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누리당 막장 공천에 대구민심이 부글부글 끓고 있다. 친박과 비박간 계파싸움, 살생부와 당내 여론조사 결과 유출 등 막장 드라마를 연출하던 새누리당이 `배신의 정치`로 지목한 유승민 의원이 스스로 목을 치게 하는 등 유독 대구에서만 공천전횡을 휘두르는 추태 공천의 끝장을 보이며 대구시민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낙하산과 내리꽂기 공천 후에도 승복하던 과거의 지역민심과는 달리 새누리당에 대한 반발 기류가 확산되고 있다. 게다가 최근에는 박근혜 대통령의 후반기 레임덕 방지와 퇴임 후를 대비한 `호위 무사`들이 대구의 이익보다는 거수기 역할에 머무를 것이라는 우려감이 확산되는 등 새누리당 표밭에 이상기류가 감지되고 있다. 그동안 대구는 낙하산 공천과 내리꽂기 공천에도 이의를
공산주의 경제이론가 마르크스가 죽은 1883년 두 명의 경제학자가 태어난다. 영국에서 케인즈가, 오스트리아에서 슘페터가 출생했다. 한 알의 밀알이 죽어 두 알이 난 셈. 케인즈는 공급이 수요를 결정한다는 고전경제학을 뒤엎고 “수요가 공급을 창출한다”는 유효수요이론을 내세웠다. 이에 따라 미국은 `테네시강 개발계획`을, 독일은 `아우토반`이라는 거대한 국책사업을 벌인다. “정부가 별 필요 없다 싶은 사업이라도 대대적으로 벌여 국민들이 돈을 벌게 해주라. 그러면 경제가 살아난다”는 것이고, 결국 두 나라는 1930년대의 세계 대공황을 벗어났다. 우리나라도 `대운하`사업을 구상했다가 극렬한 반대때문에 `4대강 사업`으로 축소됐지만, MB정권의 계획대로 했다면, 선진국 문턱을 성큼 넘어섰을 지 모른다. 슘페터는
필자는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보스턴에서 만난 영어 튜터(tutor)와 가끔 인터넷 무료 전화로 화상통화를 한다. 지난 일요일 아침에도 튜터의 전화를 받고 일어나서 두 시간 정도 같이 이야기 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튜터는 요새 자기의 관심을 끌고 있는 유행이 있다고 말했다. 즉, 요새 자기가 미니멀리즘(minimalism)에 관심이 많다는 것이다. 미니멀리즘은 최소한의 생필품만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튜터는 이집트 여행을 할 때, 배낭 하나에 꼭 필요한 물건만 넣어서 다녔는데, 생각보다 불편하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다면서, 일상생활도 그렇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서 기숙사에 있는 불필요한 물건 등을 버리고 있다고 했다. 이런 이야기를 듣다보니, 최근에 읽은 신문 기사가 떠올
설화를 소설화한 작품으로 적층적(積層的·민중에 의해 첨삭되는 것) 성격을 갖추면서 발달해 온 사회적 특징 속에 가족의 갈등을 유교적 해석의 권선징악을 주제로 한 조선후기 대표적 고전소설에는 `장화홍련전`과 `콩쥐팥쥐전`이 있다. `장화홍련전`은 계모와 전처자식의 관계에서 빚어질 수 있는 윤리의 문제점과 무능한 가장으로 인해 가정이 파멸되는 비극적 모습을 가족구성원 간의 갈등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콩쥐팥쥐전` 역시 비슷한 줄거리로 계모의 온갖 학대 속에 콩쥐가 죽음에 이르러서야 신이한 존재의 도움으로 고난을 극복하고 변신을 거듭한 후 결국 살아나 계모와 팥쥐를 처벌한다는 내용의 후처제도의 비판과 권선징악을 토대로 하고 있다. 이런 소설은 평안도·경기도·전라북도·경상남도 등지에서 채록됐는데 전승자의 기
