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의 문신인 서거정은 해박한 지식과 깊은 식견을 가지고 우리나라의 사적(事蹟)을 널리 채집해 위로는 조종(祖宗)의 창업으로부터 아래로는 공경대부의 도덕과 언행, 문장정사(文章政事)와 국가의 전고(典故), 여항풍속에 관한 것 등 국사에 기록되지 않은 사실을 격식에 매이지 않고 간결하면서도 정연한 필체로 기술한 한문 수필집인 필원잡기(筆苑雜記)를 편찬했다. 이 필원잡기에 주자학을 연구하고 성리학에 뛰어나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시조로 추앙받으며 지절(志節)과 학덕이 높은 고려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포은 정몽주 선생의 일화를 적은 포은삼과(圃隱三過)가 수록되어 있다. 내용은 어떤 이가 포은에게 ‘선생님께서는 세 가지 과실이 있다던데 그것을 알고 계십니까?’하고 물었다. 그 첫 번째 과실은
영조(1694~1776)는 스스로를 반성하는 한편 세자를 가르칠 목적으로 유교 경전과 역사서에서 수신과 위정에 관련된 내용을 주제로 자신의 견해를 기록한 책으로 ‘어제자성편(御製自省編)’을 편찬했다. 이 책 외편(外篇)의 첫머리에 수록된 시가 한 수 있다. ‘교화와 정치는 오직 사람에 달려 있나니/ 백성들의 고락이 바로 나의 고락이로다./ 나라 다스림에 좋은 방법을 알고자 하는가./ 기미를 잘 살펴 어진 신하를 등용해야 하네.’ 이 책에서 영조는 수신의 요체를 마음을 다스리는 것으로 보았고, 위정의 요체를 기미(幾微)를 살피는 것으로 보았다. 기미를 살핀다는 것은 선악이 나뉘는 조짐을 살핀다는 것으로 곧은 인재를 변별하고 등용하여 국가를 다스리는 바탕으로 삼는다는 의미이다.
유교사회에서는 본래 바른 생활습관과 품성을 배양하기 위한 조기 인성교육을 중시했다. 그래서 초등교육 단계의 교재로 사자소학(四字小學)이나 동몽선습을 비롯해 소학 등을 권장했다. 사자소학은 사람으로 태어나서 열 살 이전에 익힐 수 있는 책으로 반드시 배워서 익혀야 할 생활규범과 철학이 실려 있는 초학서이다. 동몽선습은 오륜을 정리해 덕행함양에 목적을 두었으며, 천자문을 익히고 난 후 어린 학동들이 배울 초급교재로 중종 때의 학자 박세무(1487~1554)가 저술한 것으로, 1670년(현종11)에 간행됐다. 당시에는 지식교육도 획일적이 아니라 개인의 수준과 능력에 맞추어 단계적으로 행해졌다. 사회 전체 차원에서는 지위나 부는 그리 중요시되지 않았고, 인품과 덕망이 높은 인사가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그려졌다. 국가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범은 죽으면 가죽을 남긴다’라는 속담이 있다. 우리는 사물에 이름을 붙이고 부름으로써 그 대상을 파악하고 나 사이의 관계를 형성시킨다. 이름으로 그 사물의 본질을 남김없이 반영할 수는 없지만, 그 불완전함에도 이름이 없으면 우리는 그 사물을 일컬을 수도 없고, 무엇이라고 판단할 수도 없다. 히브리 신화에는 하나님이 빛을 창조 후 시간을 만들었으며, 천지를 창조하여 공간을 이루었고 그 공간에 삼라만상을 창조한 다음 마지막으로 인간을 만들었다고 한다. 최초의 사람인 아담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데리고 와서 보여주는 사물에 대해 하나씩 부른 것이 이름이 되었다. 이렇게 이름을 주는 것은 고대부터 숭고하고 위대한 일로 인식하였다. 이름은 지명하는 힘이 있으므로 존경하거나 위대한 이는
