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없던 시절 피천득 선생의 글 ‘인연’을 읽다가 아쉬움에 잠기곤 했다. 영화 ‘쉘부르의 우산’에 나온다는 초록색이 고왔던 우산의 주인 아사코. 왜 선생은 아사코와 작별해야 했을까. 아사코와 이뤄진 세 번의 만남은 각기 다른 색깔과 향기로 다가온다. 소녀에서 처녀로 다시 가정주부로 선생을 만난 아사코. 그들의 마지막은 너무도 적막했다.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고 인사만 해대는 아사코의 비애 같은 것이 여과 없이 전해지는 것이다. 차라리 마지막 만남은 없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선생은 회고한다. 왜 선생은 굳이 아사코를 마지막까지 만나
윤동주의 ‘팔복(八福)’을 읽노라면 고개가 갸웃거려진다.‘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가 여덟 번 되풀이되다가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로 끝나기 때문이다. 윤동주의 시편 곳곳에서 드러나는 부정에서 긍정으로 나아가려는 지향이 ‘팔복’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기독교도였던 시인이 ‘팔복’의 원천을 ‘마태복음’ 5장에서 찾았을 것은 자명하다.‘반야심경 마음공부’에서 알게 된 사실은 불교에서 여덟 가지 고통, ‘팔고’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생로병사의 네 가지 고통에 다른 네 가지가 더 있다는 얘기다. 애별리고(愛
20년 만에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완전히 철수한다고 한다. 요즘 외신은 아프가니스탄 관련 기사로 도배되다시피 하고 있다. 우리와는 특별한 관련이 없어 보이는 나라 아프가니스탄. 나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온 사람과 잠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쾰른에서 어학 과정을 다닐 때 도이칠란트 남성과 혼인한 아프가니스탄 출신 중년 여성과 ‘사전’에 관해 이야기한 일이 있다. 아프가니스탄에는 독일어 사전이 없어서 답답하고 힘들다고 그녀는 말했다.멀고 낯선 나라에서 온 사람이구나, 하는 기억만 아직도 남아있다. 외국인들을 가장 많이 만나서 이야기
밤새 울어대는 벌레와 지렁이들의 합창으로 선잠에서 깨어난다. 처서 전후부터 울기 시작하는 지렁이의 맑은 음색도 좋지만, 가을 초입을 알리는 풀벌레 울음소리도 그에 못지않다. 어제 아침나절 서울의 후텁지근하고 끈적끈적한 새벽녘의 기억이 잠시 상념에 잠기게 한다. 불과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이토록 다른 세상과 만난다는 일이 낯설다. 그것도 같은 나라 같은 하늘 아래서 24시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하루라는 시간이 제법 길구나, 하는 생각이 찾아온다. 누구나 경험하지만, 시간에는 상대성이 개입한다. 상황에 따라서 길게도 짧게도 느껴지는
누구나 살면서 크고 작은 소원 한두 가지는 있는 법. 도선사 명부전 오르는 길에 커다란 바위가 있다. 거기 올려진 무수한 작은 돌멩이를 보자니 마음이 짠하다. 다른 사람들이 보든 말든 간절한 소원을 담아 올려놓은 돌멩이들. 염천의 작열(炸裂)하는 태양 아래 온몸을 드러낸 채 천둥벌거숭이로 소원을 갈구하는 인간군상의 간절함이 느껴지는 것이다. 사자처럼 용감하고 바람처럼 자유로웠으며 연꽃처럼 깨끗했던 청춘의 날들에 내 소원은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이었다. 신혼여행 길에서 맞은 동해 일출을 보면서 나는 소원을 간절하게 희구했다. 한 주에
삼복더위가 예사롭지 않다. 곳곳에서 기후변화로 인한 재난의 징후가 감지된다. 그것도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지구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게 미심쩍기 그지없다. 그런 와중에 캘리포니아 대학의 재러드 다이아몬드 교수가 언론 인터뷰에서 “우리 문명은 30년 남았다”고 폭탄선언을 하고 나니 불안이 증폭된다. 그는 기후변화와 함께 핵무기, 자원고갈, 불평등을 인류문명 종말의 4대 이유라고 단언한다.2050년에 인류는 다이아몬드의 공언(公言)처럼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할 것인가! 하지만 나는 모친상을 치르면서 마주친 두 여자 이야
