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금봉산(金鳳山) 자락에 석종사라는 절이 있다. 그리 멀지 않지만 내게는 낯설고 생경스러운 도시를 혜국 스님의 말씀 하나 잡고 찾아 나선다. 휴일이 무색할 정도로 고속도로는 한산한데 두어 시간 만에 도착한 석종사에는 뜻밖에 봄기운이 완연하다.일주문을 지나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상선약수’를 문패처럼 내건 곳에 넓은 주차장이 자리하고 있다. 과거 죽장사라는 절이 있던 폐사지를 봉암사에서 수행하던 혜국 스님이 현몽을 꾼 뒤 찾아와 석종사를 세웠다. 스님은 갈 곳 없는 연로한 스님들과, 이들의 외로움을 덜어 주기 위해 부모 없는 아
올 겨울은 큰 추위 없이 그럭저럭 보냈다. 하지만 끄트머리에서 만난 복병은 위협적으로 우리를 흔들고 있다. 저만치서 창백한 모습으로 주춤거리는 봄을 위해 전원의 삼월은 어김없이 분주하다.텃밭 한쪽에는 상추며 파가 얼어붙었던 계절을 견디고 용케도 살아남았다. 여린 잎채소의 겨울나기처럼 모두가 건강하게 기지개를 켰으면 좋겠다. 긴 겨울이 때가 되면 물러나듯 이 어려움도 머지않아 지나가리라.불안함 속에서도 마음의 근력이 생겨 제법 초연해져 온다. 제2 석굴암을 찾아가는 발걸음은 한결 가볍다. 팔공산 계곡, 천연 절벽 동굴에 만들어진 통일
절을 찾아나서는 발걸음이 편하지가 않다. 들리는 소식이라곤 ‘코로나 19’ 확진자 증가수와 그들의 동선에 관한 이야기뿐이다. 불안한 마음으로 팔공산 뒤편, 산 중턱에 자리 잡은 불굴사로 향한다.불굴사는 은해사의 말사로 신라 신문왕 10년(690년) 원효대사가 정진하여 득도한 곳에 암자를 세운 게 시초가 되었다. 한 때는 50여 동의 전각과 12개의 부속 암자, 8대의 물레방아로 쌀을 찧어 승려와 신도들의 공양미를 해결한 대사찰이었다고 한다. 소문난 기도 도량으로 알려진 절이지만 초행길이다.썰렁한 절집에 혼자 들어설 거라 예상했는데
상큼한 겨울날, 반쯤의 물만 채운 오어호는 공사중이다. 호수를 가로지르는 흔들다리나 오어사의 아침 풍경은 등산객들로 어수선하다. 그들의 한량없이 가벼운 웃음과 대화들이 내 귀를 자극한다. 그들에게 오어사는 그냥 스쳐지나가는 길목에 있을 뿐이다. 개발의 편리함이 빚어낸 풍경을 나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옛날의 오어사를 자꾸만 그리워한다.운제산은 신라사성(新羅四聖)으로 불리는 자장, 의상, 원효, 혜공이 수도한 명산이다. 오어사를 중심으로 골짜기에 아늑하게 자리 잡은 원효암, 가파른 바위산에 아슬아슬하게 자리잡은 자장암, 두 암자의
햇살을 동무삼아 도성암까지 걷기로 했다. 굽이굽이 비슬산을 감고 오르는 콘크리트길을 한 시간 가량 걸으면 비슬산 최고의 참선도량, ‘천인득도지(千人得道地)’로 불리는 도성암이 나온다. 저마다 다른 수피의 나목들이 인사를 건네 오는데 나무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해 사진을 찍고 눈을 맞춘다. 청량한 기운이 온몸으로 퍼지는 행복한 산행이다.남편은 목적지를 향해 성큼성큼 앞서 걷고 나는 겨울 산의 매력에 빠져 엉뚱한 짓을 하느라 시간을 지체한다. 그런 나를 재촉하거나 책망하지 않고 남편은 한 번씩 뒤돌아보고 기다려 준다. 우리는 서로를 인정