성경의 그리스어에서는 양심을 시네이데시스 ‘공유하는 지식’이라 했다. 모두가 공통적으로 알고 있는 상식으로 살인이나 도둑질이 나쁜 짓이기에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누구나 인정한다는 것이다. 양심이 은유적으로 ‘은밀한 앎’이나 ‘내부의 빛’으로 표현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양심이 사물의 가치변별과 스스로의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의 판단을 내리는 도덕적 의식이라고 볼 때, ‘맹자, 공손추 상편’에 나오는 ‘사단(四端)’이야 말로 실천도덕의 근거이며, 양심이 무엇인가에 대해 정확히 설명하고 있다. 맹자는 사단을 통해 성선설을 근거로 인간심리현상을 제시한 것이다. 첫 번째 ‘측은지심’은 인(仁)이란 단서에서 비롯됐으며, 남을 불쌍히 여기거나 측은하게 여기는 타고난 착한 마음으로 이 마음이 없
2년 전 촛불집회는 현대사에서 우리 사회를 몰아쳤던 가장 큰 사건이었다. 본래 인간의 삶 속에서 스스로를 희생하면서 세상의 어둠을 걷어내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 촛불은 집회에서도 그 의미를 발했던 것이다. 지난달 29일 박근혜 정권을 몰락시켰던 촛불집회가 2주년을 맞았다. 광화문 광장에는 다시 적폐청산을 외치며 촛불혁명을 완수하자는 진보단체들과, 박 전 대통령의 탄핵은 사기라며 석방 주장과 함께 노동자와 자영업자까지 다 파괴하는 문재인 정권은 물러나라는 보수단체들의 맞불 집회가 열렸다. 이들 양 단체는 이 촛불집회를 진보측은 혁명이라 일컫고, 보수 쪽에서는 쿠데타라 일컫는다. 서로가 자기들의 주장이 옳다고 하는 상황에는 반드시 모함이 있다. 이 모함이 일어나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시기심이나
조선 중기 문신이며 구국의 문장가인 이정귀(1564~1635) 선생은 그의 문집인 ‘월사선생집’에 ‘학질을 쫓아 보내는 글’(送文)을 실었다. 내용은 ‘나라는 반드시 스스로 친 뒤에 외부적이 치고, 사람은 반드시 스스로 해친 뒤에 사기가 와서 해친다.’이다. ‘학을 뗀다.’라는 우리말이 있다. 어떤 일에 시달려 기력이 다 소진되고 질리게 되어 거의 죽음에 이르는 상황을 겪었을 때 하는 말이다. 학은 학질을 가리키는 말인데, 한 번 걸리면 증상이 워낙 지독하여 잘 떨어지지 않는 아주 몹쓸 병이기에 이 말이 생긴 것이다. 이정귀가 이 병에 걸려 3년째가 됐을 무렵 병의 증상이 한여름에 두터운 겨울 외투를 입고도 화로를 끼고 살아야 할 지경이고, 추운 날 얼음물을 마시고도 갈증을 호소하며 등에는 식은땀
문심조롱(文心雕龍)의 주(註)에 잠(箴)은 병을 고치는 침의 뜻이라 했다. 설문해자에서도 ‘잠은 침과 같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경계하고 풍자하는 글이다.’ 라고 적고 있다. 이 잠에 대한 서양의 가장 대표적인 기록이 첫머리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금언집(金言集)이라고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서 전해오던 교훈과 격언을 편집한 구약성서의 잠언(箴言)이다. 동양의 대표적인 것은 북송 중기 유학의 대가인 정이(1033~1107, 正叔)가 지은 사물잠(四勿箴) 즉, 시잠(視箴), 청잠(聽箴), 언잠(言箴), 동잠(動箴)이 있다. 이 중 언잠은 인간관계에서 사람은 예가 아니거든 말하지 말라는 경계(警戒)의 잠이다. 이 언잠의 주요 내용은 사람의 말은 외물에 느낀 자신의 마음을 나타내기에
