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서 시작된 구제역이 전국적으로 번져 학살당한 우공(牛公)만도 30만마리를 넘어섰다. 구제역이 처음 발견된 것은 안동시 와룡면의 한 마을에서 였다. 안동시 와룡면이라면 생각나는 어른이 있다. 안동교육대학 초대 교무과장으로 처음 시작된 안동교대의 기틀을 확고히 다지던 남재수 교수님이 생각난다. 우공처럼 머리가 크고 눈망울이 굵은 박력이 넘치던 남 교수님이었다. 필자는 그때 안동교대 첫 입학생으로 안동교대 학보 편집국장을 맡고 있었기에 교무과장을 맡고 계시던 남재수 교수님과는 필자가 버릇이 좀 머시기 하여 안타깝게 해드린 일도 더러 있어 지금도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남 교수님은 내가 교대를 졸업하던 해인 1967년 첫 시집 `오뉘`를 냈을때 내가 배운 교수님들 중 가장 기뻐하셨다는 유중선 교수님의
중·고 시절 제자 정진영양에게서 오랜만에 전화가 왔다. 한 달 후에 결혼을 하게 됐는데 나더러 주례를 서달란다. 내 나이 쉰이 가까운 40대 후반이니 주례를 사양 안해도 건방지다는 말은 안 들어도 될 것 같아 선뜻 승락을 했다. 제자 진영이 같이 착한 학생은 그때까지 교직경력 20년이었지만 찾아보기 힘들었다. 진영이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자매가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녔다. 진영이가 다니던 학교는 문경군 산북면 소재지 S중·고등학교 였다. 진영이가 사는 면소재 마을은 가구수가 100호도 못되는 한적한 시골마을이었다. 진영이네는 농촌에 살면서도 자기 땅이 한 평도 없었고 어머니가 마을 사람들의 한복 주문을 받아 생활을 꾸려 나갔다. 백 집도 안되는 작은마을에 1년에 한복 바느질 주문이 몇 건이나 들어오겠는가. 바
강소신문을 지향하는 경북매일신문에 내 칼럼이 경매 창간 18돌 축하(2008년 6월28일자)를 효시로 하여 올해 12월4일 현재 28개월 동안 내가 쓴 칼럼이 90편이 경매 애독자와 만났다. 90여회를 집필하는 동안 자료를 찾기 위하여 책을 펼쳐보거나 문장이 잘 안풀려 다시 고쳐쓴 적은 단 몇줄도 없었고 면발 뽑듯 1회로 끝냈다. 어떤 관심있는 독자들은 내 칼럼의 내용이 다양한 잡학의 전시장임을 보고 필자의 잡학실력에 압도된 이도 있고 날카로운 좌파비판을 더러 대하고 극우라고 나를 낙인찍는 이도 있겠지만 나는 우도 좌도 아닌 철저한 국가수호주의자일 뿐이다. `극우`란 말은 `빨갱이`란 말을 함부로 사용하지 말아야 하듯 `극우`란 말도 지극히 가려써야 한다. 극우란 나치 독일의 히틀러를 지칭하는 말이기 때
나는 내가 생각해도 죽었다 깨어나도 위인은 못되기에 세기적인 위인 이야기를 적어, 나의 부족함을 채우고 싶은 생각이 난다. 1971년 나는 문경중학교 역사 교사로, 중등학교 역사교사 2년차를 맞았다. 그 때 교무주임이던 R교사가 이율곡 선생을 `9도 장원`이라고 하는데 도대체 무슨 말이냐고 내게 물었다. 조선시대 행정구역은 한성부와 8도(八道)가 있는데 구도라니 어리둥절했다. 9도란 9도(九度), 곧 아홉회를 말하며 장원(將元)이란 과거수석합격을 뜻한다. 이율곡 선생은 소과(小科), 대과(大科), 중시(重試)의 세 과거시험에서 각각 1차 2차 3차 도합 9회에 걸펴 장원급제를 하여 조선시대 과거합격자로 최고기록을 수립했고, 율곡은 조선유일의 `9도(度) 장원랑(將元郞)`의 빛나는 새 역사를 창조했다. 조
