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람들이 생활했던 흔적들이 땅속에서 발견되지만, 당시 모습 그대로 남겨질 수는 없을 것이다. 유적에서 발견되는 식물 또한 옛것 그대로의 모습으로 고스란히 남아 있지 않다. 유적에 남겨진 식물의 흔적을 발굴하여, 그것의 성격과 의미를 살펴보려 한다면, 우선 현대인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될 수도 있다.가령 오늘 내가 섭취한 식물 먹거리는 어떤 형태로 흔적을 남기는 것들인지 생각해 보자. 나는 오늘 콩을 섞어 지은 밥과 미역국으로 식사를 했고, 후식으로 귤을 먹었다. 아몬드 한 줌을 간식으로 먹었고, 핸드드립으로 내린 커
유적에서 발굴된 유물에는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작은 세계’가 있다. 우리는 이 ‘작은 세계’를 통해 유물이 뭘로 만들어졌는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알 수 있고, 어디서 만들어졌는지도 추정할 수 있다. 이런 ‘작은 세계’는 보존과학이라는 분야를 통해 우리에게 새롭게 밝혀진다. 쪽샘 유적에서 발굴된 1400년 전 유리구슬에도 눈으로 보이지 않는 ‘작은 세계’가 있다.유리는 흔한 물질이다. 하지만 고대에는 유리가 권력자의 사치품이었다. 유리는 화려한 색상, 특유의 광택과 투명함을 띠며 다양한 형태로 만들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내구성
경주 쪽샘 지구 신라 고분유적은 신라 귀족들의 집단 묘역으로 알려져 있다. 이 유적은 2007년 3월부터 현재까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14년 이상의 짧지 않은 기간 동안 고대 왕국 신라의 역사를 탐구하려는 노력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그 노력들로 인해 수년 간의 조사로 700여 기가 넘는 많은 무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무덤 속에서는 부장품으로 사용된 다양한 종류의 신라시대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는 발굴자와 연구자들의 땀이 이뤄낸 성과물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유물은 온전한 모습으로 발굴되기도 하지만
쪽샘 고분 유적은 4~6세기 축조된 신라 왕경인들의 집단 무덤군이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2007년부터 쪽샘 유적에 대한 발굴을 추진하고 있다. 2009년 4월 우리나라 고고학계에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다. 쪽샘 유적 내 C-10호라고 부르는 무덤에서 거의 완벽한 형태의 말과 장수의 철제갑옷이 동시에 발굴된 것이다.1600년 전 신라시대 갑옷이 출토된 것만으로도 드문 일인데, 말과 장수의 두 갑옷이 거의 완벽한 형태로 발굴되었다는 것에 당시 학계나 관련연구자, 그리고 언론에서 주목했었다. 두 갑옷은 비늘 모양의 작은 쇠 조각(小札)
고대사회의 지배층은 권위를 드높이기 위해 신전을 비롯한 궁궐과 사원을 지었고 건물의 지붕은 기와를 덮어 마감하였다. 그리고 용마루의 양쪽 끝에는 장식기와인 치미(鴟尾)가 올려졌다. 기와는 방수성과 방화성, 그리고 방한성이나 내구성 등의 기능 외에도 목조건물의 경관을 돋보이게 하는 미관성과 길상과 벽사를 의미하는 상징성 등을 지니고 있다.용마루의 양쪽 끝에 하늘을 향해 높이 치솟아 있는 치미는 용마루의 미관을 강조하며 사악한 기운을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벽사(辟邪)적 역할을 하였다. 중심 건물에만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치미는 시
금속은 청동기시대·철기시대처럼 역사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언급될 만큼 고대부터 친숙하게 사용된 재료이다. 출토되는 금속유물들은 주로 금·은·동·철·납·주석 등의 재료를 적절하게 이용하여 만든 장식품이나 무기, 생활도구들이다.아주 오래전부터 고대인들이 만들어 사용한 이러한 물건들은 발굴조사를 통해 출토되어 유물이 되고, 관련 역사학자들이 이를 연구함으로써 당시의 금속 제작 기술 수준이나 문화의 발전 등을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경주를 예로 들어보면, 신라가 천년 동안 유지되면서 생산한 다양한 문화 유적지들이 즐비한 곳으로 발굴조사
장창곡 석조미륵여래삼존상(보물 제2071호)과 ‘삼국유사’ 탑상편 ‘생의사석미륵’조에 기록된 미륵불상은 동일한 불상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최근 이 상과 관련한 흥미로운 연구가 있었는데, 불상의 도상(미륵의좌상)과 석실(석굴) 봉안과 같은 특징을 고려했을 때 이 불상은 선관 수행(禪觀修行)의 목적으로 조성했다는 것이다. 승려의 수행법 중 하나인 선관은 특정한 대상을 관(觀)하여 수행하는 것이다. 선관은 몇 가지 수행단계를 거치지만, 결국 부처(미륵불)의 친견이 궁극적인 목적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남산 불적의 성격을 가장 극명하게