1443년(세종 25) 세종은 새로 우리 글 28자를 창제하였다. 1443년 12월 30일 실록의 기록에는 ‘이 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중·종성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마는 전환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이라고 일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훈민정음은 무엇보다 창제 동기가 밝혀져 있는 문자라는 점에서 세계적으로 으뜸간다고 볼 수 있다. 이 훈민정음의 창제를 반대한 대표적인 인물이 최만리였다. 1444년 2월 20일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는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문자를 만드는 것이 중국을 사대(事大)하는데 잘못이라는 점이다. 조선은 대국을
인재가 세상에 쓰이지 못하거나 반대로 무능한 사람이나 격에 맞지 않는 사람이 고위직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경우를 종종 본다. 이런 잘못된 인사검증에 대해서 국민들은 목소리를 높여 비판을 한다. 그런가 하면 능력이 있을 줄 알고 발탁했는데 정작 그 자리에 올라가서는 형편없는 성과를 내거나 반대로 별 볼일 없을 줄 알고 임명을 꺼렸던 사람이 의외의 성과를 내서 임명에 반대했던 사람들을 머쓱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 이것도 일종의 잘못된 인사행정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고려 의종부터 명종대까지의 문인이자 학자인 서하 임춘(1150년경~?)은 예천 임씨의 시조로 강좌칠현의 한 사람이다. 20세 전후해서 무신난의 화를 가문 전체가 입어 시와 술로 세월을 보내다 30세에 세상을 떠난 뒤 지인이었던 이인로가 그 유
사회의 다양한 계층 사이에 잠재하던 갈등이 점차 노골적으로 드러나면서 특정집단의 이름 뒤에 충(蟲)을 붙여 혐오감정을 드러내는 신조어가 우리생활에 퍼지고 있다. 이 벌레 충자를 붙인 혐오신조어는 극우 성향 커뮤니티인 일간베스트(일베) 회원을 비하하는 ‘일베충’에서 시작됐다. 이 일베를 중심으로 남성의 여성혐오가 몇 년 전의 화두였으나, 지금은 여성들에 의한 남성혐오가 새로운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이들은 메갈리아(메갈)라는 커뮤니티를 무대로 공론장을 형성하면서 그간 쌓인 남성에 대한 증오를 분출하고 있다. 현재 대표적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는 혐오단어는 2011년 ‘일베충’이라는 표현이 수면 위로 올라오면서 널리 퍼져 올해까지 블로그나 트위터에 게시된 글이 85만 건 이상 언급됐다. 메갈과 일베의 충돌 중
우리나라는 헌법상 규정된 국민의 의무가 있다. 일반적으로 국민의 4대 의무라 하면 국방, 근로, 교육, 납세의 의무를 말한다. 이중 국방의 의무와 납세의 의무를 제외하고는 권리인 동시에 의무에 해당된다. 헌법 제39조 1항은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방의 의무를 진다.’로 되어있다. 사상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남북으로 갈려진 우리 민족은 1950년 6·25라는 동족상잔의 참혹한 전쟁을 겪으면서 느슨한 국방이 나라를 얼마나 위험에 빠뜨리는지를 경험했다. 예나 지금이나 국가와 민족의 보존에 필수적인 요소는 부국강병밖에 없다. 