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교리 신학원에 가서 강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모두가 수도자들이었습니다. 신학교에서 신학생을 앞에 두고 강의할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수녀님들 앞에서 강의를 하려니까 쉽게 말문이 터지지 않았습니다. 2시간 강의를 힘들게 겨우 1시간에 마쳤습니다. 나중에 강의 마치고 방에 들어와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마 내가 힘들었던 이유는 수도자들 앞에 선 나의 삶이 부끄러워서였던 것 같습니다. 이미 완전한 봉헌의 삶을 살고 있는 수도자들에게 얕은 신학지식을 가지고 하느님과 신앙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부끄럽지 않으려면 가르치는 대로 정말 잘 살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신부는 죽으면 입만 천당 가고, 수도자는 죽으면 귀만 천당 가고, 평신도는 죽으면 발만 천당 간다는 말이 있
과거의 청소년들에게 학교를 다니지 않는다는 것은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큰 일로 느껴졌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실패자라는 낙인이 찍히게 될 만큼 무서운 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지금의 청소년들도 그럴까요? 이곳의 아이들을 보면 학교 밖 청소년들이 학업을 중단하는 이유가 과거와는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주로 집안 사정이나 사고, 비행 등으로 학교를 원치 않게 그만 두는 경우가 많았지만, 요즘은 학교를 그만 두고 싶으면 망설임 없이 그만둡니다. 대부분은 단순히 학교가 싫어서 그만두는 경우입니다. “학교가 싫으니 당장 그만둔다!” 과거에는 상상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었던가요.`니트(NEET)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Not Education, Employment, Training”라는 말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시어 외아들 예수님을 파견하시고, 주님의 사랑을 통하여 우리는 구원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제자가 되어 그분 사랑 안에 머물면서, 주님의 말씀을 따라 서로 사랑하고, 사랑의 열매를 맺어 갑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고 하셨습니다. 당신을 닮은 피조물! 곧 그가 바로 우리 사람입니다. 사람에게는 크게 세 가지 성향이 있습니다. 첫째는 동물성입니다. 이는 우리 안에서 본능, 생존 욕구, 이기적 욕망, 폭력 등으로 나타나고,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선택, 고마움을 모른다거나 주지 않고 갖기를 바라는 마음으로도 나타납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부정적인 방법을 쓰기도 하고, 만족하거나 포기할 줄 모르는 욕심을 드러내고 자주 남의
사람은 의지(depending)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 태어나면서부터 죽는 그 순간까지 `의지함`의 연속이다. 그래서 의지할 곳 있고, 그 의지할 곳이 든든하면 든든할수록 그 사람은 살아가는데 참 행복한 사람이다. 반대로 의지할 곳 없는 사람이 될 때, 그 때는 정말 사는 일이 막막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든든하게 의지할 곳이나 의지할 것을 찾는다. 그런데 `의지할 곳`이란 것이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중요하다. 세상이 가장 흔히 선택하고 또 권하는 바는, 사람에게 의지하거나 그것도 못미더우면 자신의 능력에만 기대어 살거나, 이도 저도 다 못 미더우면 재물이나 권력 등에 의지하며 사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의지함`이 중요하다고 하는 이유는, 대부분
2000년 9월, 세상은 온통 밀레니엄 시대라며 들썩이던 때에 군입대를 했습니다. 훈련소 생활은 상상하던 그 이상이었고, 고된 훈련과 규칙적이고 제한된 생활 속에서 지극히 일상적인 것들에 대한 소중함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시원한 물 한 모금 마시고, 여유있게 밥 먹고, 친구들과 맘껏 통화하고, 방바닥에 누워있고, 초코파이 두 개 먹는 것과 같은 당연하고 평범한 것들에 대한 감사가 절로 나왔습니다. 군대뿐만이 아니라 이상하게도 사람은 무언가 결핍되거나 잃었을 때 그 가치를 깨닫게 되는 것 같습니다. 좋아하는 사람을 잃거나 떠나보내면 그 사람의 빈자리가 보이고, 건강이 악화되면 잘 먹고 잘 걷고 하던 그때를 떠올립니다. 그 이유는 끊임없이 뭔가를 추구하고 차지하려는 욕심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미리
지난해 어느 대학 교수님의 행복에 대한 강의를 인터넷을 통해 들은 적이 있습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적당한 유머가 함께 섞인 상당히 세련된 말솜씨로 사람들을 휘어잡는구나 생각을 했습니다. 행복이 무엇인지, 어떤 데서 그것을 추구할 수 있는지, 그것을 얻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 누가 들어도 좋을 그런 강의였습니다. 강의 전체 가운데 비교적 시작 부분에서 `틀`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이야기를 진행시켜 나갔습니다.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어떤`틀`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 행복하거나 또는 행복하지 않은 것과 직접적인 관계를 가진다고 설명을 했습니다. 어떤 틀을 가지고 보고 듣고 그리고 나서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대상으로부터 행복을 느낄 수 있거나 반면에 행복하지 않은 마음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신뢰는 개방을 낳습니다. 