인적 없는 분황사에 겨울비가 내린다. 나무들의 젖은 손짓이 기도하듯 평화로운 날, 명절 연휴의 분황사는 더없이 적막하고 스산하다. 비는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고 하염없이 내린다. 그 너른 주차장은 텅 비어 있다.불국사의 말사로 신라 선덕여왕 3년(634년)에 창건된 분황사는 선덕여왕의 숨결이 살아 있는 절이다. 여왕이 즉위할 때 당나라 태종이 모란꽃 그림을 선물하자, 벌과 나비가 없는 것을 보고 향기 없는 꽃임을 눈치 챈 후, 당 태종이 자신을 조롱하는 것에 빗대어 향기 나는(芬) 황제(皇)의 절(寺)이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날씨
첫눈이 내린다. 잔디밭에도 집 앞 상수리나무 가지에도 하얗게 눈이 내린다. 전원을 적시는 설경을 사진에 담아 친구에게 보냈다. 며칠 간의 해외 연수로 잠은 설쳤다던 그녀가 푸석한 목소리로 절에 가자고 제안한다.방점 찍히듯 남아 있는 그녀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흔쾌히 집을 나섰다. 생각이 많고 소심한 나와 달리 그녀는 늘 적극적이고 대범하다. 눈은 녹고 하늘은 무심히도 맑지만 모처럼의 수다가 눈꽃처럼 화사하다.“저 산에 묘를 쓰면 후손이 큰 부자가 되지만 마을에는 심한 가뭄이 든다네. 그래도 기어코 밤을 틈타 몰래 묘를 쓰고, 마을 사
겨울은 문수사를 비켜가고 있었다. 햇살이 죄다 문수사에 몰려와 반짝이고 절은 무언가 밝은 기운으로 가득하다. 적막감이 감도는 여느 사찰과는 다르다. 젊은 연인이나 아이를 데리고 나들이 오듯 드나드는 가족의 모습도 이채롭다.문수사의 전신인 납석사는 고려시대에 창건되어 조선 고종 2년에 폐사되었다. 산 너머 의성으로 가는 열재에 산적과 도둑이 들끓어 그로 인해 폐사되었을 거라 추측한다. 그 후 혜봉 선사가 초가삼간을 짓고 수행하다 꿈에 문수보살을 본 후 그 때부터 절 이름을 문수사로 하였다.절은 크지 않지만 생동감이 넘쳐흐른다. 가파른
오염되지 않은 산세를 자랑하는 청정지역 봉화, 호랑이가 걸터앉은 형국을 지닌 북지리 호거산 자락에 지림사가 있다. 신라 문무왕 13년(673) 의상대사가 지림사에서 산쪽을 바라 보다 멀리 서광이 비치는 곳에 지금의 축서사를 지었다고 전한다.지림사 일대는 ‘한절’이라 불리는 큰 사찰과 부근에 27개의 사찰이 있어, 수도하는 승려가 500여 명에 이를 정도였다. 조선 정조 때 저술된 에 ‘지림사는 문수산에 있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조선 중후기까지 사찰이 존속하며 법통을 이어온 것을 알 수 있다.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
