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7년이나 지났다. 하루는 더뎌도 한 해는 잘도 흘러간다. 2009년에서 2010년으로 넘어가던 그 해 겨울, 울주군 천전리와 대곡리에 있는 암각화를 보기 위해 몇 번이고 내려가 며칠씩을 묵고 돌아왔다. 천전리 암각화에는 주로 석기 혹은 청동기 시대의 것으로 여겨지는 추상적인 문양과 신라시대의 것으로 여겨지는 그림과 글자가 새겨져 있다. 법흥왕의 동생과 그 부인이 새긴 것으로 추정되는 명문(銘文)이 적혀 있어 서석(書石)이라고도 부른다. 대곡리에는 거북이가 엎드린 듯한 모양을 한 바위라는 뜻의 반구대가 있다. 여기에는 주로 고래, 사람, 소, 호랑이 같은 동물을 그려놓아서 반구대 암각화라고 부른다. 대곡리의 반구대 암각화는 댐이 생기면서 물에 잠기게 되었다. 겨울에는 물이 적어 잠기진 않지만
우리 집 강아지 `열무`는 이해할 수 없는 일에 오래 고민하지 않는다. 전화기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오면 열무는 전화기를 향해 짖지 않는다. 곧장 현관으로 달려가 꼬리를 흔들며 문이 열리길 기다린다. 아무리 기다려도 엄마가 오지 않으면 몇 번 고개를 갸웃거리다 털레털레 내 옆으로 돌아와 털썩 소리가 나도록 누워버린다. 열무는 엄마의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흘러나온다는 걸 도저히 이해할 수 없나 보다. 아마 열무는 밖에 나갔던 엄마가 돌아왔고, 그 목소리는 현관에서 나는 소리가 분명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 모르긴 몰라도 열무는 `생각`이라는 것을 하고, 비록 자기 방식이긴 하지만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논리적으로 행동하려고 한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현관에 엄마가 없는데, 엄마의 목소리는 어
“할아버지 집이 멀어서 니리 온다꼬 지엽재?” 조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할아버지를 바라봅니다. 할아버지는 한 번 더 똑같이 말하지만, 서울에 사는 조카가 이 말을 알아들을 리 만무합니다. 저는 “태호야, 너무 멀어서 내려오느라 지겨웠지?”라고 번역해줍니다. 조카는 그제야 알겠다는 듯 “아니요”합니다. 평소에 3시간 조금 넘게 걸리는 거리인데 5시간이 넘게 걸렸습니다. 태호는 동생 소현이와 노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겠지만 정작 지겨운 것은 형과 형수였던 것 같습니다. `지겹다`의 어원은 `직엽다`로 여겨집니다. 그랬던 이 단어는 두 가지 형태로 분화하였을 것인데, 먼저 `ㄱ`을 이어쓰기 하면서 `지겹다`가 되었고, 이것이 표준어로 정착한 듯합니다. 이와 달리 경상도 사투리는 (아니 정확히 제가
혹시 여러분은, 1936년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이라는 소설이 처음 발표되었을 때 그 제목이 `모밀꽃 필 무렵`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는지? 당시에는 `메밀`을 `모밀`로도 불렀는데 한글맞춤법 원칙이 바뀌면서 `메밀`만을 인정하기로 했다. 이후 제6차 교육과정(1996년)에 따라 국정고등교과서 국어(상)에 실리면서 `메밀꽃 필 무렵`은 이 소설의 제목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 언어도 변한다. 원래 `모밀`이었던 것이 `메밀`로 바뀌었으니 작품 속의 단어들 역시도 그러했을 것이다. 그럼 실제로 어떻게 바뀌었을까? “조 선달 편을 바라는 보았으나 물론 미안해서가 아니라(아니나) 달빛에 감동하여(야)서였다. 이즈러는졌(ㅈㅓㅆ)으나 보름을 가제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흐붓이] 흘