지난 조선의 역사를 왕권(王權)과 신권(臣權)의 끊임없는 주도권잡기 역사로 본다면, 건국 당시 정도전등은 신권국가를 만들고자 했으나 실패함으로써 태종부터 성종 대에 이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인 이익(1543~1620) 선생의 ‘성호집’에는 ‘애꾸눈 닭 이야기’가 실려 있다. 한쪽 눈이 안 보이고 다른 눈도 온전치 못한 닭이 정상적인 닭들보다 병아리를 더 잘 키우는 것을 보고 지은 글이다. 정상적인 닭들은 새끼를 데리고 다니면서 흙을 파헤쳐 벌레를 잡느라 부리와 발톱이 닳아지고 사방으로 나다니느라 편안하게 쉴 새가 없다. 또한 위로는 솔개를 옆으로는 고양이를 감시하면서 부리로 쪼아대고 날개를 퍼덕이면서 죽을 힘을 다해 싸운다. 그렇게 해도 환란이 한번 휩쓸고 지나간 뒤에 보면 병아리들이 열에 예닐곱은 죽어있다. 또 멀리 나가 돌아다닐 경우에는 사람이 보호해 줄 수가 없어서 사나운 맹수들의 밥이 되곤 한다. 그러나 애꾸눈 닭은 모든 것을 반대로 하였다. 나
자공이 공자에게 정치의 원리를 물었다. 공자는 정치의 원리를 첫째로 인민의 생계대책, 둘째로 치안과 국방, 마지막으로 인민의 신뢰를 들었다. 자공이 상황에 따라 하나를 포기한다면 무엇을 먼저 포기해야 하는가 하고 물었다. 공자가 치안과 국방을 먼저 포기하라고 하였다. 자공이 다시 부득이한 상황에서 남은 두 가지 가운데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가 하고 물었다. 공자가 생계대책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덧붙여서 예로부터 사람은 모두 죽지만 신뢰가 없으면 설 수 없다고 하였다. 권력을 얻는 과정에서나 운용하는 과정에서 정당성을 잃어버리면 신뢰를 얻을 수 없다. 국가의 권위가 믿음을 잃어버리고 위아래가 서로에 대해 믿지 못하면 결국 믿을 것은 내가 또는 우리가 가진 힘밖에 없다.
의례(儀禮)는 유교경전 13경 중 하나이다. 이 의례 상복전(喪服傳)에 삼종지도가 기록되어 있다. 삼종지례라고도 하는 이 단어는 ‘좇아야 할 세 가지의 도리’로서 동양의 봉건사회에서 여성이 마땅히 복종해야 할 윤리를 말한다. 이 사회적 윤리는 집에서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 시집을 가면 지아비를 따르며, 지아비가 죽으면 아들의 뜻을 좇아야 한다는 것이다. 주역 64괘의 해설에 의하면, 건은 남자를 상징하며 건강을 덕으로 하여 여자를 지배하고, 곤은 여자를 상징하며 유순을 덕으로 하여 남자에게 복종하는 것으로 되어 있어 이것으로 남녀의 지위를 정립하였다. 이러한 교육관은 봉건사회에서 여성을 남성에 종속된 존재로 보고 여성의 권리를 억압하는 굴레로 작용하였다. 또한 대대례(大戴禮)의 본명편에 ‘부인에게는
오늘날에는 사람들이 쥐를 잡기 위해 고양이를 기르지는 않는다. 대부분 애완용으로 기르고 있다. 그러나 곡식 생산이 위주였던 예전 농경사회에서는 고양이를 키우는 목적이 이와 달랐다. 곡식을 훔쳐 먹는 쥐를 잡기 위해 키웠다. 농경사회를 살았던 우리의 선인들은 자신들의 생활에 큰 이로움을 주는 고양이와 관련된 글을 종종 남겼다. 조선중기 학자 송암 권호문은 송암집에 ‘고양이를 기르는 데 대한 설(畜猫說)’을 지었다. 송암은 본디 가난해 창고에 쌓아놓은 곡식이 없기 때문에 쥐로부터 해를 당할 것을 걱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가을에 추수를 마치고 곡식을 쌓아놓자 뭇 쥐들이 갑자기 모여들어 들보 위에서 시끄럽게 돌아다니거나 옷을 잘게 썰어 구멍을 뚫어놓기도 하고, 곡식을 훔쳐서 자신들의 소굴로 가져가 그 피해가