달을 품은 절, 함월사는 경주 금오산(金鰲山)에 있는 비구니 사찰로 삼릉 근처에 있다. 함월사가 달을 품고 있어서일까? 삼릉 숲에서는 낮달이 보이지 않는다.하지만 천 년의 시간을 품은 삼릉이 달처럼 다사롭고 은은하게 소나무 숲을 지킨다. 소나무 아래로 난 길은 참선하듯 조심스럽고, 그 가운데 깊고 예스러운 숨결들이 늘 그렇듯 먼저 안부를 물어온다. 육신의 피로와 정신의 때가 녹아내린다.솔숲을 배경으로 식당과 카페들이 늘고 있다. 발길 닿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다니는 거대한 자본의 유혹들, 함월사가 깊은 산중을 두고 이곳에 자리잡은 이
가야산 허리를 감으며 차는 심원사를 향해 달린다. 한적한 겨울 산사를 상상했는데 울창한 소나무 숲을 지나자 주차장에는 차들로 가득하다. 큰 행사가 끝난 듯 많은 사람들이 총총히 심원사를 빠져나오고 있었다. 인적이 빠져나가기를 기다렸지만 공양간 앞에는 여전히 남은 사람들로 어수선하다.해인사의 말사인 심원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말 도은 이숭인이 심원사를 고사(古寺)라 칭한 시가 남아 있고 오랫동안 법등도 이어져 왔다고 전한다. 조선 중종 때 승려 지원이 중수하지만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소실되어 폐사되었다. 새로
동학산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평범한 마을을 지나 산세조차 평범한 낮은 골짜기 얼마쯤을 가다보면 자태와 눈빛이 다른 나무들이 절이 있다는 신호를 보낸다. 좌측 모퉁이를 돌아 오르자 주차장 너머 절의 풍경이 들어온다.학의 부리에 해당한다는 명당터, 신라 태종 무열왕 6년(659년) 혜공이 창건한 경흥사다.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 유정이 머물렀으며 승병들이 이곳에서 처음 훈련을 해 전장에 나가 싸운, 역사적으로 의미 깊은 사찰이다. 사찰의 규모 역시 대단했음을 고승의 부도들과 동학산 곳곳에서 발견되는 초석과 석축들이 반증하고 있다.상
신선이 노닐 법한 환상적인 이름과는 달리 시멘트로 포장된 길이 단조롭고도 가파르게 이어진다. 여느 산과 다름없는 겨울 풍경에 지쳐갈 무렵 독경소리가 마중을 나오고, 산 위의 양지바른 곳에는 바람 한 점 없이 따사롭다. 월동 중인 초록의 으름덩굴과 겨울햇살이 불이문 되어 진리의 세계인 불국토가 펼쳐질 것만 같다.신라의 명장 김유신이 한 노인으로부터 신검(神劍)을 얻어 이 산의 바위굴에서 검술을 닦았는데, 시험 삼아 칼로 바위를 내리치니 바위가 갈라졌다. 이에 산 이름을 단석산이라 했고 갈라진 틈에 절을 세워 단석사라 불렀다고 한다.
차는 영천댐을 끼고 달린다. 가끔 혼자서 찾아오던 길을 석 달 전 어미가 된 딸과 강보에 싸인 손녀가 동행중이다. 길은 한때의 화사함과 초록의 풍성함, 형형색색의 찬란함을 거친 후 차분히 스스로를 굽어보고 있다. 계절이 보내오는 완곡한 서두름들, 숨이 멎을 것 같던 풍경은 그 새 어디로 사라졌을까?겨울이 지닌 섬세한 생명력과 사색이 주는 충만함에 젖어들기를 바라는데 딸은 불쑥 직장 이야기를 꺼낸다. 육아 휴직으로 업무가 늘어나버린 부서원에 대한 미안함과 복직 후 육아 문제와 일에 대한 부담감이 시나브로 그녀를 흔들고 있었나 보다.