우리나라 방송중 공익(公益)에 맞고, 방송의 제구실을 하는 곳이 EBS(교육방송)라고 평소 생각했다. 초·중·고학생을 대상으로 강의하는 강사중 몇 사람은 생뚱맞게 교육과 아무 관계도 없는 반국가적, 반사회적 돌출발언을 하여 얼굴을 찡그리게 할 때가 더러 있다. EBS 교육담당강사님들은, EBS는 대한민국방송이요, 인민공화국방송이 아님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불법적인 발언에 대해선 엄격하게 문책하면 되겠지만, 재판도 제 구실을 못할때가 많은게 우리 현실이다. EBS방송중 `한국기행`은 재미도 있고 참신한 기획이 돋보여, 본 방송만으로 직성이 안풀려 재방송에서 놓치지 않고 챙긴다. `한국기행`중 인상이 깊이 남는 곳은, 경북 예천과 울진편이다. 울진군편에서 2부 `왕피천 67.8㎞`와 4부 `가노 가노 언제 가
우리나라는 농업말고는 대(代)를 이어하는 세업(世業)이 없다. 일본에는 40대(代)를 이어하는 한 약국이 있단다. 비법이 40대를 이어왔으니 틀림없이 용한 약국이란 느낌이 든다. 다행히 우리나라에도 8대째 도자기를 빚어온 전통도예가문이 있어 신선한 충격을 준다. 한국 최초의 국가지정 중요문화재 105호 사기장 백산(白山) 김정옥(金正玉) 명장이 8대째 가업으로 전통도자기 청화백자를 빚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물론 농담이겠지만 필자에게 김정옥 사기장과 친분이 각별하니 좋은 작품 딱 1점만 얻어달란다. 도자기는 그냥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그릇이 되기까지 흙이 8단계를 거쳐야 한다. 도자기에는 도공의 얼과 숨결과 피땀이 스며있다. 초벌구이는 700도~8백도의 고열 속에서 6~7시간을 거쳐야 하고 재벌구이는
고등학교 졸업사진 값을 숙부님께 애소하여 받아내어 졸업사진은 사지 않고 백수사(白水社)에서 발행한 3권으로 된 `한국단편문학전집`을 과감하게 샀다. 사변즉후 출판사정이 나빠 책 같은 책을 볼 수 없었지만 백수사에서 낸 단편소설은 1작가 1편을 원칙으로 하여 작품을 엄선해 실었고 오자하 한 자도 없는 유사 이래 완벽한 전집이었다. 한국단편 전집엔 현진건, 김동인 선생 등 주요작가의 단편소설의 백미가 실려 있어 마음먹고 낸 문학양서였다. 단편소설 전집에는 여류소설가 강정애 여사의 중편소설 `지하촌`이 실려 있어 분량이 제법 되었지만 선천성 장애자인 칠성이의 비참한 운명에서 유복자인 내 처지가 겹쳐져 감동을 꽤나 받았다. 뒤에 알았지만 강경애 여사는 가마가 둘인 쌍가마로, 문학소녀였다. 십대후반에 야간의 양주동
어제 오늘, 10월15일 우리나라 3대 일간지는 황장엽씨 통일사회장과 칠레 광부 33명 전원구조보도로 신문 1면이 넘쳐난다. J일보는 `황장엽, 대전 현충원에 영면하다`라고 과감하게 타이틀을 뽑았다. 내가 알기는 황장엽씨가 영면한 것은 국립대전 현충원이 아니라 서울 논현동 안가에서 영면하고 국립대전 현충원에 안장됐다. 언론고시를 통과한 영재(?)가 `영면`과 `안장`구별도 제대로 못하니 걱정스럽다. 진보(?)의 선봉인 H신문은 황장엽씨 통일사회장 기사는 신문 어느면에도 단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평소 종북 일간지라는 걸 익히 알고 있었지만 오늘 보도자세를 보니 평소 필자의 관찰이 너무 확실하며 스스로 놀랄 뿐이다. D약보에는 조선시대에 수령과 관기의 호작질이 자주 대서특필되고 있다. 수령의 할일이 경국