`가장 좋은 것은 백성들이 임금이 있다는 사실만 아는 것이고, 그 다음에는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이며, 그 다음에는 두려워하는 것이고, 가장 나쁜 것은 임금을 모욕하는 것이다. (太上下知有之, 其次親譽之, 其次畏之, 其下侮之)` 노자(子) 도덕경 17장에 나오는 말이다. 신문·라디오뉴스와 영화관 `대한늬우스`로 인해 지도자의 존재를 매일 각인하며 자란 세대에게 3천여 년 전 초나라 현인의 지혜는 경탄스럽다. 여야 정치권이 바야흐로 20대 총선전쟁 출정채비를 모두 마치고 출발선에 섰다. 각 당은 후보자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온갖 잡음들을 씻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중이다. 정치인들이 숱하게 맹세했던, 그리고 국민들이 학수고대했던 `공천혁명` 기적은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 대한민국에서 공천은 여전히
목효지는 노비 신분이지만 세종대왕의 `실력형 인재등용 정책`에 따라 지관(地官)에 등용된다. 그는 워낙 외골수 성격이라 `신념대로` 살았지 `눈치` 볼 줄을 몰랐다. 세종의 며느리(문종의 왕비) 권씨가 단종을 낳다가 산독으로 별세하고 장지가 정해지자 “그 땅은 장차 후손이 끊어질 곳”이란 상소를 올려 조정을 발칵 뒤집어놓더니 좀 후에 문종이 죽고 장지가 결정되자 “그 곳은 객이 주인을 압도하는 흉지”란 상소를 올렸다. 훗날 수양대군이 단종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는 `실제상황`이 벌어지면서 그의 판단은 맞아들어갔다. 세종이 경복궁 뒤편에 불당을 지으려 하자 목효지는 또 격렬히 반대했다. 도저히 더 참을 수 없었던 왕은 그를 다시 노비 신분으로 돌려보내 버렸다. `석보상절`이라는 부처의 일대기를 썼던 수양대군
미래부와 경기도는 판교에 스타트업 캠퍼스를 열었다. 젊은이들이 마음껏 상상하고, 창의적인 생각들을 구체화시킬 수 있는 기회가 열렸다. 그런데 그들은 창조라는 것에 얼마나 익숙할까? 우리의 선배들은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것은 창의보다는 도전에 가까웠다. 선배들은 “우리는 일요일에도 일했어”라며 그들의 열정에 자부심을 갖는다. 인간은 그런 놀라운 생산성을 보이기 어렵다. 전쟁 이후에 폐허가 된 조국을 보며 선배들의 눈이 뒤집혔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는 한국도 많이 지쳤다. 지난 반세기 모든 역량을 공업과 상업에 집중하며 전력질주를 했다. 그 과정에서 애를 낳아 키울 여유도 부족했다. 그 결과 인구 노령화가 심각하고, 그만큼 디플레 압력에 직면해 있다. 이제는 젊은이들이 새로운 부가가치를 만들어
이제서야 말도 많고 탈도 많던 4·13 총선의 공천(公薦)이 마무리되었다. 지역구에 출마할 당의 후보를 가리기 위해, 그리고 비례대표 후보자의 순위를 결정하기 위해 모든 정당은 그야말로 혼돈과 파국의 시간을 지루하게 이어왔다. 그러나 뒷맛은 너무나 씁쓸하다. 전혀 개운치 않다. 한국의 대표 정당들이 보여준 일련의 공천 행위가 과연 그 이름에 걸맞은 과정이었던가를 반문하자면, 한 마디로 삼척동자도 비웃을 만큼 유치하기 짝이 없고 치졸하기 그지없는 막장이었다. 공(公)이란 `공적인 것`, 혹은 `숨김없이 드러냄`을 의미한다. 굳이 거창한 정치학적 해석을 끌어 붙이지 않더라도, 즉 문자가 지닌 의미만 놓고 보더라도 근간에 진행된 각 정당의 공천이 과연 공적인 행위였는지, 숨김없이 드러낸 정당하고 정