경주 남산은 최고봉의 이름 따 금오산, 고위산으로 부르기도 한다. 때로는 남산 앞에 ‘신라불교문화재의 보고’, ‘천년고도의 노천박물관’, ‘민중 신앙의 산’ 등의 다양한 수식어가 붙기도 한다. 계곡 곳곳에 산재한 다수의 불적(불상·석탑 등)은 남산이 이러한 별칭을 얻는데 중요한 매개체가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수식어 때문에 생긴 막연한 기대와 경외심은 오히려 남산의 역사적 실재를 알아가고 증명하는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남산이 가지는 역사적 가치는 무엇일까? 남산은 신라 당대 사람에게 어떤 장소였고, 어떤 연유로 그렇게 많은 불적
황룡사는 진흥왕 14년(553)에 공사를 시작해 30년(569)에 경역을 마련하고 1차 가람을 완료했다. 진흥왕 35년(574)에 약 5m 이르는 장육존상을 비롯해 금동삼존상을 조성했고, 진평왕 6년(584)에는 이 불상을 모셔두기 위한 금당을 새롭게 건립했다. 선덕여왕 12년(643)엔 자장스님의 건의로 황룡사에 구층목탑을 조성하고자 했다. 목탑을 조성하기 위해 백제 기술자 아비지를 초청하고, 이간 김용춘은 장인 200명을 인솔해 착공 3년만인 선덕여왕14년(645) 구층목탑을 완공했다. 구층목탑은 탑신부 약 65m, 상륜부 15
신라 왕경은 내외를 구분하는 외성(外城)이 없어 그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 신라 당대에는 자연 지형이나 환경 등이 그 구분을 짓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을 것이다. 아울러 사찰, 왕릉, 산성과 같은 국가적 중요시설 등도 그 경계로 이용한 듯하다. 신라 왕경의 사찰은 그 분포양상을 보았을 때 중고기 때에는 서천 주변, 6세기 중엽 월성 주변, 7세기 후반 낭산 일원과 토함산 북록, 8세기 중엽 형제산, 토함산 남록, 8세기 후반 이후에는 오늘날 경주시 외곽지역까지 단계적으로 확장되어 나갔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사찰의 분포양상과 입
경주 사천왕사(四天王寺)에 대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문헌기록에는 유독 신성스럽고 기이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삼국사기 권12 신라본기12 경명왕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3년(919년)에 사천왕사의 흙으로 만든 불상(塑像)이 들고 있던 활의 줄이 저절로 끊어지고, 벽화의 개가 소리를 냈는데 마치 짓는 것 같았다”.삼국유사 권2, 기이2, 문무왕법민(文武王法敏)에는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을 행하자, 갑작스런 풍랑이 일어 당나라군의 배가 모두 침몰하였다..” 이 구절은 어느 소설에 등장할 법한 말은 아니다. 바로 사천왕사와
불교는 고대 삼국이 공통으로 받아들인 종교이며, 신라시대 경주지역 최초의 사찰은 흥륜사(興輪寺)로 554년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흥륜사를 시작으로 경주지역에는 많은 사찰이 건립되는데 초기에는 주로 평지를 중심으로 세워지다 점차 구릉부로 입지가 변화되어가는 것으로 파악된다.그러나 오늘 이야기의 중심인 감은사는 통일신라시대 사찰이 대부분 평지나 구릉에 세워진 것과는 달리 바다에 인접해 창건된 흔치 않은 사찰이다.감은사(感恩寺)가 바다 근처에 위치한 것은 사찰의 창건이유와 관련된다. 동해안에 위치한 감은사는 문무왕이 창건을 시작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토함산에 자리한 불국사는 신라 경덕왕 10년(751년)에 시작해 혜공왕 10년(774년) 완성한 사찰이다. 불국사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김대성(金大城)이 현생의 부모를 위하여 지은 사찰이다. 그러나 김대성은 사찰의 완성은 보지 못하고 그 뒤에 국가에서 이어받아 완성하였다.불국사에 대한 발굴조사는 복원을 위한 자료를 확보하기 위해 최소한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불국사의 법등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고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석가탑과 다보탑, 조선후기에 지은 대웅전, 자하문, 범영루 등 다수의 건물이 남아