생자필멸(生者必滅)이란 말이 있다. 살아있는 자는 반드시 죽는다는 뜻이다. 인생은 덧없고 짧은 것이라 할지라도 그 뜻은 결코 짧을 수가 없다. 그것을 단적으로 증명해주는 것이 묘비명이다. 원래 묘비명은 고대 이집트로부터 유래했고 이행시(二行詩) 형태를 원형으로 삼았다. 서양에서의 묘비명은 짧은 경구나 시의 형식을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가장 흔한 묘비명은 인생의 덧없음을 일깨우는 교훈적인 문구 ‘메멘토 모리(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이다. 심지어 어떤 작가는 자기가 쓴 작품 속의 주인공을 죽게 만들고서는 그들을 위한 묘비명도 써주었는데, 세르반테스의 명작 ‘돈키호테’는 파란만장한 여정 끝에 등장인물들이 세상을 떠나자 소설의 맨 마지막을 그들을 위한 묘비명 시로 장식했다. 서양의 경우 꽤 유명한
지난달 22일 올라온 ‘23개월 아기가 폭행에 장이 끊어져 죽었습니다’라는 제목의 청와대 국민청원은 지난달 25일 낮 12시 30분에 21만 명 이상의 동의를 얻었다. 이른바 아동폭행의 전형인 ‘성민이 사건’에 대한 청원이다. 이 사건은 지난 2007년 5월 울산의 한 어린이집에 다니던 23개월 이성민군이 소장 파열에 의한 복막염으로 사망하였다. 어린이집 원장 부부가 성민이의 복부를 발로 때려 숨지게 한 혐의 등으로 기소됐으나 법원은 아이를 숨지게 한 혐의를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로 판단해 ‘업무상 과실치사’로 사건을 종결했다. 청원자는 오래된 사건이라 재수사는 어렵지만 아직도 계속 아이들이 학대와 사고로 죽어나가고 있음에도 이해할 수 없는 형량과 처벌을 받지도 않는 법들은 꼭 개정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
조선 중기의 학자인 장흥효(1564 ~1633) 선생의 ‘경당집, 일기요어(日記要語)’에 ‘ 자기를 이기기는 쉽고 남을 이기기는 어렵다. 자기를 이기는 건 나에게 달려 있고 남을 이기는 것은 남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라는 글이 있다. 자기를 이기는 건 실로 쉽지 않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을 부처는 전쟁에서 수많은 적을 혼자 싸워 이기는 것보다 자신을 이기는 것이 더 용감한 일이라고 정리하였으며, 노자도 남을 이기는 자는 힘있는 자이나 자기를 이기는 자는 승부를 뛰어넘는 강한 자라고 했다. 자기와의 싸움은 온전히 자신에게 달려 있다. 자기를 이기려면 자기와의 싸움을 전제해야 하고 자기와 싸우려면 본래의 자기와 또 다른 자기를 전제해야 한다. 이 싸움은 자기가 본래의 자기를 부정하는 치열한
당조(唐朝)는 중국의 역대 왕조 가운데 가장 성세를 구가했던 나라다. 그중 성당의 핵심 군주는 당태종(이세민·598~649)이다. 이른바 ‘정관의 치’는 태종 때의 연호(정관·627~649)를 딴 치세기를 일컫는다. 형제를 죽이는 참극(현무문의 변·626년 7월 2일)을 바탕으로 어좌에 올랐지만 태종의 정치력은 중국 역사에서 드물게 뛰어난 군주로 평가받는다. 한 고조 유방의 호탕함과 용인술과 위(魏) 무제 조조의 지모와 용병술을 갖췄다고 할 정도였다. 한창 나이에 황제의 자리에 올랐음에도 부당하게 권력을 행사하거나 사치하지 않고 스스로 근검절약하며 나라와 백성을 위해 애써 황족과 대신들이 이를 본받게 했다. 당시 유럽의 문화는 당의 문화에 비해 보잘 것 없었다. 그런 그에게도 3개의 거울이 있었다. 우선 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