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슬렁어슬렁 나선 해변 산책. 인도 고아주(州)의 칼랑구트 해변은 노천카페와 몰려든 인도인 관광객들로 시끌벅적했다. 섭씨 40도를 오르내리는 날씨에 태양은 눈부시고… 맥주 한잔이 간절했다. 원로정치인 김종필은 낮술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했단다. 태양이 작렬하는 대낮의 해변 노천카페서의 맥주 한 잔은 오래오래 기억될 추억으로… 태양과 바다의 합작품 저녁놀 감상하다보면 `여기가 천국` “이봐, 낮에 마시는 한 잔의 맥주는 실로 감로수와 같은 것이야.” 그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해온 기자는 낮술 마시기에 적당한 곳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벌써부터 이번 여행을 위해 구입한 초록색 운동화 속으로 하얀 모래가 들어와 버석거렸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기차에 오른 대부분 승객들이 짐이 엄청나게 많다. 평균 4~5개씩은 돼 보였다. 아, 그렇구나. 한국에서야 기차로 여행할 수 있는 가장 긴 구간이 서울-부산이고, KTX를 탄다면 이동에 3시간이 채 안 걸린다. 하지만, 인도는 2~3일을 기차 안에 머물 수도 있으니 `살림을 통째 옮겨오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 같았다. “아, 인도는 크구나. 크고도 넓구나.” 새삼스런 깨달음이 허탈한 웃음을 불렀다. 뭄바이를 출발한 기차는 해가 저물 때까진 별문제 없이 달렸다. 브라만 아줌마와 함께 기차 안을 오가는 차이 장수를 불러 차(茶)도 마시고, 먼지와 쓰레기를 치우며 기자의 발밑을 수시로 걸레질하는 아이에게 “고맙다”며 작지만 팁도 줬다. 그 소문이 어디서
뭄바이를 향하는 비행기 안. 수천 미터 상공에서 마신 포도주 2병의 취기는 헛된 상념을 불렀다. 그 잡스런 생각을 깨뜨린 건 “곧 뭄바이 국제공항에 착륙한다”는 기내 방송이었다. “아, 드디어 인도구나.” 인천공항에서부터 4시간을 늦게 이륙한 에어인디아 항공기는 사위를 분간할 수 없는 새벽녘에 인도에 내려앉았다. 뭄바이공항은 1970년대 후반 한국의 조그만 도시 버스터미널인양 괴괴했다. 게다가 내리는 한국 사람이 거의 없었다. 한국인 한명도 없는 낯선 인도 뭄바이공항 도착 호텔로 가는 길, 수백명 노숙자들 모습에 충격과 공포 인도여행 포기하고 파리·시드니로 도망가고픈 충동도 다음날 아침 한국과 같은 일상 모습에 다시 인도 품으로 스스로 외로움을 느끼
마침내 인도행 비행기를 타는 날이 왔다. 그날 아침도 사람들은 출근버스 혹은, 전철을 기다리며 어젯밤의 숙취와 피곤이 덜 풀린 얼굴로 정류장과 플랫폼을 서성이고 있었다. `사는 게 별 게 아닌데 다들 저렇게 도살장 끌려가는 소같은 표정으로 겨우겨우 삶을 견디고 있구나`라는 것에 생각이 이르자 괜히 쓸쓸해졌다. 동시에 이성복(1952~) 시 `그날`의 몇 구절이 떠올랐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그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날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초등학교 6학년 때쯤으로 기억된다. 엄마를 따라 놀러간 경상남도 삼랑진 작은 마을에서 외갓집 구들장을 해체하는 작업을 우연찮게 지켜봤다. 1983년 혹은, 1984년 무렵이다. 황토와 볏짚으로 잘 반죽한 단단한 흙덩이들이 몇 번의 곡괭이질과 삽질에 맨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말 그대로 무너지는 흙바닥. 묵은 먼지가 공중으로 비산했다. 콩나물해장국의 감칠맛을 위해 할머니의 손바닥에서 “바스락” 부서지던 새빨간 마른고추 분말처럼. 시간을 뛰어넘는 타임머신 타 듯 `옛날식 정취` 찾아 떠난 인도 큰 땅덩어리·낙후된 교통수단 마음·욕심 다 비우고 거대한 인도여행을 시작하다 외가는 엄마가 멀고 먼 바닷가 도시로 시집가기 전 23년 하고도 몇 개월을 더 머문 곳이다. 그 구들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나면 가방 몫으로 낸 차비(1유로)가 아깝지 않을 것”이라는 열 살 꼬마 차장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동양의 산수화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 장엄한 산이 곳곳에 자리를 잡고, 그 아래로 투명한 계곡물이 청아한 소리를 내며 흘러가는 몬테네그로의 풍광은 여행자를 부드럽게 압도한다. 이끼 낀 성벽 품은 절경의 돌산 고급 요트와 크루즈선박 풍경 뒤 깨진 유리창과 폐건물이 방치 오랜 식민지·큰 지진까지 낭만과 폐허, 아름다움과 슬픔이 공존하는 코토르의 추억 코토르와 부드바의 해변 역시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멋들어진 백사장과 짙푸른 물빛을 태양 아래 드러내며 관광객들의 탄성을 불렀다. 수평선 근처에 기기묘묘한 모양을 하고 선 기암괴석도 장관이었다.