낭산의 북동쪽 산록에는 석탑 하나가 서 있다. 어딘가 모르게 이 탑이 익숙하고 친근하다면 아마도 불국사 대웅전 앞에서, 감은사지에서 혹은 경주 박물관의 정원에서 이와 닮은 탑을 이미 마주한 적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불국사 석가탑처럼 완벽하지도, 감은사지 석탑처럼 웅장하지도 않지만 단아한 모습으로 서 있는 이 탑은 놀랍게도 국보에 등록된 보물 중의 보물이다.1937년 이 탑이 위치한 낭산의 동쪽 기슭에서 ‘황복(皇福)’, ‘왕복(王福)’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편이 발견되었다. 이 기와편이 정식 조사를 통해 발견된 것은 아니지만, 이
분황사(芬皇寺)는 선덕여왕 3년(634년)에 창건되어 지금까지도 법등(法燈)을 이어온 사찰이며, 오랜기간 유지되었던 사찰인 만큼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통해서도 다양한 기록을 접할 수 있다. 특히 분황사는 신라 칠처가람(七處伽藍·흥륜사, 영흥사, 황룡사, 분황사, 영묘사, 사천왕사, 담엄사) 중 한 곳이기도 하다.신라는 불교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 타국의 침략에 대항하는 등 호국불교의 면모가 강하였다. 칠처가람 역시 신라 전 영토를 불국토로 여기는 것으로 그 가운데 분황사가 포함되었다는 점은 당시 신라 사회에 큰 영향력 있는
고려시대 시인 김극기는 시 ‘황룡사(皇龍寺)’에 ‘층층이 사다리 휘감아 하늘로 오르려하니 주변의 온갖 산수들 한눈에 들어오네...(생략)... 동도를 굽어보니 수많은 집들 벌집이나 개미구멍인양 더욱 아득하네’라고 표현하였다. 선덕여왕 때 세워진 황룡사 구층목탑을 의미할텐데 구층목탑을 올라갈수 있는 사다리가 있었는지 없었는지에 대한 논란은 뒤로하고 얼마나 높았으면 집이 벌집이나 개미구멍처럼 보였을까 하고 궁금해진다. 신라 경문왕 12년(872년)에 황룡사 목탑을 중수하면서 심초석 사리공 사리내함에 새긴 기록 찰주본기(刹柱本記)에는 ‘
5세기 신라는 도시 중심에 적석목곽분이라는 큰 무덤을 축조했다. 무덤의 주인공은 최상위 지배층인 마립간(王)과 권력자로 추정한다. 이 무덤에서는 금관과 금 허리띠, 귀걸이, 목걸이 등의 금제품이 다량 발굴되었으며, 각종 마구류와 토기가 출토되었다.신라는 가야를 비롯해 주변의 작은 소국을 병합하고, 새로운 영토를 개척한다. 경주지역의 대형고분에서 출토된 것과 유사한 금제공예품이 현재의 대구, 경산, 창녕 등에서 발굴되고, 경주 양식 토기가 인근 지역에서도 출토된 사실은 신라의 영향력이 주변지역까지 넓게 미친 것을 알려준다.신라는 국가
오늘날 해외여행이나 이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전근대시대에는 한 국가 안에서 자신이 사는 지역 이외에 다른 지역으로 가는 것은 특별한 일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국가의 통제와 불편한 교통수단 등을 들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나라에 오고가거나 심지어 정착하는 일까지 있었다.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로 장보고와 재당신라인들이었다. 이 글에서는 그들이 다른 나라로 건너간 이유와 시대적인 배경을 살펴보고자 한다.사람들의 이동 또는 이주는 흔한 일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고대 국가의 성립 과정을 자세하게 알 수는 없지만 외
신라 역사의 특징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 가운데 여왕의 출현은 고구려나 백제에서 볼 수 없다는 점에서 주목해볼만한 대상이다. 여왕과 관련하여 일부에서는 신라시대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논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오늘날의 관념으로 예전의 사실을 왜곡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조심할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는 신라시대에 여왕이 나타날 수 있었던 시대적인 배경을 살펴보고자 한다.널리 알고 있듯이 신라시대에 여왕은 모두 3명이 있었다. 선덕여왕, 진덕여왕, 진성여왕이 바로 그들이다. 여기서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은 각각 신라 27대와 28대 그
문무왕은 삼국통일을 이룩한 군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죽은 뒤에 얻었던 시호(諡號)는 문무(文武)인데 대부분 문이나 무 하나만 붙인다. 특히 이러한 시호는 나라를 새로 세우거나 그 기틀을 다진 사람에게 올린다는 점에서 특별한 칭호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칭호가 문무왕에게는 두 글자가 붙여졌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이 글에서는 7세기 무렵 당시 신라의 상황과 문무왕의 삶을 살펴보고, 그가 특별한 의미의 시호를 두 개나 얻을 수 있었던 이유를 알아보고자 한다.문무왕의 생전 이름은 법민(法敏)이고, 태종무열왕 김춘추(金春秋)의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