꽁꽁 문을 닫아 놓고 살았던 사람이 사랑하는 부모님의 방문에 닫힌 문을 열어젖히듯, 평생 마음 문을 닫고 살았던 사마리아 여자는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영적 갈증에 반응해준 예수께 몸을 돌립니다. 몸을 돌리는 것은 빛을 향한다는 뜻입니다. 빛이 되신 예수님께 자신을 기꺼이 노출시키기로 결심한다는 말입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여자는 자신의 치부를 그대로 드러냅니다. 이제 빛 앞에 삶의 부끄러움, 상처, 좌절이 있는 그대로 노출되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을 변호하거나 죄를 감추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예수님을 진심으로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만남이 영혼을 교류하는 인격적인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만남을 경험해 보셨습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고 계심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 가장 큰 잘못은 하느님의 사랑을 모르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제대로 깨닫고 체험하는 것은 신앙생활의 시작이요 마침입니다.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믿을 때 그분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내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하느님은 나를 더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 때 신앙의 참된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신자들 중에는 하느님을 무서운 분, 벌주시는 분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느님과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함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지도 못하고, 그분이 주시고자 하는 영원한 생명의 삶을 누리지도 못합니다. 성경에서는 우리가 섬기
어느 곳에 인쇄소가 폭발했습니다. 그 폭발하는 와중에 종이에 활자가 마구 찍히더니 폭발 후 백과사전 한 권이 저절로 툭 만들어졌습니다. 어느 광산이 폭발했습니다. 그 와중에 나무와 시멘트와 강철이 서로 요란하게 부딪히더니 폭발 후 아파트 한 채가 만들어졌습니다. 아파트 옥상 위에 올라가서 100페이지짜리 책 한 권을 찢어서 한 장씩 날렸습니다. 그랬더니 도로 위에 질서 정연하게 한 페이지부터 차례대로 줄지어 내려앉았습니다. 물론 있을 수 없는 일들입니다. 확률은 0%입니다. 그러나 차라리 이것을 믿는 것이 낫지 하는 마음이 듭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한 번도 뒤바뀜 없이 어김없이 찾아오고, 매일 매일 해가 뜨고 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광대한 별들의 움직임을 볼
평신도로 살아간다는 것, 성직자로 살아간다는 것, 수도자로 살아간다는 것,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한 해를 돌아보는 지금, `나는 올 한 해, 하느님의 자녀임을 잊지 않고 살아왔는가?` 스스로를 돌아보게 됩니다. 고(故) 최인호씨가 이런 글을 적었습니다. “어느 날 병원 복도에서 마주친, 천사와 같은 머리 깎은 어린 환자의 눈빛을 보았을때, 나는 남몰래 눈물을 흘리면서 절규했다. 그렇다면 주님, 저 아이는 누구의 죄 때문에 아픈 것입니까? 자기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그때 주님은 내 귓가에 속삭이셨다. `자기 죄 탓도 아니고 부모의 죄탓도 아니다. 다만 저 아이에게서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요한 9,3)” 고통 중에 있을
< 상황 1 > “주일 미사에 빠지지 말고 잘 나오세요.” “고3인데요? 고3이 어떻게 성당에 가요?” “고3은 주일 미사에 나오면 안 되니?” “고3 때 공부해야 좋은 대학에 가고 인생이 편해져요.” 어느 날 우연히 만난 고3 학생과의 대화입니다. 고3은 편안한 인생을 위하여 공부만 해야지 다른 활동을 하면 안 되는 것으로 알고 있나 봅니다. 아니나 다를까 주일학교에 잘 나오던 학생들도 고3이 되면서 절반 정도만 주일미사에 나오고 있습니다. 고3은 공식적인 냉담기로 선포해야 할 판입니다. < 상황 2 > 본당 중고등부 학생회 간부 연수 중에 있었던 대화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돈입니다. 돈이 많으면 좋은 학원에서 공부할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박해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사도들은 그 어떤 박해에도 굴복하지 않고 복음을 전했다. 그 이유는 아래와 같다. 먼저 빚을 졌기 때문이다. 바울은 로마서 1장 14절에서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했다. 바울은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로마서 13장 8절)고 했다. 바울은 자신이 예수 믿게 된 사실과 과정을 복음의 빚진 자라고 보았다. 두 번째는 구원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로마서 1장 16절)고 했다. 그 복음은 유대인도 헬라인도, 믿는 모
