많은 문화유산이 곳곳에 산재해 지금껏 전해오고 있다. 공민왕이 하사한 백옥대와 옥관자 금대 비단 등을 비롯해 안동웅부와 영호루 현판 등 유형문화와 공민왕을 모시는 사당, 민속놀이 등 다양한 무형문화가 전승돼 오고 있다.

지난달 29일부터 3일간에는 안동시내 일원에서는 공민왕 안동 70일 체류 역사 재현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이 행사는 안동시 용상동 공민왕 사당에서 열린 성황제를 시작으로 놋다리밟기와 어가행렬 재현, 그리고 사은행사 등 다양하게 펼쳐졌다.

행사에 맞춰 안동지역 내 신석동과 수동, 가송, 신남, 원천 등 6곳에 있는 공민왕 관련 사당에서는 왕의 추모제가 열리기도 했다.

이에 앞서 지난 2월8일 자정 무렵에 안동시 도산면 가송 가사리마을에서는 인근 올미재, 쏘두들 주민들이 수백 년 전부터 연례행사로 이어져 온 마을 동신제를 올리기도 했다.

청량산 축륭봉을 이은 연봉 아래 자리 잡은 이 마을의 동신제는 여느 마을 동신제와는 다르게 공민왕의 따님을 마을 수호신으로 받들어 모시고 있다.

이 마을 어귀 산자락에 자리한 부인당에 모셔진 공주는 인근 원천리의 왕모당과 신남리의 며느리당과 함께 왕의 가족들까지 신으로 모시고 600여 년이 넘게 섬기고 있다.

공민왕과 홍건적의 난

“공민왕은 이름이 전이고 몽골 이름은 백안첩목아(佰鞍貼木兒)이다. 충혜왕의 동생이고 충숙왕 17년에 태어났다. 성품이 엄격 중후하고 또한 자애로우며 어질어 백성의 인심을 많이 얻었으나 만년에 이르러서는 시기심이 많고 음란하여 화를 당하는 데에 이르렀다.”라고 고려사절요는 적고 있다.

그림과 글씨 등 예능 방면에 재능을 가지고 있었고 왕후인 노국대장를 끔찍이 사랑하는 등 감수성이 예민해서 유약해 보이기까지 한 공민왕은 즉위 초부터 원나라와 왜구에 시달리는 등 고려 말의 시대 상황마저 녹록하지 않아 원만한 국정을 수행하기 어려웠다. 즉위 8년째 되던 1359년 2월부터 침략의 조짐을 보이던 홍두적(홍건적)은 그해 11월 3천여 명이 압록강을 건너 노략질을 해 갔으나 변방을 지키던 지휘관은 이를 숨기고 보고마저 하지 않는다. 홍두적은 중국 원나라 말기에 허베이 성[河北省] 영평(永平)에서 한산동(韓山童)·유복통(劉福通) 등이 중심이 돼 일어난 한족(漢族) 반란군이다.

머리에 붉은 수건(紅巾)을 둘러 표시를 했으므로 홍건적 또는 홍두적·홍적이라고도 했다. 몽골민족이 세운 원나라는 중국 내지를 통치했으나 13세기 전반에 이르러 피지배 민족이었던 한족들이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홍건적은 당시 유행하던 비밀결사인 백련교(白蓮敎)를 업고, 우두머리가 미륵불을 자처하며 큰 세력으로 성장해 중국의 각지를 점령했다.

홍건적은 원나라와 벌인 전쟁의 물자를 구하기위해 1357년부터 1360년까지 여러 차례 2~3천 명의 소규모로 고려를 침범한다.

그러다 공민왕 즉위 10년(1361년) 10월에 10만 여명의 무리가 압록강을 건너 삭주로 침입해와 최영과 이자춘 등을 중심으로 고려군이 필사적으로 대항했으나 결국 밀리고 만다.

적들이 개경 인근까지 밀고 들어오자 다급해진 왕은 태후와 공주를 대동하고 남쪽으로 파천을 모색한다. 이 때 최영 장군이 통곡을 하며 왕이 조금만 더 머물면서 군사를 모집하고 종사를 지키자고 간청했으나 왕은 남쪽으로 파천을 결심하기에 이른다.

의병을 모집하겠다고 신하들이 백방으로 뛰어다녔으나 모집에 응한 이는 겨우 몇 명에 불과하고 적은 코앞까지 밀고 들어오는 상황이라 우선 피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얼마나 다급하게 피난이 이뤄졌던지 왕이 숭인문을 나서자 `늙고 어린 자들은 땅에 넘어지고, 자식을 버리고, 짓밟혀 깔린 자가 들판에 가득했으며, 우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고 고려사는 이 상황을 묘사했다. 이처럼 다급한 파천 길이라 공주마저 연을 버리고 말을 탔는데 차비가 탄 말은 병들고 약해 제대로 달리지 못하자 보는 이들이 모두 울었다. 왕의 일행은 이처럼 경황 없이 남행길을 재촉한다.

왕의 안동 도착

공민왕 일행이 수도를 버리고 떠난 뒤 홍두적들은 바로 경성을 함락시키고 소와 말을 죽여 그 가죽을 벗겨서 성을 만들고 물을 부어 얼리니 이 같은 전술을 겪어 보지 못한 고려군들은 감히 접근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홍두적들은 온갖 만행을 다 저지르는데 사람을 잡아 굽거나 임산부의 젖을 구워먹는 등 차마 입에도 담지 못할 끔찍한 일들을 저지르고 다녔다.

왕의 일행이 경기도 이천현에 이르렀을 때는 눈까지 내려 왕의 옷이 젖어 모닥불을 피워 말리는 궁색하기 그지없는 피난길로 이어진다.지금의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인 음죽현에 이르렀을 때 백성은 물론 관리마저 도망가 버리고 없어 먹을 양식마저 구하기 힘들어 관리 한 명이 어렵게 구해 온 쌀 두 말로 일행이 연명을 하는 등 어렵고 힘든 여정으로 문경새재를 넘고 예천을 거쳐 12월 임진일에 목적지로 잡았던 지금의 복주(안동)에 다다른다.

안동에 도착한 왕은 정병운을 총병관으로 삼고 임금의 죄를 뉘우치는 `애통교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공민왕의 이 같은 행동은 일부 충신들의 간언에 따른 것일 뿐 왕 스스로는 유흥을 즐겨 찾는 등 전란 중의 임금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을 서슴지 않았다.

안동에 도착한 며칠 뒤 왕은 영호루에 올라 한동안 경치를 바라보다가는 누에서 내려와 강에서 뱃놀이를 즐겼다. 이를 보기 위해 수많은 이들이 줄을 지어 늘어섰고 더러는 차마 이 모습을 보지 못해 돌아서서 탄식하기도 했다.

이런 모습의 왕이었지만 안동 지역 백성들은 언 강을 공주가 건너도록 사람의 등으로 놓아 주는 충성스런 모습으로 왕의 일행을 맞이해 이를 후세의 문화로 전해 오고 있기도 하다.

특별취재팀 : 정태원·고도현·이임태· 이용선

♠자문: 한양명(안동대 민속학과 교수), 권두현(안동축제관광조직위 사무처장, 안동대 출강)

♠사진자료제공: 사진작가 강병두·안동시청 문화예술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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