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이 발발한지 2주째로 접어드는 1950년 7월중순 북한 제2군단은 조기에 소백산맥을 넘어 아직도 대전과 청주지방에서 분전중인 국군 및 유엔군의 퇴로를 차단, 섬멸전을 전개할 기도하에 그들의 선봉인 제15사단을 속리산 동쪽의 깊은 계곡으로 투입해 상주~김천 축선으로 돌파구를 확대코자 중앙돌파를 계획했다. 이때 국군 제1군단은 이 지역의 적정이 불명해 군단 정찰대로 하여금 화북~화서면 간의 공백지대를 탐색중 14일 정오경에 동비령에 다다른 동 정찰대가 북괴의 첨병소대를 발견하고 이를 기습, 12명의 포로를 사로잡았다. 육군본부는 보은에서 함창으로 이동중인 제17연대를 이곳 화령장에서 정지시켜 정찰대와 함께 이 적을 현지에서 저지 격멸토록 명령했다. 매복 작전을 전개한 연대는 5일동안에 걸쳐서 상곡리
무방비 상태의 3·8선을 돌파한 북한군이 영덕지역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50년 7월초. 동해안을 따라 파죽지세로 남진하던 북한군 제5사단이 울진 부근에서 국군에 의해 그 기세가 저지되면서 잠시 멈추게 된다. 6월 29일 국군 제3사단 23연대는 울진에 도착한 후 북한군과 접전을 벌이면서 15일 정도 적의 진공을 지연시킨 후 평해를 거쳐 7월12일 영덕으로 철수, 영덕 부근에 연대 전투지휘소를 설치하고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고자 했다. 7월14일에는 먼저 설치돼 있던 제3사단 지휘소를 포항으로 옮긴 후 미8군 해·공군의 지원을 받아 영덕지구를 고수하기로 결정하고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북한군 제5군단장은 국군의 저항에 부딪혀 진격이 늦은 제5사단 지휘부를 질책하는 한편, 북한군 제12사단
영천전투는 6·25전쟁 초기 아군에게 불리한 전세를 극적으로 역전시켜 전쟁의 마지막 보루인 낙동강방어선에서 위기를 구한 구국의 일전이었다. 이 전투는 1950년 9월 2일부터 13일까지 국군 8사단이 북한군 2군단의 공격을 방어한 6·25전쟁의 일대 전환점이 된 전투였다. 한국군 8사단은 이 전투에서 북한군 15사단을 궤멸시키고 승기를 잡았다. 1950년 8월 말 북한군 2군단 15사단은 영천 동북 입암리에서 2개 연대를 증원받고 최종 공세를 준비했다. 이들의 목표는 영천을 점령한 다음 대구로 진출하는 것이었다. 국군 8사단은 보현산과 입암 남쪽 고지 일대에 방어진지를 편성한 후 이미 전초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영천은 신령ㆍ구산동ㆍ입암으로부터의 도로 교차점으로, 대구와 경주 방향으로의 도로망이
며칠전까지만 해도 프로야구 코리안시리즈로 수많은 사람들이 TV를 보거나 야구장을 찾아 열광했다. 투수의 공 하나, 타자의 스윙 하나에 웃고 울고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하루의 일상을 마무리하고 지인들과 소주를 한잔 하거나 운동 등 취미생활을 하면서 마음껏 가을의 정취를 만끽하고 있다. 그야말로 평화로운 일상이다. 하지만 이 평화로움 뒤에는 호국선열들의 엄청난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우리 모두 이 사실을 알고 있으나 진심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않은게 사실이다. 다만 그런일이 있었구나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언제까지 과거의 고통과 슬픔을 간직하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의 평화를 누리는 우리는 과거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생각해야 한다. 또 후손들에게 평화를 물려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