아드리아해(海)가 아름답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재론의 여지도 없다. 푸른색 잉크 수 만 병을 흩뿌려놓은 듯한 사파이어빛 바다. 그 바다와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오래된 도시의 붉은색 지붕들. 이 배경에 빠질 수 없는 양념처럼 등장하는 웅장한 석조 고성(古城)들.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와 스플리트, 이탈리아의 아말피와 포지타노... 남부와 동부 유럽이 아름다울 수 있는 이유의 절반은 아드리아 바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자의 생각에 고개 끄덕여 동의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이탈리아 포지타노의 깎아지른 절벽에서 동쪽으로 바라보는 아드리아해의 시끌벅적함도 흥겹고, 크로아티아의 중세도시 혹은, 쪽빛 물결 춤추는 흐바르(Hvar)섬에서 만나는 아드리아해 서쪽은 관광객이
마음속에 웅크리고 숨어 있던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 고요한 강변 풍경, 끝없이 이어지는 고적한 황톳길, 하늘로 날아오를 듯한 양식으로 축조된 불교사원의 지붕, 방치된 듯 버려졌지만 그 안에 수천 가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고대의 유적들… 라오스의 풍광은 아름답다. 하지만, 그것들보다 더 아름다운 건 라오스의 사람들이다. 그래서,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기자가 만난 라오스 사람들의 이야기를. 여행을 하다보면 현지인 친구가 생긴다. 특정 도시에 오래 머물 경우 그 가능성은 더 커진다. 1주일을 같은 숙소에서 머문 루앙프라방에서도 몇몇 친구들이 생겼다. 그중 한 청년은 한국인이 교수로 와 있는 대학에서 영어를 배운다고 했다. 인터넷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친군데 싹싹하고 예의를 지킬줄 알았다. 나
지난 회에 이어 다시 라오스 `슬로우 보트` 이야기다. 표현이야 근사하게 `슬로우 보트`지만, 사실 루앙프라방에서 출발해 태국 치앙콩 국경을 넘는 배는 낡고 조악한 목조 통통배에 불과하다. 제대로 된 식당시설은 물론이거니와 프라이버시를 보장하는 화장실조차 없다. 대형 유람선의 음악 감상과 영화 상영? 꿈같은 소리다. 자칫 심심할 수 있는 이 여행의 말벗이 돼준 이들이 태국 여성 핌(pim)과 팜(pam)이다. 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직장생활을 10년쯤 하다가 가족과 친구가 있는 제 나라로 돌아온 30대 중반 여성 둘. 몇 해 전엔 핌이, 작년엔 팜이 한국을 찾았고 둘과의 해후는 다른 어떤 사람들과의 재회보다 반가웠다. 아래는 그 반가움의 이유다. 2박3일간의 `장대한 국경
기자가 처음으로 라오스를 찾았던 해는 2007년이다. `지구에서 가장 조용한 수도`로 불리는 비엔티안에서 사흘, `파티`와 `급류 타기` 덕택에 아시아보다 유럽에서 더 유명한 강변마을 방비엔에서 사흘을 보냈다. 채 일주일에 미치지 못하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 여행은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 그래서였다. 몇 년이 흐른 후 다시 라오스를 찾았다. 그때는 이전 여행보다 2배의 기간인 보름을 머물렀다. 조용하고, 선량하며, 부끄러움 많은 사람들이 사는 라오스. 두 번째 방문에선 라오스 북부를 여행했다. 고풍스럽고 매혹적인 도시 루앙프라방. 새벽마다 일찍 일어나 시주를 받으러 다니는 어린 스님들에게 과자와 찰밥을 나눠주는 재미에 빠져 6일을 머물다가 무비자 여행기간 만료가 임박해서야 국경을