한 해가 시작되면 으레 계획을 세우게 된다. 물론 그 계획은 어긋나거나 지키지 못하는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매우 느슨하고 모호하게 계획을 세우게 되는 것 같다. 정유년에 내가 세운 계획은 여행, 글쓰기, 몸에 관한 것들이다. 여행계획은 이렇다. 알래스카 여행, 동유럽 여행, 그리고 국내의 더 많은 곳 다니기. 이런 것들은 돈과 시간이 있으면 되는 것이니 크게 어렵지는 않겠다. 그리고 글쓰기 계획은 논문 쓰기, 예전부터 구상하고 있던 책 출판하기, 지면을 좀 더 넓혀 다양한 글쓰기다. 덧붙여 더 많은 강의를 했으면 좋겠고, 삶도 조금 여유로워지면 좋겠다. 이런 것은 지금 상태에서 조금 더 노력을 하면 될 테니까 크게 어려울 것 같지는 않다. 정말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주로 내
□ 2003년 1월 1일, 감포 오징어잡이 배 새해 첫날에는 무엇들 하셨는지? 최근 몇 년 동안 새해랍시고 특별히 뭘 한 것이 없다. 바쁜 일상 속으로 새해가 불쑥 끼어드는 느낌이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도 전날과 다르지 않았다. 새해 첫날 역시 전날과 다르지 않았고, 그 다음 날도 전날과 다르지 않았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86년에서 87년으로 넘어갈 때 짠하는 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하고 나도 거기 맞춰 떡하니 한 살을 더 먹는다는 걸 확신할 수도 있었다. 일기에 1987이라고 써야 할 것을 버릇처럼 1986이라고 쓰고, 지우개로 그 숫자를 지울 때면 1년을 통째로 지워버리는 느낌이 들어 다시는 틀리지 않아야지라고 다짐했다. 해가 바뀐 뒤 한동안은 그
`풍경`이라는 말이 헷갈렸다. 풍경은 `경치`(風景)라는 뜻도 있지만 `처마 끝에 다는 작은 종`(風磬)이라는 뜻도 있다. 풍경(風景)이 바람이 만드는 경치라면 풍경(風磬)은 바람이 만드는 소리다. 산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절에서 풍경(風磬)은 그윽하게 울려, 그 소리가 절 전체로 퍼지면 하나의 풍경(風景)이 된다. 그리하여 풍경(風磬)과 풍경(風景)의 경계는 모호해진다. 風磬과 風景의 경계가 허물어지기 시작한 것은 이은상이 작사하고 홍난파가 작곡을 한 “성불사의 밤”이라는 가곡을 알게 된 뒤부터다. 성불사 깊은 밤에 그윽한 풍경 소리 주승은 잠이 들고 객이 홀로 듣는구나 저 손아, 마저 잠들어 혼자 울게 하여라. 뎅그렁 울릴 제면 더 울릴까 맘 졸이고 끊일 젠 또
역 광장에는 시계탑이 있었다. 시계가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서로가 가지고 있는 시계의 시간을 믿을 수 없었다. 요즘처럼 휴대폰이 알아서 표준시간을 맞춰주는 시대가 아니었으니 기차와 같이 시간을 꼭 지켜야할 때에는 시계탑 아래에서 만나는 것이 가장 좋았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많은 장소에서 서로를 만나기 위해서라면 더욱 더 시계탑이어야 했다. 고층건물이 없었던 시대에 사람들의 눈에 가장 잘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저렇게 높은 것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무려 시계 `탑`이지 않는가! 그러나 역 광장의 중심을 차지했던 시계탑은 이제 한 구석으로 물러났다. 과거의 시계탑이 볼품 없는 모양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기능에만 충실했다면, 오른쪽의 시계탑은 조형성을 더 중시하고 있다. 사람들은
