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문신이며 학자인 윤기(1741∼1826) 선생은 그의 저서 ‘무명자집, 잡기’에 인간행위의 욕망에 대해서 잘 설명하고 있다. 내용을 요약하면 인간 행위의 근본은 욕망이다.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그 마음에서부터 인간사회의 모든 관계와 행동이 시작된다. 욕망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다만 나의 욕망과 남의 욕망이 상충하는 관계망 속에서 나의 욕망이 타인에게 해를 입히지 않고 긍정적으로 발현되느냐가 중요한 문제일 뿐이다. 그런데 욕망의 기본은 갈구(渴求)다. 이 갈구가 실제와 분수를 앞서 나가다보면 사람은 마침내 자신을 자신이
조선 중기의 선비이자 재상이었던 유성룡(1542~1607) 선생의 ‘서애집(西厓集), 감사(感事)’에 ‘양을 잃었어도 우리를 고치고/ 말을 잃었어도 마구를 지을지어다./ 지난 일은 비록 어쩔 수 없지만/ 오는 일은 그래도 대처할 수 있으니.’라는 시 한 구절이 보인다. 서애 선생이 임진년(1592)의 왜란을 겪고 난 다음 해 어가를 모시고 도성으로 돌아온 뒤 지은 시의 한 구절이다. 유성룡은 수많은 인명을 앗아가고 비옥했던 강토를 초토화하게 만든 참혹했던 전화를 회고하면서 임진왜란의 원인과 배경 그리고 자신의 잘못과 조정의 실책 등
1392년 7월 17일 문무백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태조 이성계가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랐다. 500년의 고려가 끝나고, 조선의 새로운 500년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최영 장군과 정몽주 등 즉위식을 치르던 그때 이성계의 머릿속에는 그 절체절명의 순간이라든가 삶과 죽음으로 엇갈린 얼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을 것이다. 열하루 뒤인 7월 28일 새로운 국왕의 즉위를 알리는 교서가 반포되었다. ‘태조실록, 1년 7월 28일’에 ‘문무과 두 과 가운데 어느 하나는 취하고 어느 하나는 버릴 수 없다. (중략) 세 차례의 시험을 통해 합격한
프랑스어로 톨레랑스는 타인의 사상이나 행동에 대한 ‘관용’을 뜻한다. 여기에서 관용은 단순히 개인의 아량(덕)뿐 아니라 사회적인 차원과 관련되며 종교, 정치, 국가라는 연관에서 생기는 문제이기도 하다. 관용은 사회생활에서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며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하나의 ‘예(禮)’인 것이다. 여기서 도대체 예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논어’에 기록된 인상 깊은 대목은 학이(學而)편의 공자가 제자인 자공과 나눈 대화이다. 자공의 생각은 대개 사람들이 가난하고 심지가 굳지 못하면 부자나 권력 앞에서 아부하고, 부자이거나 권력을
사람이 태어나서 죽기까지 삶의 형식은 개인이 처한 환경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따라서 현대인의 생각에는 대개 부모 잘 만나 큰 고생 없이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남부러울 것 없이 살면 복된 삶이라고 여긴다. 이렇듯 복은 우리의 삶 속 깊숙이 들어와 작은 복에 만족해하기도 하고, 때로는 남의 복을 부러워하며 복 없는 팔자를 원망하기도 하며 살아간다. 요즘 우리가 말하는 복이 있고 없고는 대체로 자기 당대에서 사회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얼마나 누리고 사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또 결과로서만 부각돼 있다.지난 전통사회에서도 사람의 삶에 작용하는
고산 윤선도(1587∼1671)는 ‘고산유고, 봄의 의미에 대한 책문(對春策)’에서 ‘태극이 쪼개지고 음양이 나뉜 뒤 추위와 더위가 서로 밀어서 네 계절이 생기는데, 해는 황도의 별자리에서 운행이 끝나고 달은 열두 달 뒤 운행이 끝나서, 해와 달의 도수가 마감이 되면 한 해가 다시 시작되는데 이것을 봄이라고 한다. 봄과 관련된 날은 갑을이고, 봄의 임금은 태호(太)이며, 봄의 신은 구망(句芒)이라 한다. 봄은 무성하고 온화한 기운이 온 세상에 가득 피어 올라와 오로지 뭇 생명의 고동을 울려 만물을 이뤄 자라나게 하는 것을