일본 나가사키 성지 안내를 약 40번 정도 했습니다. 순례 동안 188위 복자 `바오로 우치보리`와 아들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박해 시대에 바오로는 3명의 아들을 가진 아버지였습니다. 바오로를 배교시키기 위해 관리들은 협박과 감금, 갈취와 고문을 했습니다. 바오로는 아무리 해도 배교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바오로의 아들을 잡아 와서 엄지와 새끼손가락을 제외한 모든 손가락을 아버지 바오로가 보는 앞에서 잘랐습니다. 그 중에는 5살 된 이냐시오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바오로가 배교하지 않자 관리들은 아들을 차가운 바다에 빠뜨려 죽였습니다. 아버지 바오로는 이를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끝까지 바오로는 배교하지 않았고, 큰 아들은 “이런 큰 은혜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주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 먹을 것을 내려주십니다. 탈출기 16, 2~4. 12~15를 보면, 굶주린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을 합니다. “…. 당신들은 이 무리를 모조리 굶겨 죽이려고 우리를 이 광야로 끌고 왔소?”(16, 3)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불평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에게 이렇게 일러라. `너희가 저녁 으스름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양식을 배불리 먹을 것이다.`”(16,12) “그들 위에 만나를 비처럼 내려 먹게 하시고, 하늘의 곡식을 그들에게 주셨네.”(화답송, 시편 78, 24)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서 내려주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고 매일 매일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먹을 것을 주신다는 것은 사람을 살리신다는 뜻입니다. 하느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정말 통일이 소원인가? 정말 간절히 바라는가? 하느님께서 이루어 주 실 거라고 믿는가? 기도하는가? 기도한 바를 노력하는가? 고 김수환 추기경과 젊은이들과의 대화 일부분이다. “통일을 원하느냐?” “원한다” “그 통일을 위해 우리 각자가 무엇을 해야 하나?” “묵묵부답! ? !” “지금 여기서 옆 사람과 화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라. 그리고 산길은 자꾸 다니다보면 넓고 편한 길이 되어간다.” 우리는 정치, 사회적으로만 아니라 대화를 통해 경제, 문화적 교류와 대북 지원 등의 노력을 해 오고 있다. 인식과 이해의 차이를 어렵게 극복하고, 남북 관계가 좀 진전이 되나 싶으면 으레 교류 중단이나 도발이 터진다. 그리하여 국민 정서도, 교회 내 정서도 찬반으로 갈릴 때
한 무리의 돼지 떼가 몰이꾼을 따라가는데 한 마리도 길을 벗어남이 없이 가더니 마침내 도살장 안으로 거침없이 들어갔습니다. 몰이꾼의 기술이 너무 신기해서 그 이유를 물어 보았습니다. “간단하지요 뭐, 그 놈들은 콩을 좋아하거든요. 가면서 콩을 한 움큼씩 길바닥에 뿌려 주면 나를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콩을 따라오는 거지요. 정신없이 콩만 주워 먹고 가다가 제 죽을 곳으로 가는 것도 모르지요.” 인생이란 너무나 신비에 가득 차 있으며, 아직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또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피부에 느껴지는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세상이 신비에 차 있다 함은 인간 이상의, 인간을 초월한 존재가 있다는 말입니다. 만약에 인생이 70년으로 모든 것이 끝나 버린
사랑하는 사람을 보고 있으면서도 그 사랑의 속삭임을 들을 수 없고 내 사랑을 속삭여 줄 수도 없는 상황을 우리는 벙어리 냉가슴 앓는다고 합니다. 듣고 싶어도 듣지 못하고 말하 고 싶어도 말하지 못하는, 그래서 서로 멀어져만 가는 상황이 현실에서 벌어진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지옥일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관계를 맺으려하고 외로움을 달래줄 대상을 찾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를 연결해주는 것이 대화이고 이를 통한 통교입니다. 그런데 통교를 이룰 수 없다면 그것은 가장 고통스러운 지옥일 것입니다. 마르코북음 7, 31-37에 등장하는 귀먹은반벙어리는 바로 통교를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그가 겪는 단절과 고립으로 인해서 그는 항상 벙어리 냉가슴을 앓아야 했고 지옥의 아픔을 느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고쳐주신
예수님과 제자들이 참석한 결혼 축제에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 생겼습니다. 한창 흥겨운 잔치가 진행되는 중간에 포도주가 그만 떨어졌습니다. 이는 신랑신부 측에서 볼 때는, 단순히 사건 정도가 아니라 재앙을 만난 것입니다. 물론, 손님이 생각보다 너무 많이 왔다든지 하는 다른 핑계를 댈 수는 있으나 잔치를 잔치되게 하는 중요한 촉매제가 없어졌으니 얼마나 당혹스러웠을까요? 요한은 메시아 예수님이 이 축제에 계셨는데도 이런 불상사가 생겼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우연히 들른 곳이 아니라 제자들과 함께 손님으로 초대되어 간 곳에 이런 일이 생겼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인생길이 축제의 걸음일지라도 이렇게 예기치 않은 어려움은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감당치 못할 고난으로 인해 눈물의 밤을 보낼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에서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면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체성사를 통해 당신의 모든 것을 인류구원을 위해 내어놓으셨고, 또 성체성사를 거행하는 모든 사람을 성체성사의 삶에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성체와 성혈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체성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심이며, 교회 활동의 정점입니다. 그리고 성체성혈을 받아 모시는 우리는 성체성사 안에 그리스도의 현존을 말로서 고백하는 것을 넘어서서 삶 안에서 성체성사를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체성사의 삶이란 성체성사 안에 드러나는 감사의 삶, 나눔의 삶, 증거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체성사에서는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