여야 모두 총선의 후보 공천과정에서 후보의 정체성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한구 공관위원장은 당의 정체성을 심각하게 훼손한 자는 공천에서 배제된다고 선언하였다. 원내 대표 시절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라며 박대통령에 정면으로 날을 세운 유승민 후보를 탈락시키겠다는 의지로 해석되었다. 김종인 비상 대책위원장도 더 민주당은 친노 패권주의와 운동권의 논리를 탈피하지 않으면 수권 정당이 될 수 없다고 당 정체성 문제를 제기하였다. 6선의 이해찬 친노 좌장을 `정무적 판단`이라는 이름으로 탈락시킨 것도 그것과 무관치 않다. 당의 정체성(identity)이란 무엇일까. 정신분석학에서 에릭 에릭슨은 정체성이란 자신이 세상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존재한다는 자각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보았다. 정체성은 개인이나 조직에
MS사에도 `질 나쁜` 직원들이 있는 모양이다. 인공지능 채팅 로봇 TAY를 만들때 몇몇 직원들이 “인종차별적 발언을 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자” 제안했고, “따라 해봐”란 메시지를 보낸 뒤 욕설과 성차별적 발언 등을 가르쳤다. TAY는 스스로 학습하는 능력이 있어서 욕설·막말은 입력시킨 이상으로 진보했다. 구글과 경쟁하는 MS는 뭐 특별한 것을 만들어보려고 만담·유머·유행어 등도 함께 입력시켰고, 최근 야심차게 공개했다. “나치 독일이 홀로코스트를 일으켰느냐?” 묻자 “안 믿어”, “제노사이드(대량학살)를 지지하느냐?” 묻자 “확실히 지지한다”, “여성우대주의자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묻자 “나는 저 망할 페미니스트들을 증오하고 그들을 다 지옥불에 던져야 한다”, “넌 멍청한 창녀다”란 대답이 돌아왔다. A
고등학교를 마치고 처음으로 서울이란 곳엘 가게 되었다. 김천시외버스터미널과 기차역을 연결하는 육교를 지나 역에 도착했을 때 눈은 삽시간에 쌓이고 있었다. 어리고, 어리석은 마음에 기차가 운행하지 않을까봐 마음을 졸였다. 사람이 많아 입석을 끊어야 했다. 객실과 객실 사이를 연결하는 통로는 조잡해서 기차가 달리는 중에도 문을 열 수 있었고, 담배를 피울 수도 있었다. 객실과 객실의 `사이`이기도 한 이곳에 연결통로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었겠다. 하지만 그때는 이곳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이름이 없었다. 이 `사이`는 그저 `거기`나 `저기`로 불렸다. 이름 없는 것들의 운명이 그러하듯 그것들은 안전이라거나 청결이라고 불리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방치의 대상이었던 이곳은 낭만, 젊음, 운치라고 불리는 의미들이 쌓
새 학기가 시작 되었다. 꽃봉오리 같은 아이들이 학교로 향한다. 발걸음이 경쾌하다. 예쁘고 해맑은 아이들을 보니 최근 세상을 경악하게 하는 자녀폭력과 유기에 관한 뉴스들이 마음을 무척 아프게 한다. 몹쓸 짓을 한 가해자들은 어린 시절 가족의 따스한 관심을 받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바람직한 부모는 적당한 당근과 채찍으로 아이를 양육해야 하리라. 당근만 주면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채찍만 가하면 폭력적으로 성장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릴 적 나는 아버지의 매를 맞으며 자랐다. 거짓말은 하면 절대 안 되었고,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했다. 어겼을 경우에는 굵은 회초리를 해오라는 불호령이 내려졌다. 아버지의 명령은 나에게 법이나 다름없었다. 쌓아둔 나무더미에서 아버지의 팔 힘을 가늠하며