유학산은 옛날 학이 놀던 명산이다. 병풍처럼 깎아지른 절벽은 학바위라고도 하고 어른 키의 50길이나 된다하여 쉰질바위로도 불린다. 그 아래 도봉사가 가파른 지형에 아담하게 터를 잡고 앉아 있다. 그 비탈진 곳에 대웅전을 비롯하여 여러 채의 전각과 탑까지 빠짐없이 갖추고 있다.눈을 부라리며 절 입구를 지키는 금강역사보다 더 먼저 마중을 나오는 관세음보살 염불 소리, 숙연할 정도로 차분하다. 천년고찰도 아니고 보물급 유물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도봉사를 찾는 이는 많다. 기암괴석을 뒤로 하고 앞으로는 툭 트인 경관을 찾아오는 등산객과 6
바쁘게 달려온 일상이 덧없어질 때, 숲길을 걸어보라. 바람이 불 때마다 떨어지는 나뭇잎 세례가 찌든 몸과 마음을 정화시킨다. 몸은 젖지 않고 영혼이 촉촉해져 어느 새 활기를 되찾게 된다. 다리가 아프고 호흡이 가빠올 무렵이면 진불암 법구경이 마중을 나와 반겨주던 길, 한때 내가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는 길은 팔공산 비로봉을 향해 숲으로 이어져 있다.바람보다 먼저 떨어지는 나뭇잎 아래를 걸으며 일상을 잊는다. 한때의 사랑과 우수, 너무도 허무하게 지나가버린 젊음을 돌아본다. 욕망과 집착으로 눈이 멀었던 날들을 반성하고 작지만 빛과 같
산골 마을은 온통 무욕의 지혜들이 몸을 날린다. 한 때의 화려함에 미련을 두지 않고 시(詩)처럼 노래하고 시(時)가 되어 낙하한다. 언젠가는 고운 연둣빛으로 피어나 우리를 설레게 할 새로운 만남을 위한 이별들, 가을 숲은 공(空)으로 돌아가는 중이다.아늑하고 깊은 숲속, 장대한 막돌 축대 위로 각화사가 보인다. 신라 신문왕 6년(서기 686년) 원효대사가 창건한 절이다. 선조 39년에 태백산 사고(史庫)를 세우고 조선왕조실록을 300년간 수호했던 사찰이다. 800여 명의 승려가 수행하는 국내 3대 사찰 중 하나였던 곳, 일제 강점기
문수산 800m 고지에 독수리 한 마리 웅크리고 있다. 독수리가 깃든 축서사(鷲棲寺)는 지혜를 상징하는 4대 문수성지의 하나로 신라 문무왕 13년(서기 673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단체 관광객을 태운 버스가 붉은 마가목 열매 사이로 빠져 나가자 휴일 오후의 사찰은 고요하다. 붉게 타오르는 문수산과 지형을 제대로 살려 배치된 큰 전각들이 위압적이리만치 장엄하다. 높은 계단 위의 보탑성전과 대웅전을 향한 소백의 준령들조차 무릎을 꿇고 낮은 자세로 물결친다.전각은 대부분 새로 지었다. 부처님 진신사리가 봉안된 오층 석탑은 세월이 가져
노악산 아래 사하촌은 붉게 익은 감들이 선한 이마를 드러내고 마을을 밝힌다. 계절의 아름다움은 늘 거기에 새로운 모습으로 있어 마음이 시리다. 어느 집이라도 문 열고 들어서면 가을볕에 그을린 얼굴들이 반겨 줄 것만 같다. 빈틈없이 가을이 들어차 있는 노악산 골짜기 멀지 않은 곳에 천년고찰이 숨어 있다.남장사는 경상북도 팔경 가운데 하나로 신라 흥덕왕 7년(832년) 진감국사 혜소가 창건하여 장백사라 하였다가 고려 명종 16년(1186년) 각원 화상이 지금의 터에 옮겨 짓고 남장사라 하였다. 보물이 네 점이나 있는 유서 깊은 절이다.
중년의 여자가 홀로 걷는다. 아무런 보호 장치 없는 차로를 묵직한 배낭 하나 메고 걷는 모습이 잘 여문 가을을 닮았다. 마른 꽃잎 같은 여인이 발걸음을 뗄 때마다 탑이 쌓인다.여인은 큰 길을 따라 걷고 나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을 안고 대비사를 향해 마을 어귀로 들어선다. 눈길 닿는 곳마다 해묵은 그림처럼 정감 넘치는 가을 풍경이 기도가 되어 따라온다. 그곳이 비록 초행길이라 할지라도.길은 대비지 푸른 어깨를 타고 굽이굽이 이어진다. 수심 깊은 호수에는 하늘의 낮별들 죄다 내려와 반짝이며 수다를 떨고, 일찍 물든 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