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요한 20,19-31) 토마스 사도는 요한 복음 20, 19- 31에서 “직접 보고, 손가락을 넣어보아야 믿겠다”고 말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아주 많다. 하지만 증거를 확인한 다음에는 구태여 믿을 필요가 없다. 토마스 사도처럼 “내 눈으로 봐야 믿겠다”고 말하는 이웃들에게 우리가 눈에 보이는 증거를 댈 수는 없지만, 보지 않고도 믿어서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우리의 행복은 드러내 줄 수 있다. 세상에 무슨 변고가 일어나도 이 행복을 건드릴 수는 없다. 그냥 만두, 칼국수보다는 `손`이라는 단어가 추가됨으로써 느껴지는 아련한 감정, 그것은 아마도 손끝으로만 쏟아 부을 수 있는 사랑과 정성의 맛이 배여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예물을 드리는 성도는 “이것이 어떻게 쓰일 것인가?”에 대해 먼저 관심 갖지 말고 받으실 그 분에 대한 경배와 사랑이 봉헌의 모든 마음을 휘감아야 한다. 하나님은 그렇게 모아진 예물이 어디에 사용되어야 하는지도 분명하게 가르쳐 주신다. 첫째, 레위인을 비롯해 성전 제사장들의 생계를 위해 사용하라는 것이다. 십일조, 토지의 맏물, 화제물 등은 하나님 외에 기업이 없는 레위 사람 제사장과 레위의 온 지파는 이스라엘 중에 분깃도 없고 기업도 없을지니 그들은 여호와의 화제물과 그 기업을 먹을 것이라 했다.(신명기 18장1절) 오늘날로 치면 교회를 풀타임 혹은 파트타임으로 섬기는 사역자들의 생활을 위해 재정을 사용하라는 말씀이다. 둘째, 가난한 자, 고아와 과부, 나그네 등 사회적 약자의 구제와 복지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요한 복음 20, 19-31의 주제는 신앙과 불신앙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결코 믿지 못하겠다던 토마스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는 마침내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믿음을 고백합니다. 신앙과 불신앙의 주제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고 또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의 깊게 살펴야 할 것은 오늘날의 불신앙은 매우 다양한 모습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첫째, 무관심입니다. 오늘날의 불신앙은 “나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라는 명백히 부정적인 의사표명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싸늘한 무관심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무관심은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그리스도교적 가치와 실천이 아무런 매력을 가지지 못하고 그 어떤 관심도 끌지 못한다는 것입니
복음(福音)이란 복 복(福)자 소리 음(音)자, 복된 소리 즉 기쁜소식입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 완전히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이며 죽음은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나는 죄를 짓지 않았는데 내가 왜 죄인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상놈 아들 상놈, 상놈 손자 상놈입니다. 상놈 족보에서는 양반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검둥이 아들 검둥이, 검둥이 손자 검둥이입니다. 검둥이 족보에서 흰둥이가 나올 수 없습니다. 인류의 가장 첫 번째 조상인 아담은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고 죄인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죄인 아들 죄인, 죄인 손자 죄인…. 아담의 족보에서는 자손만대로 죄인만 태어납니다. 의인이 나올 수 없습니다. 아니, 그러면 이렇게 착하게 살아온 나도 죄
금호성당 주임으로 있을 때다. 학생들 중에 토요일 교리시간보다 일찍 오는 학생들이 사무실에 와서 물을 찾습니다. 어떤 물을 찾느냐고 했더니, “생수”라고, 가게에서 파는 병에 담긴 먹는 물을 찾습니다. 그래서“수도가 바로 옆에 있는데”라고 했더니 한 아이가 “신부님 수돗물을 어떻게 먹어요?” 합니다. 속으로 `어떻게 먹긴, 입으로 먹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인체의 70%가 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물이 없으면 생명을 유지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중요하다 보니 수돗물은 불안해서 못 먹고 가게에서 파는 생수만 사다 먹는 모양입니다. 