가수 박상철씨는 `포기`란 있을 수 없고 자기에게 `포기`는 배추를 셀 때 쓰는 말뿐이라고 자신있게 말했다. 요즘 며칠 사이 사람들은 배추포기는 세는 일까지도 포기하게 됐다. 배추 한 포기값이 만 원 이상으로 껑충 뛰었기 때문이다. 자살을 할 것 없다. `자살을 거꾸로 하면 살자`가 된다는 기발한 이론을 개발한 행복전사 최윤희씨는 삶에 지쳐 자살을 할 수 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어쩌면 이 세상에 행복은 없는 게 아닐까. 다만 행복이 있다고 착각하고 분주하게 헛되게 찾아다닐 뿐이다. 털빠찐 폐계같이 된 푸른 잎이란 몇 개 보이지도 않는 소나무 분재를 안타까운 눈으로 내려다 본다. 송학도(松鶴圖)라는 제목을 보고 등굽은 소나무 위에 하얗게 늙은 학이 앉은 동양화를 상상할 수도 있겠지만 평범한 소나무 분재에 흰
스님을 보면 궁금한 것이 있다. “왜 스님께서 입산하여 스님이 되셨는가”가 아니라 `스님`이란 호칭의 유래가 도대체 뭐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문경시 산양면 위만리란 외진 마을에 있는 모 사찰의 주지스님을 보니 풍골이 언뜻보기에도 선풍도골(仙風道骨)이라 스님의 유래를 물어보았더니`스님`은 `승(僧)님`이 변하여 된 말이라고 명쾌하게 속인의 의문을 풀어주었다. 지금까지 여러분의 스님에게 `스님`의 뜻을 알아보았지만 “글쎄요”가 대부분의 답변이었다. 하기야 자신이 없는 일에는 모른다고 하는 것이 최적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몇해 전 일이라고 단순하게 기억하고 있지만 벌써 십년 가까이 됐을게다. 내가 일요일마다 즐겨보는 KBS1TV의 `전국노래자랑`의 이색적인 한 장면이 확실하게 떠오른다. 그 날은 경남
달밝은 가을이 되어 그런겔까? 국교시절의 친구들이 가끔 생각난다. 둥근 달, 자궁 같은 가을달을 보면 원초적인 인생의 고향, 어린날이 생각난다. 나는 당시 신설학교 점촌국민학교의 2회 졸업생이었는데 휴전 이듬해인 1954년 3월15일에 졸업식이 있었고 남생도 45명, 여생도 18명으로 졸업생이 고작 63명밖에 되지 않았다. 동기생 중 고향인 점촌동에 사는 사람은 지금 10명도 채 되지 않는다. 세상을 등진 학우들도 20명 전후다. 모교 교문을 떠난지 56년이 넘었으니 살아있는 동기생중엔 지금 만나도 서로 얼굴도 몰라볼 경우도 많으리라. 세상에 핵보다 더 무서운 것은 세월이다. 국민학교 동기들의 특징은 구제불능의 저능아(?)도 5% 정도 있지만, 동기중 20%는 어디에가도 충분히 우등생이 되고 남을 우수아
서울 동부터미날 인도에는 다리가 없다기 보다 하반신이 달아난 반토막 인생이 겨울엔 추위에 떨며, 여름엔 더위에 시달리며, 동전바구니 앞에 엎드려 목메게 `어메이징 그레이스(놀라운 은혜)`를 부르고 있다. 잘 움직일 수 없는 불구의 몸임에도 이른 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 하루종일 성가를 열창한다. 몸을 제대로 자기가 움직일 수 없음에도 보이지 않는 손이 그들의 하루를 지배하고 있다. 그런 불편한 몸임에도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고 이어가는 비결은 무엇일까? 끼니때가 되면 공급되는 짬뽕맛이 그들을 지탱해주는 것일까? 애절한 노래를 부르며 푼전을 구걸하고 있는 그들. 애절하게 부르는 노래는 녹음된 것이고 실제로는 입술시늉만 하는지도 모른다. 최루탄용 성가가 행인의 마음보다 앵벌이의 마음을 더 울려주는지도 모른다
