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줄미착용을 엄금합니다’ 반려견과 함께 산책하는 사람들이 더러 스치는 길목에 걸린 현수막이다. 애견에게 목줄을 반드시 착용시켜 달라는 호소였는데, 부정(否定) 표현을 거듭 보면서 잠시 헷갈리고 말았다. 그냥 ‘목줄을 꼭 맵시다’라고 했으면 금방 알아채지 않았을까.새 대통령이‘반지성주의’를 경계하며 민주주의의 위기를 지적했다.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는 누가 시작했을까. 지성을 반대하고 생각하기를 싫어하여, 사람들의 의견과 담론이 파묻힐 터에 과연 민주주의는 신음할 게 아닌가.그는 과연 그런 뜻으로 ‘반지성
긴 터널이었다. 마스크와 함께 두 해를 훌쩍 넘겼다. 스산한 거리를 만나 소상공인들은 얼마나 힘들었는지. 학생이 사라진 강의실은 쓸쓸하였다. 손님이 없는 극장은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학교 운동장이 공터가 되었고 도시의 빌딩 숲까지 한산하였다. 일일 감염자 숫자에 때로 예민했지만, 기승을 부리는 코로나19에 온 세상이 잠식당했다.이제는 끝이 보이는지 급격하게 숫자가 내려간다. 급격한 하락세에 코로나19는 감염병 등급마저 2급으로 강등되었다. 확연한 내림세를 의학계는 ‘안정적 감소세’라 부르고 팬데믹(Pandemic)이 엔데믹(En
역사를 되짚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 역사는 누구의 역사일까.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내일은 없다’는 생각은 어떤 역사를 말하는가. 역사를 재미있게 배워본 기억이 없다. 대표적인 암기과목이었던 ‘역사’는 외워야 할 연도들과 인물명들만 한 가득이었다. 역사서술은 왕들의 치적과 패착을 둘러싼 사건들로만 채워졌다. 역사는 이긴 자의 기록일 뿐 보통사람의 일상은 언급조차 없었다. 역사를 접하고 익히면서 옛사람들의 생생한 모습을 만난 적이 없다. 역사에는 세상의 맥박과 사람들의 숨결이 실종되었다. 역동성과 사실성을 결여한 역사는 재미없는 과목
나라의 미래는 어디로 가는가. 내일 나라의 주인은 누구인가. ‘다음세대’에게 무엇을 전해야 하는가. 그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 말로는 백년대계(百年大計)라면서 누구도 교육을 말하지 않는다.민생을 돌본다면서 정치는 교육을 고민하지 않는다. 지방선거에는 교육감도 선출한다는데 무엇을 기준으로 표를 던져야 하는가. 미래세대에게 꼭 필요한 덕목은 무엇인가. 험한 세상을 헤쳐가기 위해 반드시 길러야 하는 소양은 무엇인가.말하기와 글쓰기. 너무나 기초적인 소양이지만 치명적으로 부실한 부분이기도 하다. 대학에서 만나는 학생들이 제법 공부를
대선 이후 한 달이 흘렀다. 새로운 지도자를 선출한 나라와 백성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희망과 기대에 부풀어야 한다. 박빙의 힘든 싸움을 거쳤다 해도 결과를 확인한 국민은 새 리더십에 높은 기대를 건다. 이번엔 왠지 다르다. 당선 때 획득했던 지지율을 못 미치는 국정기대치가 잡힌다는 여론조사발표가 있다. 물러가는 대통령보다 당선인에게 거는 지지율이 낮다고도 한다. 대통령이 되기도 전에 민심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된다. 선거 직전 온 국민의 마음을 졸였던 동해안 산불로 피해를 본 주민들을 당선인은 잊었을까. 지켜온 한
장애인인권, 특별히 교통이동권이 세간의 주목을 받는다. 교통약자들이 겪는 불편함을 참다못한 인권단체들이 행동에 나섰다. 시위방식에 대하여 논란이 뜨겁다. 시민에게 불편을 끼치는 행태는 공익에 반할 뿐 아니라 사회 일반에 불편을 끼치므로 멈춰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다. 한편, 해묵은 인권문제에 사회적 인식을 제고하고 장애인들의 기본적인 교통인권을 확보하기 위함이므로 정당하다는 주장도 있다. 정치권 일각에서 일방의 의견에 편을 드는 표현이 있어 갈등은 증폭되었다. 집회와 시위가 합법적인 테두리를 어디까지 지켜야 하는지 생각거리를 던지기도
대통령이 새로 뽑혔지만, 여전히 시끄럽다. 건강한 내일을 향한 토론과 담론으로 북적거렸으면 하는데, 현실은 전혀 딴판이다. 정치과몰입 현상이 그대로 유지되면서 난데없이 청와대 이전이 논란거리가 아닌가. 상상과 창의로 비전이 나누어지고 미래를 겨냥하는 지향성이 선명했으면 하는데, 날마다 들리는 소리는 전혀 비생산적인 아귀다툼이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6월이면 동네마다 새로운 일꾼들을 선출해야 하는데, 나라는 온통 하릴없는 말싸움과 신경전에 빠져있으니 국민에게 희망은 언제 안겨주려는지.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전국에서 열일곱 교육감들도