통계적으로 사람은 하루 1리터 정도의 물을 먹는다고 합니다. 1년 365리터, 10년이면 3천650리터, 평균 70세를 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은 무엇으로 만들어지는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들어진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육받고 성장한 사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으로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대하느냐는 굉장히 중요하다. 먼저 말씀의 권위를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들려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심령을 통과한 사람들은 무릎을 꿇고 회개한다. 말씀을 피하는 사람들은 그 말씀이 자신의 가슴을 찌를 때 돌로 치고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다. 죄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 하거나 순종에 부족한 것이 죄다.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에서 한 달란트 받은 자는 빗나간 줄 몰랐다. 한 달란트를 받았던 자는 주인에게 “약하고 게으
신앙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믿고 따르며 살아가고자 노력하면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떻습니까? 말뿐인 신앙이 되는 경우도 있고 실천이 없는 믿음이 되기도 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 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리고 내가 어느 정도 잘 실천하고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누군가가 알아봐주길 바라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루카 17,5-10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부족한 우리들의 모습에 진정으로 주님을 믿고 따르는 길을 직접적으로 알려주십니다. 그것은 첫째, 주님을 전적으로 믿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주님만을 바라고 살아갔던 제자들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으면 못할 것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바로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말뿐인 신앙, 실천 없는
10년도 더 전에 어느 지방의 본당 신부를 할 때의 일입니다. 겨울의 어느 주일날 새벽 미사 시간이었습니다. 강론을 끝냈는데 처음 보는 교우 몇분이 들어오셨습니다. 저는 미사를 드리며 늦게 들어오신 그분들을 보았습니다. 영성체 시간이 되어 그분들이 제 앞에 오셨습니다. 성체를 모시려는 그분에게 “늦게 오셔서 성체를 드릴 수 없습니다.” 라고 부드럽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제자리로 돌아와 미사를 마쳤습니다. 늘 하던 대로 문 뒤에 서서 인사를 드리는데 그분들이 제게 다가와서 왜 성체를 못 모시게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늦게 오셔서 그렇다고 말씀드리자 그분들이 그렇게 많이 늦은 것도 아니고 객지에 와서 겨우 성당을 물어서 찾아 왔는데 이제 어디에 가서 또 미사를 드리느냐고 하면서 아주 서운해 하시며
여러 본당을 다니다보면 많은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이 많은가에 따라서 본당의 분위기도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끊임없이 지난 일들을 끄집어내어 다른 사람의 잘못을 고발하고, 비방하고 험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본당의 모든 행사에도 소극적이며 늘 불만에 가득 차 있습니다. 반면에 가능하면 상대방의 장점을 이야기하면서 상대방의 허물을 덮어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본당 일에도 적극적이며, 말보다는 행동으로 동참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부류에 속합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일미사에 열심히 참여하면서 상대방을 배려하며 본당의 모든 행사에 열심히 참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