가끔 문경시청에 들리면 시청광장 가장자리에 우뚝 선 당교사적비와 마주친다. 당교사적비는 점촌시 2대 시장 신의웅 시장님이 세웠다. 신의웅 시장님은 부임하는 임지마다 그 지역에 걸맞는 사실(史實)을 발굴하여 기념비나 기념탑을 조성하여 지역민의 애향심을 북돋아준 고마운 지방단체장이었다. 점촌시장으로 오시기전에 군위군수로 재직하면서 역사박물관을 세워 군위군민의 자존심을 세워주었다. 아다시피 군위 인각사는 `삼국유사`의 산실이기도 하다. 점촌시장으로 부임하신지 얼마 안되어 필자가 신 시장님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삼국유사에 실린 `당교`이야기를 들려 드리고 당교(되다리) 부근에 사적비를 세우는게 어떠시겠느냐고 화두를 꺼냈다. 곧 바로 삼국유사에 실린 `당교`역사를 복사해 드렸다. 신 시장님은 필자의 건의를 받
사람은 품위있는 말을 써야 존경을 받는데 전직 중등교장이 겨우 `×주고 뺨맞기`란 말을 예사로 쓰다니, 야하다는 비판을 감수하고 `이런 제목`의 글을 적는다. 우리집엔 23년 묵은 붉은 귀 거북이 있다. H회사 연구원으로 있는 29세의 막내 아들이 초등학교 1학년때 제 엄마와 같이 오일장에 가서, 어미를 졸라 사왔다. 거북등판이 새파랗지만 크기는 1백원짜리 동전정도 크기였다. 어머니가 돌보다가 돌아가시고 나서 그뒤 아 내가 돌보다가 몇년전 내가 정년퇴임을 하고 나서는 내가 거북이 아범이 되었다. 개를 키우면 주인과 눈만 마주쳐도 꼬리를 흔들고 반가움을 나타내지만 거북은 집에서 4반세기를 키워도 도무지 주인을 알아보지 못한다. 몇해전 S방송의 `세상에 이런 일이…` 프로에는 주인 아줌마의 말을 척척 알아듣
이야기거리를 찾다보니 타임머신이 50년전인 1960년으로 돌아간다. 논산 육군 제2훈련소에 입소할 무렵, 나는 오두막집 한 칸도 못가진 빈털터리였다. 물론 수중에 가진 돈도 없었다. 그런데 연병장에서 당시 거금(?) 550만원을 주웠다. `이코!내 떡이다`하고 주운 돈을 가져도 나무랄 사람도 없지만 못살아도 올곧게 살아온 탓에 전혀 물욕이 동하지 않아 주운 돈을 주인을 어렵게 찾아내어 돌려주었다. 돈을 돌려 받은 훈련병은 거금을 잃고 그야말로 하늘이 노래졌는데 돈을 다시 찾게 되어 희망을 잃지 않게 되었다며 역시 신앙을 가진 사람이 다르다며 나에게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세상은 심은대로 거둔다지만 꼭 그런것 같지 않았다. 훈련병시절을 거쳐 부대배치를 받고 34개월을 복무하고 나서 제대군용 열차를 타기 직전에
올 여름은 국민들과 가까웠던 화제의 인물 여러명이 이 세상에 미련없이 은퇴공연을 했다. 백남봉(박두식)은 6·25 전쟁고아 출신으로 원맨쇼의 달인이요, 주정뱅이 흉내 연기는 천하일품이었다. 전북 진안고아원에서 보육교사였던 전덕기 여류시인조차 백남봉을 지척(서울)에 두고 모르고 지냈다. 왕년의 평범한 고아원생이 그렇게 튀는 인물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단다. 코미디언 백남봉달인을 같은 실내에서 가까이 볼 수 있었던 것은 2002년 10월, 전통도예의 최고달인 백산 김정옥 사기장의 진갑 축하연 자리였다. 나는 백산 선생을 기리는 축사를 읽었고 백남봉씨도 내 시낭독을 경청했다. 재치있는 사회, 게임진행을 보고 코미디의 국수(國手) 백남봉을 감명깊게 응시 주목했다. 그 뒤에도 백남봉씨와 우연히 몇 차례 만날 수