롤러코스터를 몇 번씩 갈아탄 느낌을 남기며 대선이 막을 내렸다. 승리의 기쁨과 패배의 안타까움이 교차하지만, 나타난 결과에 따라 정국은 흘러갈 터이다. 나라와 국민은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 국정이 바르게 돌아가는지 관찰하고 감시하여야 한다. 잘 하는 일에는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겠지만, 모자라는 부분에는 가차없는 질책도 쏟아질 모양이다. ‘이긴 자가 모든 것을 가지는’ 권력의 속성에도 불구하고, 결정에 이른 ‘간발의 차이’는 또 다른 긴장을 부른다.우리 언론. 정보를 전달하고 여론을 촉진하는 순기능이 있음에도, 나라의 언론은 ‘기레기’
미생물학자이며 의사인 소크(Jonas Salk) 박사의 생각을 다시 새긴다. ‘50년 후 벌레들이 없어진다면 지구는 멸망할 것이지만, 사람들이 사라진다면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 될 것이다’지구와 환경을 혼탁하게 만들어 지구가 망가지는 건 둘째 치고라도, 인간들은 서로를 헐뜯는 자중지란 끝에 공동체성이 무너진다는 경고가 아닌가. 그러니, 아름다운 지구를 회복하려면 인간보다 벌레들이 융성하는 게 낫겠다는 충언이 아닌가.대선이 막을 내렸다. 열심히 다투었다. 서로 흠집과 상처를 드러내느라 얼마나 힘들었는가. 등지고 돌아서는 일이 그간의 일
새 대통령을 만나기 일주일 전. 걱정과 긴장, 기대와 흥분이 오가는 마지막 몇 날. 나라와 국민은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습관이 되어버린 코로나와 새롭게 마음을 어지럽히는 우크라이나. 정권교체와 정치교체, 혐오정치와 비전제시 가운데 국민은 하루도 마음이 편하지 않다. 지지하는 이들이 몰려다니고 서로 간에 진영을 넘어서는 지지선언들이 들려오면서 선거판은 혼란스럽다. 주권재민이라지만, 표심으로 승부를 결정할 날들이 며칠 남지 않았다. 마지막 날들을 지혜롭게 사용하려면, 유권자는 무엇을 살펴야 하는지. 구호와 주장이 정치적 관
딱 2주 앞이다. 대통령이 새로 뽑힐 날이 코 앞인 게다. 국민들의 마음은 어떨까.대선 다음이 더 걱정이라는 목소리도 있다. 기대와 희망보다는 좌절과 낙심이 한가득이다. 여기까지 왔는데 내일이 보이지 않는다는 자조는 무엇 때문일까. 오늘보다 내일이 나아 보이지 않는 건 왜 그러는 것일까. 어제를 딛고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려고 대선을 치르는 게 아닌가. 무엇 때문에 우리는 오늘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가. 누구를 뽑아도 하나같이 절망이라면 굳이 대선은 왜 있어야 하는가. 나라와 국민은 어쩌다 오늘처럼 첨예하게 나뉘었을까. 마음들이 어떻
대통령은 왜 뽑는가. 새로운 일꾼을 선출하여 경제와 안보, 사회와 소통, 민생과 여론 등 아슬아슬한 문제들을 맡기려 함이 아닌가. 선진국의 위치와 문화강국의 기운을 지켜야 한다. 오늘 목격하는 대선판의 어지러운 모습이 혹시라도 외부에 알려져 세워온 대한민국의 이미지가 깎여나가지 않을까 걱정이 든다.마지막 남은 며칠이라도 흠집 내기는 멈추고 나라와 국민을 위한 비전과 소신, 정책과 포부가 드러나는 선거전이기를 기대한다. 국민은 덜 나쁜 선택에 머물기보다, 나라에 가장 좋은 내일을 당겨올 대통령을 선출하고 싶다. 미래가 희망으로 다가오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대선전이 뜨겁다. 자리에 올랐던 지도자가 순탄하게 물러가는 모습을 본 기억이 국민에게 없다. 단임제 대통령이라서 선출과 함께 내리막에 선다. 정권을 맡은 쪽에서도 새롭게 평가받을 기회와 동기부여가 충분하지 않다. 최선을 다하지 않아서였을까 아니면 처음부터 기량이 부족하였을까 늘 심판에 시달린다.우리는 언제쯤 안정적으로 국정이 굴러가는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을까. 어느 쪽이 이기든 거친 보복성 심판과 곱지 못한 인물교체의 소용돌이를 겪을 모양이다. 보아하니 보수와 진보 이념과 철학의 차이도 그리 선명하지 않
임인년(壬寅年) 새해가 밝았다. 코로나와 대선정국은 새해라 하여 긴장과 혼돈을 멈추지 않는다. 새롭게 시작하고자 해도 두 해를 넘게 넘실거리는 코로나의 기운은 감염자 하루 이만명을 넘기며 머물고 있다. 새 대통령을 뽑으면 새로운 나라가 펼쳐질 것인지 의심스럽지 않은가. 밖에서 들어온 코로나와 안에서 자란 대선판은 새해가 되어도 희망과 기대를 불러오기보다 체념과 실망을 안기는 모습이다.새해 덕담은 후보들 험담에 쓸려가고 호랑이해의 기대는 코로나 긴장에 발목이 잡혔다. 어느 해라고 똑같을 수 없겠지만, 올해 설 풍경은 사뭇 서먹하고 서