사노라면 문득 옛일을 돌이키거나 그리워하는 경우가 있다. 연구실을 정리하다가 아주 오래전에 쓴 논문을 찾았기로 그런 정황에 빠져든다. 1920년대 소련 희곡을 공부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 유학을 떠난 두 번째 해에 쾰른에서 사흘 연속 알바를 하게 되었다. 견본시장에서 화재와 도둑을 방지하는 야경꾼 노릇을 한 것이다.사흘 일해서 당시 돈으로 400마르크, 한화(韓貨)로 18만원 정도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행복한 마음에 대학 인근 책방으로 한달음에 달려간다. ‘불가코프 희곡전집’과 ‘러시아-독일어 사전’같은 책을 사들인다. 소련과 외
우연찮은 기회에 접했던 ‘화엄일승법계도’. 의상(義湘)은 화엄종의 대가이자 스승인 지엄(智嚴)스님의 지시에 따라 ‘화엄경’ 80권을 줄여서 ‘대승장’을 저술한다. 하지만 지엄은 각고의 노력으로 의상이 지은 ‘대승장’을 화로에 던져 불살라버린다. 하지만 화로에는 210글자가 불타지 않고 남는다. 지엄이 그것을 의상에게 주어 문리(文理)가 통하도록 한 것이 7언 30행 210자로 전해지는 ‘화엄일승법계도’ 혹은 ‘법성게(法性偈)’다.얼마 전에 210자 전체의 뜻을 이해하고, 모든 문장을 한문으로 기억하여 쓸 수 있게 되었다. 아침에 1
지난 7월 1일은 중국 공산당 창당 100주년 기념일이었다. 1921년 7월 초하루 상해에서 13명의 대표와 50여 명의 당원으로 출발한 중국 공산당이 100년의 역사를 맞은 것이다. 2021년 7월 중국 공산당에는 9천200만의 당원이 가입돼 있다. 지구상에서 가장 큰 정치집단이 중국 공산당이다. 중국 공산당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여 72년째 중국을 지배해오고 있다.1949년 이후 공산당은 지도자들에 따라 세 시기로 나뉜다. 모택동이 대표하는 첫 번째 시기는 1949년부터 1976년까지다. 영국을 뛰어넘어 미국을 잡겠
황망하게 상을 치르고, 초제(初祭) 모시고 여드레 만에 돌아온 집 마당에는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공사판의 어지러움이 완연하다. 한 달을 넘긴 공사가 이제는 정리되었으면 한다. 하기야 상당 기간 세차장을 찾지 못한 탓에 승용차도 말이 아니어서 도중에 세차하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은 터. 사람의 손을 타야 하는 게 실상 적잖다.저녁이 다가올 무렵 가방 하나 둘러매고 길을 나선다. 토요일과 일요일이면 어김없이 들로 걸음을 옮기곤 했다. 오늘은 허청허청 발걸음이 무디다. ‘그래, 넌 이제부터 너의 내부에 강고한 의지처를 찾아야 한다.’
토요일 한가로운 오후의 적막을 깨뜨리는 전화 수신음! 뭔가, 이런 시각에 나의 고막을 어지럽히는 소리는?! 동생의 갈라지고 긴장된 목소리가 많은 것을 암시한다. “그래 알았어! 정리하고 바로 올라갈게. 이따가 서울에서 보자.” 잠시 망연한 상태에서 생각을 수습한다. ‘그래, 올 것이 왔지만, 너무 이르군. 예상치 못한 타격이야.’삶은 언제나 느닷없이 문제를 던진다. 해결 능력과 무관하게 불쑥 난제를 던지고 가버린다. 그래도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내가 언제 그랬느냐는 새침한 얼굴로 시간과 인생은 흘러간다. 그래서 인간이 만들어낸
애초 보름 예정으로 시작한 집수리 공사가 한 달을 넘기게 되었다. 2층 베란다에 창유리 끼우고, 들뜬 외벽 보강 정도 생각했는데, 7년 넘긴 목조주택은 곳곳에서 사람의 손을 부르고 있었다. 하기야 시간과 더불어 쇠락하지 않는 것이 있겠는가, 잠시 생각한다.공사를 지휘하는 박 대목(大木)은 마당의 조경도 손보았으면 한다. 주밀(綢密)하게 서 있는 크고 작은 나무가 분위기를 상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의를 제기하기 어려워진 나는 왕벚나무를 전지한다. 벌써 몇 차례 가지를 쳐냈으나, 왕성한 번식욕과 과시욕을 제어하기에 역부족이다.대문 좌우
빅토르 위고의 장편소설 ‘레미제라블’에서 가장 불쌍한 인물은 누구일까?! 온갖 고난과 난관을 돌파하지만 끝내 위로받지 못한 장발장인가, 법률의 주구로 스스로 목숨을 버려야 했던 자베르인가, 아니면 마리우스를 짝사랑하다가 그를 대신해 총 맞고 죽은 에포닌인가?! 단언컨대 미혼모이자 코제트의 엄마인 팡틴이 제일 불쌍하다.팡틴은 바람둥이 애인 톨로미에스에게 버림받고 홀로 코제트를 기르다 악질적인 테나르디에 부부에게 아이를 맡기고 공장에 들어간다. 200년 전 프랑스는 오늘날 대한민국처럼 미혼모를 박대했다. 미혼모에 문맹인 팡틴은 공장에서