제대로 된 시를 쓰고 싶은 시인은 술독에 빠져 지내는 삶보다 낯선 땅을 자주 밟는 발바닥 단련이 더 다부지고 튼실한 시를 짓는 길이란 확신이 든다. 나는 여행을 즐기는 편인데 육지여행보다 섬답사에 깊은 관심을 쏟는다. 소년시절부터 동경하던 섬이 한강하구의 강화도였다. 노산 이은상 선생님이 지은 `노산문선`에서 강화도 기행문을 읽고 나도 몰래 강화도에 빠져들었지만 정작 강화도를 처음 밟게 된 것은 내 나이 30대 초반이던 1970년대 초에 강화행 버스에 올랐다. 온수리의 삼랑성, 전등사를 맨 먼저 찾았고 그때 내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뒤로 강화도는 십여회나 드나들었다. 강화도는 면적이 293k㎡되는 우리나라에서 다섯번째 큰 섬이기도 하지만 섬안에는 6,7개를 헤아리는 넓은 평야가 있어 큰 감동을
글감을 찾아 눈을 두리번 거리던 차에 TV자막 뉴스에서 빅뉴스(?)를 찾아냈다. 서울 청량리 집창촌에서 30대 매춘녀가 고객(?)에게 살해당했단다. 열차시간에 맞추기 위해 서울시립대학에서 택시를 타고 청량리역을 향했는데 택시기사가 지름길로 달려 가느라고 가다 말로만 듣던 588 집창촌을 스쳤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10분짜리 신부가 입구에서 모의신랑감을 기다리고 있다. 여자 연예인 뺨치게 몸매좋고 얼굴 예쁜 팔팔한 신부감이 바람난 서방(?)을 기다리고 있다. 저 몸매 저 용모에 연예인이 된다면 연예계 판도에 큰 지각변동이 날 법 하다. 감상적인 사회주의자는 매춘은 생활전선의 벼랑에 선 여성의 마지막 선택한 카드로 알기 일쑤지만 반드시 그런건 아닌 모양이다. 매춘여성에게 설문조사를 한 결과 6할은 생활
지금은 만나뵐 수 없는 전설이 되어버린 천재시인 노산 이은상 선생님과 초정 김상옥 선생님이 생전에 내게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노산 선생님은 시는 글을 짓는 게 아니라 새로운 말을 짓는 것이라고 깨우쳐 주셨다. 초정 선생님은 시인은 `말꼽냥이`라고 하셨다. 수전노가 돈을 지독하게 아끼듯이 시인은 시를 지을때 말을 최대한 아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사반세기 전 안동문인협회가 문예창작 강좌를 마련했는데 점촌의 시인, 필자를 일일 강사로 초청했다. 문단에 오른지 20년 만에 문학 특강 강사로 초대받아 내심 기뻤다. 강좌 시작 한 시간 전에 안동문화회관에 도착하니 참관인들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안동시는 문학수준이 점촌보다는 게임도 안되게 높은 것 같았다. 문경문인협회 제1회 문학강연회가 19
이틀 전 밤 꿈에 잠깐 어머님이 나타나셨다. 어머니를 여읜 지 벌써 9년이 넘었지만 꿈에 나마 뵐 수 있는 것이 한 해 한 번 정도가 될까 말까다. 그저께 밤에 어머니 꿈을 꾸고 나서 그전에 생각해 두었던 `어머니 생각`을 집필하게 되었다. 올해는 6·25 60돌이요,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늦가을에 읽었던 월간잡지 `소년세계` 11월호에 실렸던 동시 `어머니 생각`(송구화 지음)을 읽은 지 58돌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잠깐 눈앞을 스쳐간 동시 `어머니 생각`이 너무 좋아 40년 세월을 두고 월간 `소년세계` 게재본을 찾았지만 그 책은 이 땅 어디에도 없었다. 심지어 국립중앙도서관-한국의 중심 국립도서관의 잡지코너를 샅샅이 뒤져봤지만 내가 찾던 `소년세계`는 끝내 찾아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