코로나19 팬데믹이 일상을 삼킨 지 두 해를 넘긴다. 오미크론에 대비한 특별방역대책이 나오자 마자 일일 감염자 일만 명을 훌쩍 넘겼다. 증상은 심하지 않다지만 마땅한 치료제가 없으니 사회적 긴장의 강도는 여전히 높다. 개인방역과 사회적 거리두기에 온 국민이 집중해야 한다.방역체계가 흔들리는 건 오히려 대선정국 탓이 아닌가 싶다. 이슈와 담론이 대통령선거 추이에 쏠리는 현상으로 팬데믹을 향한 경각심이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대선승리를 향한 메시지에 방역상황이 정치적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여도 야도 방역을 정치에 끌어다 쓰는 일은 없어야
이성의 시대라고 한다. 보이지 않는 신의 음성에 의지하며 억눌리기보다 인간의 생각하는 힘을 믿기로 하였다. 논리와 분석이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키고 주변에 존재하는 불확실성의 안개를 걷어내면서 눈부신 21세기에 돌입하였다. 이성적인 사고(思考)능력은 인간이 더이상 주술과 무속에 휘둘리지 않아도 될 만큼 안정적인 상태에 도달하였다고 여겨진다.진인사대천명, 사람이 할 바를 다한 후에 마지막 한 자락 하늘의 섭리에 기대하는 것쯤은 애교로 봐줄만 하다. 수험생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실력을 쌓은 다음 시험에 임할 적에 천지신명의 도움을 비는
나라에 할 일이 많다. 진작 풀었어야 할 문제를 적시에 해결하지 않은 탓에 문제가 켜켜이 쌓인 가닥들도 여럿이다. 해마다 겪으면서 지나고 나면 거듭 잊으며 지내온 숙제가 있다. 대학입시. 가르치고 배우는 일의 의미가 왜곡되고 교육현장 부조리의 뿌리가 대학입시인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전국의 교육청들이 제아무리 개혁적인 프로그램을 구사해도 대입제도의 벽은 넘어설 방법이 없다. 유아교육과 초중등 교육이 인성바르며 바람직한 사람을 기르고 싶어도 대학으로 가는 길에서 모든 선의가 무너져 내린다. 불공정의 대명사처럼 누더기가 되어버린 학
하루종일 놀란 가슴으로 지켜보았다. 대선판에 나선 제1야당의 모습으로는 믿기 힘들도록 어지러웠다. 떠난다는 사람, 비난하는 목소리, 해체당한 대책본부, 나는 못 나간다는 외마디 반발과 사라져 보이지 않는 후보까지. 온종일 뉴스거리들이 관심을 끌었지만, 정치권의 갈등과 정치인들의 거취가 대상이었을 뿐 나라와 국민은 보이지 않았다. 정치는 왜 하는 것일까. 경제는 기업이 하고 교육은 학교에서 하며 나라는 군인들이 지키는데, 정치는 어떤 생산적인 일에 복무하는 것일까. 선거에 나선 이들이 ‘공약’을 내걸며 약속을 하지만 신실하게 지켜낸
미국 일간지 워싱턴포스트의 슬로건은 ‘암흑 속에 민주주의는 죽는다(Democracy dies in darkness.)’고 적는다. 암흑, 즉 힘있는 자들이 세상을 주무르는 사정을 국민들이 알지 못하면 민주주의는 죽는다. 명기자 월터 크롱카이트(Walter Cronkite)는 ‘민주주의가 일하려면, 언론이 살아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권력을 겨냥하며 선거에 나선 이들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국민들이 소상하게 알아 현명한 판단을 하려면, 언론은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언론이 살아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기자는 후보들을 상대로 질문을
큰일이다. 대선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 사람들의 믿음을 세우기보다 무너뜨려서 큰일이다. 나라의 갈 길을 보여주기보다 흐리멍텅하게 만들어 큰일이다. 내일이 보여야 하는데 오늘마저 뭐가 뭔지 가늠하기 힘들어 큰일이다. 청년들에게 힘이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짐만 안기니 큰일이다. 여성들에게 든든한 무엇을 만들어 주어야 하는데 되레 헷갈리게만 하니 큰일이다.믿음직하게 보여주는 건 도무지 없고 거짓과 땜빵만 즐비하니 큰일이다. 학교에서 배운 일들이 모두 다 반대로 벌어지니 큰일이다. 큰 선거가 나라의 큰일이어야 하는데 그 선거가 큰일나게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