“이탈리아는 미남들이 사는 국가”라는 이야기는 한국을 포함한 동양 전역에 퍼져있는 풍문이다. 기자 역시 귀를 가졌으니, 그 말을 듣지 못했을 까닭이 없다. 그러나, 이건 뭐지? 남부 항구 바리에서 출발한 기차가 숨을 헐떡이며 달린 끝에 나폴리역에 도착했다. 그런데, 구걸로 삶을 이어가는 동냥아치도 패션쇼 무대 위에 선 모델처럼 잘 생겼다는 이탈리아 남자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 역 근처엔 기념품과 싸구려 바지와 셔츠를 파는 검은 얼굴의 사람들 뿐. 미남은 어디에도 흔적이 없었다. 절벽끼고 위태롭게 달리는 낡은 버스, 두려움도 잊게만든 아름다운 풍경 톰 크루즈보다 잘생긴 포지타노 식당 웨이터의 `이탈리아식 낭만` 정겨워 이탈리아 북부와 남부는 경제발전의 차이가 전혀 다른 별개
본격적인 이탈리아 여행기에 앞서 먼저 에피소드 하나. 남들이 잘 가지 않는 길을 통해 이탈리아에 입국하기로 결심했다. 알바니아에서 배를 타고 아드리아해를 건너 `미남들의 나라` 이탈리아로 가는 길. 그러려면 먼저 알바니아 항구의 세관과 출입국사무소를 거쳐야 했다. 한국선 `노안`으로 통하는 기자를 스무살이나 어리게 본 알바니아 세관 영어가 불통인 이탈리아서 만난 흑인의 깨끗한 친절… 영화 속 편견 깨 총이나 마약 등의 위험한 물건이 없으니 세관은 당연지사 무사통과. 문제는 출입국사무소에서 일어났다. 20대 중반으로 추정되는 여직원이 기자의 여권을 유심히 살폈다. 그러더니, 묻는다. “이게 정말 당신 여권인가?” 답했다. “사진을 보면 알지 않느냐. 내게 맞다.” 그랬더니 돌아온
한국은 거주하는 사람의 숫자가 5천100만 명에 이르는 인구밀집형 국가다. 반면 슬로베니아는 인구가 한국의 1/25 수준인 200만 명에 불과한 나라. 1990년대 초반 유고슬라비아연방에서 독립한 이 나라의 생소한 이름이 우리들에게 익숙해진 건 지극히 `문화예술적`이다. 2000년대 초반. `이상 현상`으로까지 불리던 파울로 코엘료 열풍. `연금술사` 이후 이어진 이 브라질 소설가에 관한 한국 독자들의 사랑은 작품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동반했다. 소설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무대로 유명세 자동차도, 네온사인도 없이 조용하고 평온한 도시 거리 곳곳 용의 조형물과 분수대… 동화 속 같아 바로 그즈음 제목부터가 흥미를 끄는 코엘료의 소설이 번역·출간된다.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
남부 사이공에서 출발한 베트남 기차여행. 종단열차의 북부 종착역인 하노이에 내렸을 때는 새벽이었다. 남태평양에서 발생한 쓰나미와 일본을 뒤흔든 지진으로 세계가 시끄러웠던 시기. 기상이변이 이어졌다. 하노이 날씨가 한국의 초겨울처럼 추웠다. “이런 날씨를 겪기는 처음”이라며 고개를 흔드는 현지인들. 그때 기자가 가진 옷이라곤 반팔 티셔츠와 반바지가 전부. 시장으로 가서 실로 뜬 점퍼를 15달러에 샀다. 그걸 껴입고, 긴 바지를 사 입었는데도 춥다. 하노이에 도착하기 전 여행했던 나라는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 영상 30도 이상의 지역에 있다가, 궂은비 추적대는 날씨를 버티려니 죽을 맛이었다. 현지에서 먹는 베트남 쌀국수, 가격 싸고 맛도 일품 하롱베이 근사한 기암괴석 사이를
누구나 한 번쯤은 읽었을 중국의 고전 . 거기 등장하는 이야기 중 하나가 칠금맹획(七擒孟獲)의 고사(故事)다. 이는 `맹획이란 장수를 일곱 번 사로잡다`쯤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그 에피소드를 요약하면 이렇다. 촉나라 승상 제갈공명이 `남쪽 오랑캐`(남만·南蠻)`를 정벌한다는 이유로 지금의 베트남 일대를 침략한다. 당시 남만의 지배자는 맹획. 무시무시한 완력과 배짱으로 이름 높았던 장수다. 제갈공명의 군대에게 일곱 번 사로잡혀 일곱 번의 고초를 겪었음에도 맹획은 “항복하겠다”란 말을 하지 않았다. 이 이야기를 통해 중국은 제갈공명의 아량과 상대를 압도하는 전략을 보여주고 싶었겠지만,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자. 불리한 전쟁에서 생포된 장수가 일곱 번을 다시 목숨 걸어 싸우고, 또 싸우는