베드로와 요한은 제9시에 기도하러 성전으로 올라갔다. 나면서 걷지 못하는 자가 구걸 할 때, 베드로와 요한은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고 하면서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일어나 걸으라고 하면서 그의 손을 잡아 일으키니 일어나 걸었다. 이들에게는 없었던 것과 있었던 것이 무엇인가? 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은과 금은 없었다. 세상 사람들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은과 금이 없었다. 즉 돈이 없었다. 베드로는 마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전도하실 때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다.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말씀하고 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2011년, 우리는 교구 설정 100주년을 기념하여, `새 시대의 복음화`를 실천할 것을 다짐하며, 주님의 이 말씀을 함께 기억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이 시대에 주님의 모습을 보지도, 그분의 음성을 듣지도 못한 이들에게,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주님의 뜻을 전하라는 주님의 간절한 부르심이었고, 우리 모든 교구민들은 그 부르심에 기꺼이 실천하는 삶으로 응답할 것을 다짐하였습니다.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이웃`의 사전적 의미는 `가까이 있는 사람 또는 사물`을 가리킵니다.`이웃`의 복음적 의미는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이렇듯, `이웃`은 `가까이 가서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고, `자비를 베풀기 위해 가까이 가는 사람`입니다. “
스승이신 예수께서는 떠돌이셨다. 방랑벽이 있어서도 아니요, 거릿귀신이 들어서도 아니다. 애초부터 임마누엘, 곧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시기 때문이었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시간과 장소를 따지지 않고 찾아가셨다. 말 그대로 종횡무진, 신출귀몰, 머리 누일 곳도 없이 곳곳을 다니시면서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셨다. 혼인 잔치에 가셔서 흥을 돋워주시고, 아들을 잃은 과부와 오빠를 여읜 누이의 눈물 젖은 상갓집에 나타나셔서 재회의 기쁨을 안겨 주기도 하셨다. 어두운 밤 풍랑을 헤치고 제자들을 찾아오시는가 하면 아침부터 제자들과 생선을 잡수시기도 했다. 그분은 기쁜 소식을 전하고 아픈 이를 고치며 마귀 들린 이에게 제정신을 찾아주시러 사방팔방을 다니셨다. 공생활 내내 돌아
요한복음은 네 개의 복음서 중에서 가장 단순하다. 그러나 가장 깊고 오묘한 진리를 담고 있다. 그것도 그럴 것이 다른 세 개의 복음서가 예수님의 실제 삶과 메시지가 초점을 맞추고 있는 반면,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삶에 담긴 영적 비밀을 캐내는데 모든 힘을 쏟고 있기 때문이다. 커튼 뒤에 가려진 비밀한 세계를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그 영적 비밀은 이 땅에 오신 인간 나사렛 예수가 사실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요한복음의 대주제는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다”하는 것이다. 요한은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하나님을 묘사하고 있다. 마치 바람처럼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고 다만 피부로 느낄 수만 있는 그분을 묘사하기에 어렵다. 반면에 요한복음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 그 분과
신앙인이 비신앙인보다 5~6년 더 오래 산다고 합니다. 또 병원에 있는 환자도 신앙인이 비신앙인보다 훨씬 빨리 낫는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신앙인은 희망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낫는다는 희망, 지금은 고통스럽지만 고통이 없는 기쁨이 가득한 것에 대한 희망, 영원한 행복에 대한 희망이 있기 때문에 신앙인들은 어렵고 힘들어도 스트레스를 덜 받고 잘 견뎌 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희망이 있다면 지금 힘들어도 이겨낼 힘이 나고 행복한 것입니다. 시인 도종환씨도 자신의 시 `암병동`에서 “희망이 있는 싸움은 행복하여라. 온 세상이 암울한 어둠뿐 일 때도 우리는 온몸 던져 싸우거늘 희망이 있는 싸움은 진실로 행복하여라”하고 말합니다. 사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의 그릇된 가치, 부정, 부