문재인 정부의 민심을 사로잡고 혁신을 바라는 2기 내각 장관 후보자들의 국회 인사청문회가 끝났다. 이번 청문회 역시 여당에서는 참신하고 훌륭한 인물을 영입하였다고 내세우며 감싸는 반면, 야당에서는 그 인물의 전력을 거론하며 도덕성을 바탕으로 각종 비리를 들추어 질타하는 모습이 공수(攻守)만 바뀌었지 과거와 똑같다. 고위급 인사를 등용하기 전에 그 사람의 직무능력이나 도덕성에 문제는 없는지를 평가하는 인사청문회의 5대악이나 7대 비리는 늘 있는 일이기에 그만큼 인재 영입이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는 반증이라고도 하겠다. 그러나 훌륭한 사
충남 아산시 배방면에 ‘맹씨행단’이란 고택이 있다. 맹씨행단이란 말 그대로 맹씨가 사는 은행나무 단이 있는 집이란 뜻으로 조선 초기 세종 때 영의정으로 검소한 생활과 원칙에 철저한 학자로 명성을 높인 맹사성이 살던 곳이다. 이곳은 본래 고려 말 충절로 상징이 되는 최영 장군의 가옥이었는데, 최영과 맹사성의 할아버지와의 인연으로 맹사성은 그의 손녀사위가 됐다. 이후 맹사성이 물려받아 그의 집안이 살게 됐다.조선선비의 실천은 학행일치로 시작한다. 배운 것은 행동으로 옮길 때 의미가 있는 것이므로, 입으로 아무리 거룩한 말을 해도 그것을
서인(西人)의 반정(反正)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반금친명(反金親明) 정책이 원인이 되어 국호를 청으로 고친 후금으로부터 침략당해 남한산성에서 항전하다 패해 군신의 의를 맺는 병자호란의 치욕을 당한다. 당시 청과의 전쟁과 화의를 주장하는 척화파와 주화파의 대립 중심에는 청음과 지천이 있었다. 청음 김상헌(1570∼1652)은 조선의 역사에서 주전론(主戰論)을 바탕으로 한 척화파의 절개와 지조의 한 상징이다. 그의 82년에 걸친 긴 생애동안 왜란과 호란을 모두 겪었던 조선의 가장 험난한 격동기를 통과했음을 알려준다. 지천 최명길(15
‘30-50클럽’은 1인당 국민총소득(GNI)이 3만 달러 이상이면서 인구 오천만 명이 넘는 국가를 말하며 미국을 비롯해 한국을 포함한 7개국이다. 한국은행은 지난해 우리나라의 GNI는 3만3149달러라고 최근 발표했다. 이 3만 달러를 4인 가구로 계산하면 한 가구 당 연소득이 대충 1억3천400만원정도가 된다. 하지만 국민들의 경제적 괴리감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실제생활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현실에서 선진국 진입이라는 정부의 상징성 홍보와 통계가 결과적인 수치에만 매몰된 나머지 다양한 사실들을 외면하는 함정에 빠진 것이다.
조선 초기 문신이자 서화의 삼절(三絶)로 추앙을 받던 강희안(417∼1464)은 꽃과 나무에 대한 재배법과 이용법을 설명한 책인 ‘청천양화소록(菁川養花小錄)’을 저술했다. 이 책의 내용은 예로부터 사람들이 완상(玩賞)해온 꽃과 나무 몇 십 종을 들어 그 재배법과 이용법을 설명했으며, 또한 꽃과 나무의 품격과 그 의미와 상징성을 논하고 있다.원예나 골동품 수집 등 취미생활은 선비의 학문과 수양을 방해한다는 이른바 완물상지(玩物喪志)의 전통 때문에 원래 유교사회에서 선비들의 꽃가꾸기는 일종의 금기였다. 그러나 강희안은 양화소록 후기에서
조선 후기의 우국지사이며 학자인 황현(1855~1910) 선생은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피탈이 되자 국치를 통분하며 ‘나라가 선비를 양성한지 500년이나 됐지만 나라가 망하는 날 한 명의 선비도 스스로 죽는 자가 없으니 이 또한 슬프지 않겠는가!’라는 말과 함께 절명시(絶命詩) 4편을 남기고 9월 음독 순국해 대한제국과 함께 운명을 같이 했다. 이듬해 영·호남 선비들의 성금으로 ‘매천집’이 출간되고 한말 풍운의 역사를 담은 ‘매천야록(梅泉野錄)’은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총서 제1권으로 발간돼 한국 최근세사 연구에 귀중한
역사는 한 국가와 민족의 뿌리이며 줄기이기에 진실을 바탕으로 객관적인 사실로 기록이 돼야 한다지만, 그 진실이라는 것에 대해 시대를 달리하거나 집단이나 계층, 지역이나 개인에 따라 다양한 해석을 낳을 수 있다. 영국의 역사학자인 E. H 카(1892~1982)는 그의 저서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로 역사가가 해야 될 일은 ‘다만 진실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경험주의 지식론을 비판하며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은 역사가가 그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해야 의미를 얻는 것이다”라고 했다.중국의 진시황에