인도차이나반도를 떠도는 배낭여행자에게 호치민과 메콩강의 나라 베트남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비행기를 타고 태국 방콕에 도착해 구절양장 비포장길을 달려 캄보디아 프놈펜을 거쳐 통통거리는 쪽배를 타고 국경을 넘었다. 마침내 도착한 베트남의 한적한 시골 마을 쩌우독. 햇살이 눈부신 봄날이었다. 거기서 다시 버스와 배를 타고 베트남의 경제중심지 사이공까지 가는 데는 한나절이 더 걸렸다. 취향의 문제겠지만, 기자는 버스보다는 배, 배보다는 기차를 통한 여행을 선호해왔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만큼이나 유명한 베트남 종단열차를 타고 남부 사이공에서 북부 종착지 하노이까지 달려보고 싶었다. 야간·전세버스 관광 인프라 편리 호텔·게스트하우스 가격도 저렴 남중국해 푸른 파도 바라보며 맥주 마시는 기
한국이라면 아직 쌀쌀함이 남아있을 3월 초순. 캄보디아의 한낮 기온은 섭씨 40도를 오르내린다. 과장이 아니다. 실제로 숨이 턱턱 막혀오는 날씨. 아스팔트가 깔린 도로가 많지 않은 나라지만, 흙길 역시 햇볕에 달궈져 프라이팬처럼 뜨겁다. 포장된 대낮의 아스팔트길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맨살이 닿으면 화상을 입는다. 크메르어로 웅얼거리는 주문같은 축원 “신의 은혜로 행복 누리길”… 경건함 느껴 그 길 위를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맨발로 걷는 캄보디아의 어린 스님들. 소승불교 전통의 캄보디아에선 시주를 청하러 다니는 수도승들이 많다. 인접국이며 비슷한 종교양식을 지닌 라오스의 `새벽 탁발`은 세계적으로 잘 알려져 있고, 외국인이 시주에 참여하기도 한다. 라오스 서북부에 자리한 조용한 마을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힘든 빛깔의 돌 수백만 개가 이뤄놓은 웅장한 과거의 흔적. 비단 앙코르와트가 아니어도 좋다. 인근 앙코르톰이나 바이욘사원에서 여행자들 틈에 끼어 세상사 고민을 잠시 잊고 일출을 기다리는 건 가슴 설레는 경험이다. 동쪽에서 시작된 태양의 꿈틀거림이 사원의 성벽을 발갛게 물들일 때면 우리는 깨닫게 된다. 앙코르 유적은 1000년 전 크메르인들이 자신들의 도시를 찾을 미래의 불특정다수를 위해 축조한 장엄한 선물이라는 사실을. 1천년 전 크메르인의 장엄한 유적 일상의 감각·시간도 잠시 잊어 맨발의 어린 동승 축원 들으면 해탈은 법당이 아닌 길 위인 듯 일몰 또한 일출의 감동과 다를 바 없다. 높은 기온과 눅눅한 습기에 셔츠가 젖도록 땀을 흘리며 시엠립 곳곳에 자
온종일 붉은색 흙먼지가 날리는 비포장도로, 인간의 심장을 설렘으로 뛰게 만드는 붉은색 일출과 일몰, 그 나라의 흙빛 또는, 석양빛처럼 불그레하게 달아오른 사람들의 얼굴…. 프놈펜에서 시엠립까지 버스길은 한국의 70년대 농촌풍경 연상케 대평원과 야자수, 스콜까지 더하면 바쁜 일상을 벗어난 `낭만의 절정` 앙코르와트와 앙코르톰의 도시 캄보디아 시엠립을 추억할 때면 잇따라 떠오르는 이미지들이다. 2011년 봄. 수도 프놈펜에서 시엠립으로 향하는 낡은 버스. 비현실적으로 커다란 태양이 무인지경의 막막한 지평선 너머로 떨어지는 모습을 봤다. 그날 이후 기자에게 캄보디아와 앙코르와트는 `거대한 붉은색 낙인`으로 새겨졌다. 불과 40여 년 전 기억의 저편. 이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농촌공동체적 사회
결혼을 하지 못한 기자는 아이가 없다. 그렇지만 세상 모든 아이가 귀엽고 예쁘고 소중하게 느껴지는 건 기혼자와 다르지 않다. 한국의 아이들은 물론이고, 유럽과 동남아시아, 중동의 아이들 모두가 마찬가지다. “히잡이 번거롭고 귀찮아요” 대담한 이란 소녀들 수줍은 표정으로 사진을 찍고 이별을 슬퍼하는 아이들 `위험한 나라 속 아이들` 천진한 눈망울 잊지못해 맑은 빛으로 반짝이는 그네들의 눈동자 속에는 세상사 때 묻은 탁함이 보이지 않는다. 때로는 그 눈망울이 혼탁한 세계에서 지리멸렬하게 살아가는 기자를 가르친다. 선인들의 말처럼 아이는 어른의 스승이다. 이란과 러시아 사이에 자리한 카스피해는 지구 위에서 가장 큰 호수다. 규모로 보자면 호수라기보다는 바다에 가깝다. 바로 그 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