63빌딩 아래에서는 63빌딩의 크기를 알 수 없었다. 올림픽도로에서 그 규모를 실감할 수 있었다. 서울 사람들은 저렇게 크고 웅장한 것을 매일 보니까 간이 큰가 보다, 라고 생각했다. 며칠 전엔 처음으로 유럽엘 다녀왔다. 루브르 박물관에 들어갔을 때는 가이드를 따라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밖으로 나와 박물관의 벽면을 따라 차로 한참을 달린 후에야 그 크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멀리에서만 크기를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에펠탑도 개선문도 그랬다. 큰 것들은 너무 커서 막상 그 곁에서는 규모를 알 수 없다. 그런가하면 떨어져 있을 때 몸서리치도록 소중해지는 것들도 있다. 9일 가량의 여행 동안 나는 몹쓸 만큼 큰 것들을 보았고, 터무니없이 소중한 것이 나에게 있다는 것도 알았다. 지금 내 마음은 한국도
△하나, 눈 오는 날은 짐승이고 싶어라 우리 동네는 해발이 600m가 넘는다. 동네 우측으로는 삼봉산(1천254m)이 있고, 좌측으로는 갈미봉(1천210m)이 있고 정면으로는 신풍령(910m)이 있어서 구름이 모여들기만 하면 어느 곳으로도 빠져나가지 못한다. 그렇게 구름이 몰려드는 날, 아침은 습기에 젖고, 동네 사람들의 몸도 젖어 누구하나 큰 소리를 내는 법이 없었다. 나는 아침이 오는지도 모른 채 늦잠을 잤다. 눈은 한 번 오기만 하면 쉴 새 없이 쏟아져, 버스는 그 눈 속에서 길을 잃기 일쑤였다. 그렇게 눈 오는 아침은 몸이 먼저 알아서 이불 속에서 꾸물거리며 두껍고 게으른 솜이불에 눌려 일어날 수가 없었노라고 내가 내게 핑계를 대었다. 그러는 사이 나무에는 희고 두터운 눈이 쌓여 쩍쩍 가
1979년 12월 31일 희자매가`실버들`로 MBC에서 십대가수상을 받을 때, 성우가 그네들의 좌우명이 (무슨 새마을 운동이라도 되는 듯) “언제나 최선을 다하자”라는 것을 낯도 안 붉히고 잘도 말했다. `노오력`(노력보다 더 큰 노력을 하라는 말)과 `열정페이`(열정을 빌미로 한 저임금 노동을 이름)가 유일한 가치였던 시대, 정태춘은`촛불`로 신인가수상을 받았다. 성우의 짧은 설명과 함께 노래가 시작되고, 정태춘은 머쓱함을 숨기기 위해 심취한 것으로 가장하여 노래 속으로 숨어버린다. 노래가 마지막에 이르면 돌연 여자가수들이 출현하여 그네들의 팔뚝만한 초를 들고 트롯풍으로 몸을 흔든다. 그 몸짓이 이 노래의 가사와 얼마나 어울리지 않을지 상상해보시라. 소리 없이 어둠이 내리고 길손
이 예민한 상황에 한가한 소리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영화감독 홍상수의 이혼조정 신청이 이슈가 되고 있나보다. 중년의 감독이 낯선 여자를 만나고, 그것을 사랑이라고 믿으려고 애쓰는 내용의 영화를 무던히도 찍더니, 이제 홍상수는 영화가 아니라 실제로 그런 삶을 살려고 하나보다. 그를 비난할 생각은 없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문제니까. 홍상수의 영화는 실제로 그런지 아니면 느낌인지는 모르겠지만, 거개가 가을에서 겨울로 들어서는 문턱에 있는 느낌이다. 홍상수의 영화는, 이십 대에 내가 느꼈던 낯설면서 낯익은 정체모를 느낌을 떠올리게 한다. 어쩌면 20대 전체가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는 것도 공부도 연애도 뜻대로 되지 않아 심란한 마음을 억누르고 집 앞 카페를 찾았던 그 날, 사람이 다니는 길 쪽의 넓은