중국 송나라의 학자인 충선공 범순인(范純仁)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몹시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남을 탓하는 데에는 명석하고,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도 자신을 용서하는 데에는 흐리멍덩한 법이다. 너희가 다만 항상 남을 탓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탓하고, 자신을 용서하는 마음으로 남을 용서한다면 성현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할까 봐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라는 교훈이다.조선후기 성리학자 기정진(1798~1879) 선생의 ‘노사집(蘆沙集), 답안윤극(答安允克)’에 ‘성인의 도는 자기를 탓할지언정
율곡 이이(1536~1584)의 율곡전서(栗谷全書), 경연일기(經筵日記)에 공직자로서 표본이 되는 한 사례가 기록돼 있다. 이 일화는 명종과 선조 연간에 활동한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청백리로 선정된 인물인 이후백(1520~1578)이 이조 판서로 재직했을 때의 일이다. 내용을 살펴보면 ‘이후백이 전조(銓曹)의 장관이 되어 공론을 숭상하고 청탁을 받지 않으니 정사가 볼 만하였다. 아무리 친구라도 자주 찾아와 안부를 살피면 탐탁지 않게 여겼다’ 전조는 관리의 인사를 담당하는 기관으로 이조와 병조를 아울러 일컫는 말이다.하루는 일가 사람
공자가 주(周)나라의 태묘(太廟)인 후직의 사당을 구경하다가 쇠로 만든 사람(金人)을 보았는데 입이 세 겹으로 봉해져 있었다. 이 금인의 등에 ‘옛날에 말을 삼가던 사람이다. 경계할지어다. 말을 많이 하지 말라. 입은 화의 문이 되는 것이다. 힘을 믿고 날뛰는 자 제명에 못 죽고, 이기기를 좋아하는 자 반드시 적수를 만나게 된다. 경계해야 할 것이다’라고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금인은 주나라의 시조 후직(后稷)의 사당 오른쪽 계단에 있던 쇠로 만든 사람을 일컫는다. 이 내용을 공자는 공자가어(孔子家語) 관주(觀周)에 기록했다.조선
사람에게 망각이라는 기능이 없다면 평생 끝이 없는 슬픔과 괴로움, 번민과 수치에 시달리며 고통으로 살아갈 것이다. 잊지 말아야 할 기억을 상실하는 것도 고통인 반면 잊어야할 것을 잊지 못하는 괴로움도 큰 고통이다. 이 망각에 대한 일화가 ‘열자(列子), 주목왕(周穆王)편’에 기록되어 있다. 중국 전국시대 송나라의 화자(華子)는 건망증이 아주 심했다. 오전에 생겼던 일들을 저녁이면 잊고 저녁에 일어난 일들은 이튿날 아침이면 모두 잊었다. 온갖 방법을 다 써보았지만, 화자의 건망증은 낫지 않았다. 어느 날 노나라 선비가 찾아와 화자의
사마천의 ‘사기(史記)’에는 대략 사자성어가 600개 정도이며 여기에 속담, 격언, 명언들까지 합치면 무려 1천200여 항목에 이른다고 한다. 단순히 뜻을 함축시킨 사자성어도 있지만 고사(故事)에 기인된 ‘고사성어’는 과거의 이야기를 상황이나 감정, 사람의 심리 등을 비유적으로 함축된 내용을 묘사한 관용구이다. 예컨대 다다익선(多多益善)은 한신과 유방이 나눈 대화 중에 나온 말로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인용하면서도 뜻풀이에만 급급한 나머지 정작 여기에 얽힌 고사는 잘 모른다는 것이다. 사자성어를 뒷받침하고 있는 사실이나 역사를 바로
얇아진 달력을 보니 어김없이 또 한해가 기우는가보다. 이렇듯 해가 바뀌는 즈음에는 자기가 지나온 한해의 삶을 돌아보고 다가오는 새해의 삶을 설계한다. 사람이 사람답다는 것은 자기를 돌아보고 성찰할 줄 알기 때문이다.지난 시간에 대한 시행착오와 잘못에 대해 성찰과 반성으로 스스로를 살피고 경계한 글을 자경설(自警說)이라 한다. 조선중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고봉 기대승(1527∼1572)의 ‘고봉집’에 실린 ‘자경설’을 통해 한해를 마무리지어본다. ‘옛 사람들은 지난 허물을 자책하여 스스로 경계한 것은 대체로 잘못을 마음 아파하고 앞으로
자녀가 독립하여 집을 떠난 뒤에 부모나 양육자가 경험하는 외로움과 상실감으로 인한 슬픔을 ‘빈둥지증후군’ 또는 ‘공소증후군(空巢症候群)’이라 한다. 태어나서 성인이 되면 부모로부터 독립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현상이나 자녀가 둥지에서 떠나는 것은 부모의 삶이 완전히 재조정되도록 만들기 때문에 부모 입장에서는 목표상실과 우울을 경험할 수 있다. 현재 우리사회는 성인이 된 자녀들의 독립 시기가 점점 늦어지고 있다. 또한 결혼 후 어머니에게 자녀의 양육을 의존하는 등 한 집에서 같이 살지는 않더라도 실질적인 독립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이러한 이유로 ‘캥거루족’이니 ‘연어족’이니 하는 신조어까지 생겨났다.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명문장가인 사숙재 강희맹은 자식교육이 특별하였다. 성종의 명에 따라 서거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