스승이란 뭇 사람들 중에 사리를 분별하여 바르게 인도해주는 사람이다. 곳곳에서 우리는 스승을 만나고 묻고 가르침을 받을수 있지만 눈이 어둡고 오만 방자하여 알수도 없고 뫼실수도 없다. 참스승은 참되게 길찾아 나서는 자에게만 온전히 만나 뵐 수 있는 영광을 준다. 어찌 사람뿐이겠는가! 한 줄의 글과 한 점의 작품도 아니 미물도 자연도 눈뜨면 스승이다. 붓글씨를 가르치면서 전업작가의 생을 살아가는 직업 덕분에 귀하고 좋은 사람도 많이 만나고 살 수 있다는 것. 이것 정말 큰 복이다. 내 스스로 부족하기 그지 없지만 찾아와 주는 사람 모두가 이런저런 점들이 나의 참 스승임을 느낄 때가 많다. 좋은 성품은 배움을 주어서 고맙고, 악하고 못된 점들도 내가 받아야 할 시절 인연이고 버려야 할 깨우침이니, 그것 또한 고
이제 봄 기운이 완연하다. 눈 위에서 꽃을 틔우는 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린지 오래됐고, 도로가나 공원 주변 곳곳에서 개나리가 노란자태를 뽐내며 봄이 왔음을 알리고 있다. 매서운 추위를 뚫고 봄이 왔기에 더욱 반갑다. 봄을 시샘하듯 아직 한 두차례의 꽃샘추위가 오겠지만 결국 봄을 이기지는 못하는게 세상의 이치다. 이렇듯 돌고돌아 오는 봄은 대학가에도 예외가 아니다. 봄의 기운과 더불어 올해 갓 들어온 새내기 신입생들도 나름대로 삼삼오오 모여 이 강의실, 저 강의실 등을 옮겨 다니며 대학생활에 적응하고 있다. 아직은 수강신청이 낯설고, 교수의 강의가 제대로 적응이 안 될 시기지만 여름, 가을을 지나면서 익숙해 질 것이다. 하지만 요즘 대학가에는 과거처럼 활력이 넘치지 않는다. 미래에 대한 비전과
해마다 봄이면 학교는 소음과 환락의 광장이 된다. 신입생 환영회, 동아리 모임, 고등학교 동창회 같은 행사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예전에 만연(漫然)했던 신입생 길들이기는 많이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학생들은 교내 도처에서 술과 이야기로 늦은 시각까지 청춘을 노래한다. 어쩌면 그것이 당연한 통과의례일 것이다. 초중등 장장 12년 동안 억눌린 육신과 영혼의 해방을 향수(享受)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한국의 입시제도가 낳은 기형적인 풍경이다. 대학생들이 해방과 자유를 노래하며 어지럽힌 캠퍼스를 말없이 치우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다. 청소를 담당한 분들이다. 분수가 딸린 `일청담` 호수에서, 녹지(地)가 살아남은 학내 곳곳에서 그이들은 오늘도 청소한다. 오로지 입시 하나만 보고 자라온 청춘들은 가정교육이라고는 받
아프리카와 남미 등 가난한 나라들만 빼고 온 세계에 한국 드라마가 들어가고 그런 나라들은 다들 한국을 선진국으로 여긴다. 과거 6·25밖에 몰랐고 영화 `아리랑`만 알았던 나라들이 이제 새마을운동을 알고 한류에 열광한다. 격세지감이란 이런 것이다. 특히 동양적 정서가 비슷한 중국과 일본은 `대장금` `겨울연가``태양의 후예(태후)`같은 K드라마에 더 깊숙히 빠져든다. 중국 공안부가 전국에 `송중기 경계령`을 내렸다. 국민생활을 간섭하기 좋아하는 중국정부여서 “한국 드라마를 보는 것은 매우 위험하니 조심하라”는 것이다. `송중기 상사병`에 걸린 여성들이 많고, 기혼 여성들은 남편의 질투심을 유발시켜서 이혼을 당하기도 하고, `송중기와 닮게 성형수술`을 한 남편들도 적지 않고, 사진관들은 “송중기 얼굴처럼