봄날이 저문다. 불후의 명곡 ‘봄날은 간다’가 귓전을 쨍하니 울리는 시점이다. 왔으니 가는 것은 당연지사. 그러하되 봄이 오는 것은 반갑지만, 가는 것은 아쉽다. 우리에게 ‘보는 것(봄)’의 향연을 차고 넘치도록 선사한 화사한 봄날이 퇴장을 준비하는 시절이다. 하기야 소만(小滿)은 벌써 지났고, 6월 5일은 망종(芒種)이다.너른 들을 걷다가 어디선가 새 울음소리 들린다. 유심히 들여다보아도 소리는 들리지만, 형상은 보이지 않는다. 저런 새소리를 금방 구별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한숨 절로 나온다. 그러다가 문득 물 위를 걷듯 달리듯
중량 목구조로 신축한 지 어언 7년. 벽면이 들뜨고, 그 사이로 습기 들어오고, 유리창 없는 베란다에는 비바람으로 물이 고이기도 한다. 손을 볼 때가 온 것이다. 와중에 참새들이 극성하여 지붕 틈새마다 둥지 틀고 새끼 키운다고 야단이다. 수소문한 끝에 정직하고 성실한 시공자를 만나게 됐다.“전체적으로 최소 2천500에서 3천 정도 생각하셔야 합니다.”“네?! 승용차 한 대 값이네요!”설마 했던 우려가 현실이 되고 말았다. 애초 집을 지으면서 신중하게 숙고해야 할 것인데, 워낙 단과반이 체질이라 속도전으로 임한 것이 화근이다. “저는
지난 5월 11일은 세 번째 맞이하는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이다. 1894년 3월 20일 (음력) 봉기한 동학 농민들은 조선의 낙후한 봉건 체제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같은 해 9월에는 일제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고자 두 번째 봉기하여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다.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은 그해 4월 7일 (양력 5월 11일) 황토현 전투에서 농민군이 대승을 거둔 날을 기념하는 것이다. 풍전등화의 조선을 구하려 했던 동학농민혁명은 오늘도 우리를 비추는 등불이다.녹두장군 전봉준을 중심으로 고부(정읍)에서 봉기한 동학 농민군은 파죽지세로 4월 27일 전주
2021년 4월 28일은 충무공 탄생 476주년 되는 날이다. 조선왕조 518년 사직을 돌아보면 세종과 이순신이 선두에 있다.태종 이방원의 셋째 아들로 약관 21세에 왕위에 올라 훈민정음을 비롯한 문물 정비로 조선의 기틀을 놓은 이도(李) 세종. 조선 초기 정비되지 않은 국가의 기틀을 확고히 다져 후세 왕들의 모범이 된 인물 이도. 그는 당 태종 이세민의 ‘정관의 치’를 떠올리게 하는 인물이다.늦깎이로 과거에 급제한 이순신은 몇 차례 난관을 뚫고 1591년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부임하여 거북선을 건조한다. 1592년 4월
올해도 어김없이 4·19가 돌아왔다. 요즘은 4·19 혁명기념일로 부르지만, 내게는 4·19가 익숙하다. 마치 5·18 광주 민중항쟁이나 5·18 광주 민주화운동보다 5·18에 친숙한 것처럼. 벌써 61년 전 일이 된 4·19. 나처럼 나잇살 먹은 인간에게도 60년 세월은 무겁게 다가온다. 하물며 요즘 20~30대 청춘들이야 무슨 말을 더하랴!어떤 친구가 4·19 무렵 이영도 시인의 ‘진달래’와 ‘노찾사’ 가수 김은희를 소개한다.“눈이 부시네 저기 난만히 맷등마다 그날 스러져간 젊음 같은 꽃사태가 맺혔던 한이 터지듯 여울여울 붉었네
쌀쌀하고 바람 불며 비 뿌리던 날이 지나고 그야말로 화사하고 포근한 봄날 하오. 꽃 활짝 피어난 배나무 옆 바위에 앉아 상념에 젖는다. 그때 엥, 소리 내며 벌 하나 배꽃으로 날아든다. 오각형 하얀 배꽃의 내부는 외양만큼이나 정갈하고 허허롭다. 뭐, 가져갈 게 있을까, 생각이 들 정도로 매끈하고 밋밋한 꽃에서 꽃으로 날아다니는 꿀벌.민들레는 키가 작아도 빽빽한 꽃잎 안에 꽃가루며 꿀이 그득하다. 벌의 좌우 다리와 온몸에는 노란 화분(花粉)이 공처럼 매달려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화(梨花)는 아름답고 깔끔한 생김새처럼 내부 역시
꽃이 피고 지는 계절에 길 나서는 일은 축복이다. 울산 친구가 잠시 기거하는 순천을 목적지로 길 떠난다. 서울에서 오는 친구를 순천역에서 마중하여 상사면으로 동행한다. 그 좋던 날이 연이틀 비와 구름과 습기로 촉촉하다. 상사호(上沙湖) 벚꽃길에 넘치게 떨어진 희고 분홍의 이파리들이 우리 발목을 잡는다. 낙환들 꽃이 아니겠느냐, 하는 심정으로 녀석들을 본다.여정은 선암사로 이어진다. 태고종 본산으로 승선교(昇仙橋)로 유명한 선암사. ‘태백산맥’의 작가 조정래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승선교는 언제 보아도 아름다움과 온유함으로 질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