우리 말에서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을 가리켜 총명(聰明)하다고 한다. 이것은 귀로 듣고(聰) 눈으로 보는 일(明)이 제대로 되는 것, 다시 말해서 귀가 밝고 눈이 잘 보이는 상태를 뜻한다. 그만큼 인간의 다섯 가지 감각기능 중에서도 듣는 일과 보는 일이 가장 대표적인 기능임을 말해 준다. 그런데 성서에서는 흔히 “듣는다.”는 말로써 하느님께 대한 간접 경험을 가르치고, “본다”는 말로써 그분께 대한 직접 체험을 지칭한다. 오직 현세적 유익과 육신 삶의 즐거움과 편안함을 위한 것만을 추구하는 제자들은 더 이상 `들을 수도` `볼 수도` 없는 위기의 순간을 맞이한다. 무릇 신앙이란 상대방을 향해 마음을 여는 것인데 듣지도 보지도 못한다면 마음을 열수가 없다. 이제 그 분의 말씀은 더 이상 생명의 말씀이 아니
“트위터”(Twitter)는 “What are you doing?”(지금 뭐하노?)이라고 적혀있는 빈 공간에 140자 이내의 짧은 글들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이다. 그 모양이 참새가 쉴 새 없이 재잘거리는 것 같아 “트위터”(재잘거림)라고 한다. 스마트폰 덕분에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사람에게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서로 재잘거릴 수 있으며, 나의 재잘거림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질 때마다 외롭지 않고 즐겁다. 마침내는 같은 것을 원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무리를 이루어 요구하고 힘을 과시한다. 이 트위터가 오바마 대통령의 당선에 영향을 줬다고도 하고 한국의 정치에도 큰 변동을 일으켰다고도 한다. 어떻든 사람들은 사람들과 재잘거리고 싶어 한다. 하느님께서 보시기에도 아담이 외로워 보여서 하와를 창조했다고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예수님께서는“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구약시대에는 지켜야할 율법이 무려 613가지나 있었습니다. 오늘날 발전된 사회에서 각 나라가 만든 수많은 법보다는 턱없이 적은 숫자이긴 하지만 백성들의 생활을 규제하기에는 충분히 많은 수의 법규들입니다. 그리고 율법의 준수만이 충실한 백성의 판단기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이러한 생각은 그들에게 오히려 엄청난 무게의 족쇄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가
어렸을 적 학교 숙제 때문에 가슴 앓이 해 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부모님 말씀대로 초저녁에 숙제부터 일찍 해놓고 놀면, 놀아도 아주 재미있게 놀 수 있지만, 저녁먹고 나중에 해야지 하고 숙제를 미루다 보면 밤은 점점 더 깊어가고 숙제를 안하고 내일 학교 가서 선생님에게 혼날 걸 생각하면 얼굴에 수심이 가득차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도 숙제가 있습니다. 결혼하는 숙제, 자식 잘 키워야 하는 숙제, 그래도 남부럽지 않게 잘 살아야 하는 숙제, 노후대책의 숙제 등등. 그러나 이런 숙제들은 인생을 성실하게 살고, 부부간에 힘을 합하면 얼마든지 잘 해결 할 수 있는 숙제들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아무리 애쓰고 힘을 모아도 결코 해결 할 수 없는 마지막 숙제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슨 숙제이겠습니까?
“관심이 가는 일에는 누구나 신경을 쓰고, 시간과 돈을 투자하며 보람을 기대합니다. 그와 반대로 마지못해 하는 일에는 그저 모양이나 낼 뿐, 마음을 기울여 애쓰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상급, 우리 삶의 이유이자 목적인 영원한 생명을 우리는 얼마나 고대하고 있습니까? 지금 내 마음이 가 있는 데가 어디입니까”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약속을 한다. 약속은 장래의 일을 상대방과 미리 정하여 어기지 않을 것을 다짐한다는 말이다. 하느님께서도 사람들과 약속을 하셨다. 노아에게는 “다시는 땅을 파멸시키는 홍수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시고, 아브라함에게는 하늘의 별들만큼 많은 후손과 이집트 강에서 큰 강 곧 유프라테스 강까지 이르는 이 땅을 너의 후손에게 준다는 약속을 하셨다. 그리고 이집트에서 이스라
우리가 먹는 음식 중에 식단에 빠질 수 없는 대표적인 음식이 아마도 고추장과 된장일 것입니다. 고추장이 매콤하고 칼칼한 맛을 낸다면, 된장은 구수하면서도 토속적인 맛으로 우리 입을 달래 줍니다. 된장 예찬론자들은 된장을 `세계에서 가장 구수한 보약`이라고 자랑합니다. 혈액의 흐름을 원활하게 해 줘서 각종 성인병을 예방하고 해독 작용이 있어 술이나 담배, 중금속의 독성을 중화시켜 준다는 연구 결과도 나와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매일 된장국을 먹는 사람은 위암에 걸릴 확률이 낮다는 보고도 있었습니다. 세계 최장수국인 일본의 경우 우리의 된장과 성분이 비슷한 `미소시루`나 `낫토`를 즐겨 먹어 오래 사는 사람이 많다는 말도 있습니다. 바라기는 우리의 인생도 된장과 같은 덕스러운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