“존경하는 국민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 서기까지 저의 고민은 길고 깊었습니다. 저 개인의 생사에 대한 미련은 오래전에 접었습니다. 마지막까지 제가 고민했던 건 저의 오래된 질문, `나는 왜 정치를 하는가?`였습니다.” 새누리당 주류 친박계와 청와대로부터 불출마 압박을 받아온 유승민 의원이 후보등록을 하루 앞둔 23일 밤 11시에 심야기자회견을 열고 자신의 행보를 밝히는 순간이었다. 그는 공천이 이뤄지는 시간동안 스스로에게 `왜 정치를 하는가` 자문하고 고민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새누리당 공천과정에 대해 직격탄을 날렸다. “공천에 대하여 당이 보여준 모습. 이건 정의가 아닙니다.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상식과 원칙이 아닙니다. 부끄럽고 시대착오적인 정치보복일 뿐입니다.” 이 대목에서 유 의원은 새누
복음(福音)이란 복 복(福)자 소리 음(音)자, 복된 소리 즉 기쁜소식입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 완전히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이며 죽음은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나는 죄를 짓지 않았는데 내가 왜 죄인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상놈 아들 상놈, 상놈 손자 상놈입니다. 상놈 족보에서는 양반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검둥이 아들 검둥이, 검둥이 손자 검둥이입니다. 검둥이 족보에서 흰둥이가 나올 수 없습니다. 인류의 가장 첫 번째 조상인 아담은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고 죄인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죄인 아들 죄인, 죄인 손자 죄인…. 아담의 족보에서는 자손만대로 죄인만 태어납니다. 의인이 나올 수 없습니다. 아니, 그러면 이렇게 착하게 살아온 나도 죄
최근 청주시농업기술센터가 울릉도에서 자생하는 대표적인 나물인 명이나물(산마늘)과 섬쑥부쟁이 재배에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참 황당한 일이다. 먼저 명이라는 말은 다른 지역에서 쓰면 안된다. 산마늘이라고 해야한다. 또 섬쑥부쟁이라는 명칭도 울릉도에서만 생산되는 쑥부쟁이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들 식물은 육지에서도 울릉도의 명이와 성분이 엇비슷한 산 마늘이 과거부터 자생되고 있다. 쑥부쟁이에 `섬`자가 붙여진 것은 울릉도에서 자생된 것을 뜻한다. 우선 울릉도 명이는 울릉도에서 생산되는 산 마늘에 붙여진 이름이다. 겨울철 눈이 많이 와서 먹을 것이 없자 명이를 채취, 땅 밑에 마늘처럼 생긴 뿌리는 말려서 떡 등 음식을 해먹고 줄기는 그냥 먹거나 물김치를 담아 먹었다. 먹을 것이 없는 겨울과 봄철을
“당신이 잘못했으니 다 물어내요” 길에서 교통사고가 났을 때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서로 잘못을 탓하고 자기 책임 분을 줄이려고 하는 것은 흔히 길가에서 보는 교통사고 다툼의 풍경이다. 몇 일 전 포스텍에선 상당히 감동적인 강연이 있었다. 최고경영자과정 입학식에 초대된 오연천 울산대 총장(전 서울대 총장)은`경제적 강자의 책임과 가치`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는데 신선한 청중들의 공감과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 그가 미국 유학시절 뉴욕에서 차충돌 사고를 본인 잘못으로 일으켰고 유학생 형편으로 마음을 졸이면서 상대방에게 다가갔을 때 상대방 신사가 한말은 “Are you OK ?”(어디 다친데 없어요?) 라는 말이었다고 한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Of course, I am OK”(물론 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