시청을 지나가는 버스인데, 시청엘 가려면 지하철을 타라한다. 어쩔 수 없이 서울역에 내렸다. 지하철은 발 디딜 틈도 없이 빡빡하다. 지하철은 배가 터질 듯 사람을 태우고, 겨우 한 정거장을 지나쳐 배가 홀쭉해진다. 시청역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가는데만 10분이 넘게 걸린다. 두 시간 전에 서울역에 도착한다고 전화를 주신 부모님은 연락두절이다. 농민회 분들과 행진 중이려나? 사람들과 함께 떠밀리고 있다. 정말 이렇게 많은 인파라니, 사람의 파도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다. 나는 분명 흐르고 있다. 평소 같으면 아무리 천천히 가도 10분이면 충분할 거리를 한 시간을 넘게 걷고 있다. 핸드폰은 울리긴 하지만 상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참 이런 일이 다 있다. 2016년 11월 12일. 하야시키기
학생들에게 글쓰기 강의를 시작할 때면, 어떤 글을 써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각오로 써야 하는지를 말해주기 위해서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다. 정작 나는 그렇게 못 쓰지만, 학생들이 나 대신으로라도 이런 글을 써주길 바라면서 말이다. 그 이야기는 우주의 어둠으로부터 시작한다. 우주에는 숱한 별들이 존재한다. 거기에는 무수히 많은 은하가 존재하며, 또 태양과 같은 행성이 은하 속에 더 많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니까 우주엔 태양과 같이 빛을 뿜어내는 별들이 무수히 많다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그 빛들에 의해 밤도 낮처럼 환해야 한다. 그런데 왜 밤하늘은 어두운 것일까? 이 문제는 1820년대에 활동했던 독일인 물리학자 올버스 혹은 올베르스(Heinrich Wilhelm Olbers)에 의해 제기되었다
한 여자 때문에 나라가 난리다. 아니 둘? 그것도 아니면 셋? 미국의 대선주자이자 막말의 대가인 트럼프가 “여자 대통령의 끝을 보려면 한국 대통령을 보라”고 일갈했다는 루머까지 떠돌았다. 여성 비하나 일삼는 인간에게 이런 말을 들으려니 죽을 맛이다. 우리나라 대통령이 트럼프까지 당선시킬 기세라며 극보수 단체 사이트에서도 비아냥거린다. 주말에는 전국적으로 5만명 이상이 참여하는 대규모 촛불집회가 있었다. 비록 가진 못했지만, 여러 보도와 사진을 통해 그 현장이 어땠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2008년 `광우병 촛불 시위` 때도 그랬다. 광화문은 거대한 군중의 가장행렬장이었다. 유모차를 몰고 나온 엄마부대, “2MB USB를 찾습니다”와 같은 피켓, 그리고 제대로 놀란 정부가 보여준 명박산성까지…. 이
`정확한 문장쓰기` 수업에서 쓰려고 찍어두었다. 이 사진을 학생들에게 보여주며 나는,`쓴 자`의 교육수준과 그 이기심에 대해 이야기했고, 문장 속에는 너희의 치부와 너희의 인격이 드러날 수 있으니 조심하라, 고 이빨을 까며 젠체했다. 그런데 사진을 찍었던 곳을 다시 지나며 저 글을 `쓴 이`가 아닌 나의 성급함과 무지를 반성하게 되었다. 나의 성급함과 무지는 오독에서 비롯한다. 나는 `흰 선 밑으로 내 차를 댈 테다`라고 읽었다. 정확한 문장을 사용하지 않는 자는 무식할 뿐만 아니라 이기심 많은 인간이라는 나의 선입견과 독선이 이러한 오독을 낳은 것이리라. 사진에는 잘 나와 있지 않으나, `힌 선 밑`은 빌라의 현관이다. 흰 선 아래에 차를 대면 입주자들이 불편하기 때문에 이 흰 선 위로 차를 주차해
오늘은 광화문에서 영화를 보았다. 가을은 거리에 즐비하다. 바스러지는 가을을 밟으며 쌀쌀하진 거리를 걷는다. `해머링 맨 시민광장`으로 들어선다. 이곳은 2008년 8월 `도시를 작품으로 만드는 데 도전하는 서울시 도시갤러리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조성되었다. 시민광장에는 브롭스키가 만든 22m 높이의 `해머링 맨`과 네덜란드 건축그룹 매카누에 만들어진 `강 같은 길`로 구성되어 있다. 서울시는 이 광장의 취지가 “시민들이 도심에서 편히 쉬면서 해머링 맨과 주변 도시경관을 향유”하는 것에 있다고 설명하고 있지만, 나는 이곳에서 어떤 기갈과 어떤 위안을 느낀다.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 `해머링 맨`: 가 닿을 수 없음 `해머링 맨`은 높이 22m에 50t의 무게를 자랑하는 압도적인 조
사진 그까이 것 대충 셔터만 퍽퍽 누르면 되지, 라고 생각했다. 참 막돼먹은 생각이다. 사진이라는 것이 참 오묘해서 집으로 돌아온 뒤에서야 아, 이렇게도 한 번 찍어볼 걸, 하고 후회하게 된다. 이 후회의 뒤늦음을 좀체 앞지를 수 없다. 세상에 쉬운 것이 하나도 없다는 걸 절로 느끼게 된다. 사진이 쉬울 것이라는 생각 자체가 문제였다. 사진은 태동부터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최초의 사진`과 `인간의 형상이 찍힌 최초의 사진`에 대해서 말이다. △최초의 사진 1827년 니에프스(Joseph-Nicephore Niepce)는 최초의 사진을 찍었다. 무려 8시간에 걸쳐 찍었지만, 현상된 것은 작업실 창문에서 내다보이는 비둘기 집과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벽과 바
황순원의`소나기`의 중심인물은 이름이 없다. 소년, 소녀로 불린다. 황순원은 이들에게 이름을 주지 않은 것처럼 이들을 휘감고 있는 것은 감정 상태도 명명하지 않았다. 이 작품이 수록된 교과서는 이것을 “사랑”이라 가르친다. 정말 그런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소녀가 징검다리에서 소년을 기다렸다고 해서, 감히 다가오지도 못하는 소년에게 `바보`라고 불렀다고 해서, 그런 소녀를 만날 수 있길 소년이 바랐다고 해서 소년과 소녀가 사랑하는 걸까? 둘이 함께 산에 올랐다고 해서, 소년이 소녀를 위해 꽃을 꺾어왔다고 해서, 소나기를 피해 수숫단 속에서 비를 그었다고 해서, 소년이 소녀를 업고 도랑을 건넜다고 해서, 소녀가 죽기 전 검붉은 물이 든 스웨터를 입혀서 묻어달라고 했다고 해서, 소녀와 소년이 사랑하는
아직 가을이 가깝지도 않은데 벌써 멜랑콜리하다. 멜랑콜리! 우울로 번역되는 이 증상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울은 일반적인 슬픔과 달리 이유가 없다. 슬픔에 특별한 이유가 있다면야 그 이유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면 된다. 하지만 이유 없는 슬픔은 극복할 방법이 도무지 없다. 우울은 갑자기 찾아온다. 삶을 향해 열려 있던 마음이 죽음 쪽으로 불현듯 돌아서는 상태, 그래서 멜랑콜리는 위험하다. 이런 기괴한 기분이 들 때 근거도 없는 슬픔이 엄습할 때 여러분은 무얼 하시는지? 나는 달리기를 한다. 아직은 심각한 상태가 아니어서 조금은 이 우울을 느껴야겠다. 그래서 오늘은 권여선의 `봄밤`을 다시 읽는다. 이 소설은 영경과 수환의 사랑이야기다. 이 중년의 연인은 둘 다,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