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이 환한 밤이다. 철길숲을 산책하다가 우두커니 앉아 있는 무궁화호 객차를 찬찬히 바라본다. 내 시간의 퇴적층에 기적 소리가 아스라이 얹혀 지는 것 같다. 문득, 처음 기차를 탔던 유년 시절의 추억이 바람결에 풀썩거리며 뛰쳐나온다.그날, 나는 아버지와 함께 동대구역에서 화본역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나의 부모님은 서둘러 치료를 받아야 하는 친할머니의 병구완을 위해, 한동안 나를 외가에 보내야만 했다. 혼자 외가에 남겨진다는 속상함 때문에 기차를 탔다는 설렘은 잠시였다.아버지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며
42도의 자스민 탕에 몸을 담근다.처음에는 앗! 뜨거워하다가도 어느 사이 뜨거운 물은 심신을 가둔 빗장을 벗겨 자유롭게 몸을 덥힌다. 사지를 쭉 뻗고 머리를 탕의 턱 위에 대고 눈을 감는다. 전신으로 열기가 번져나가며 온몸이 나른하고 편안해진다.코로나로 인해 자주 목욕탕을 찾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목욕은 어쩌다 가게 되는 드문 일이 되었다. 더러 쥐가 났고 목덜미가 뻐근할 때가 많았다. 무리한 날은 온몸이 아팠다. 지인이 사정을 알고 “목욕하면 좋겠다.”는 문자를 보냈고 그것은 빛처럼 환하게 답이 되었다.평소 냉한 편인 내겐 한겨울
모처럼만에 들린 당숙 댁이다.골목에 들어서자 지붕 밑에 빨간 불빛이 깜빡거린다. 마당에도 낯선 불빛이 여기저기서 노려보고 있다.두 노인네가 사는 시골 농가주택에 CCTV를? 요즘은 멀리 있는 자식들이 부모의 상황을 살피려 설치한다는 얘기는 들어봤지만 이 댁에 아직은 그런 게 필요할 리가 없다.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다과상 앞에 앉았던 당숙과 집안 시동생들이 반색을 한다. 종조모의 제사를 핑계로 모였다.늦게 도착한 나는 싱크대 앞으로 먼저 갔다. 반백이신 당숙모가 제사 준비 다 됐으니 그냥 앉아서 떡이라도 먹으라며 등을 민다. 나는
“당신이 아침에 눈을 뜨면 커피를 가져다 드릴게요.”영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 나오는 잉그리드 버그만의 대사다. 내 나이 20대 초반에 주인공 마리아가 로버트 조던에게 이 말을 속삭이며, 마음을 털어놓는 장면이 한동안 눈에 선했다.커피가 흔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집집마다 인스턴트커피, 프림, 설탕을 티스푼으로 덜어서 아껴 먹던 때였다. 그런 이유로 사랑하는 사람이 건네주는 커피 한 잔으로 여유로운 아침을 맞이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아 보였다.요즈음은 아침에 커피 한 잔을 누군가에게 건네는 일이 어렵지 않다. 199
얼마 전 응급실로 할머니가 구급차에 실려 왔다. 쓰러진 채 삼일을 꼼짝도 못한 채 견뎠다고 했다. 대퇴부 골절이었고 딸이 집에 전화를 했는데 연락이 닿지 않자 집으로 찾아가서 발견되었다. 움직이지 못한 며칠은 지옥이었으리라. 물 한 모금, 휴대폰을 할 수도, 살려달라고 해도 들리지 않을 암흑의 밤낮을 보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었다.사월 초파일 백률사를 딸아이와 찾았다. 날이 날인만큼 사람들로 북적였고 대웅전까지 등을 달 생각으로 이름표가 없는 등만을 쫓아 가파른 길을 올랐다. 그때 갑자기 비명소리가 들렸고 70대쯤으로 보이는 노인
새벽부터 내린 비가 종일 갈 것 같다. 주말에 겹벚꽃 보러 우리 동네에 온다고 했는데 비에 다 떨어져 버리면 어쩌나. 연거푸 터져 나오는 기침을 팔뚝으로 막는다. 까똑 소리에 폰을 확인하니 꽃 볼 생각에 벌써 마음이 들뜬다는 영숙씨가 톡에 음악을 올렸다. 클릭하자 바이올린에 실린 이문세의 목소리가 빗속에 스며든다. 기침이 음악을 덮친다.지난 주말에 딸네에 갔다. 기껏해야 일 년에 두어 번 가는 길이 기차의 연착으로 더 멀었다. 이제 괜찮아졌다고 하더니 온 집안이 아직도 감기 중이었다. 오전에 수액까지 맞았다는 딸은 목안이 부어 반가
세상으로 향한 모든 인생길의 시작과 끝은 문이 아닐까. 어머니의 자궁문을 열고 세상에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한평생 온갖 종류의 문을 여닫기 반복하다가 마침내 삶의 종착지에는 장례식장에서 생의 문을 닫는다.인생 시계의 가을에 접어들면서 그동안 지나왔던 무수한 문을 생각해 본다. 자동문처럼 쉽게 열린 적도 있었고, 굳게 닫힌 문을 두 손으로 힘껏 잡아당겨 겨우 열던 때도 있었다. 돌이켜 보건데 내가 건너왔던 문들은 모두 나의 내력을 지녔다. 가끔은 추억의 빗장을 열고 그 문들 속으로 성큼성큼 들어가기도 하지만, 오늘은 차마 잊지 못하고
이제 그의 흙 묻은 작업복이 어색하지 않다. 대충 쓸어 넘긴 흰 머리카락도 여유롭다. 이사 하는 소감을 말 하라고 재촉하자 소주 두어 잔을 연거푸 비운 그가 씁쓸한 웃음을 보였다.“변기뚜껑?”뜬금없는 말에 우리는 입으로 가져가던 술잔을 도로 탁자에 놓았다.처음 그를 만난 건 5년 전 쯤이다. 도시에서만 살았던 우리는 시골 살이 해보겠다는 포부로, 늦은 나이에 연고도 없는 곳으로 이사를 했다. 남편과 나는 하는 일마다 서툴고, 연장 또한 호미 두어 자루가 전부였다.농업기술센터에서 사귄 새 친구에게 농기구를 빌리러 갔을 때였다. 친구
‘그날 아침 한 염부가 죽은 채 발견되었다’라는 첫 문장에서부터 강렬한 소금밭의 묘사로 시작되는 박범신 소설가의 ‘소금’을 떠올린다. 나는 3일간의 일정을 잡아 휴가 중이다. 태안반도의 채석강과 적벽강, 내소사는 꿈에서조차 나를 유혹한 곳이었다.나는 지금 곰소다. 곰소는 일제 강점기 때 만들어졌으며, 전라북도에서 군산항 다음으로 규모가 큰 어항(漁港)이었다.이미 소문난 슬지제빵소로 사람들이 끝없이 밀려들고 있다. 후배에게 찐빵과 커피를 사달라고 부탁하고 도로에서 벗어나 염전을 살핀다. 소금부족으로 염전에서 죽은 염부인 그 아버지를
도마소리가 경쾌하다. 나는 잠자리에 누워 아침밥을 준비하는 소리를 듣는다. 문틈 사이로 들어오는 언니들의 말소리에 이불을 당긴다. 어젯밤에 불렀던, 기타와 어우러진 나직한 노랫가락이 꿈결인 듯하다.문지방(文知房). 글이 좋아 글을 제대로 알자고 모인 사람들이다. 이른 봄과 늦은 가을이면 한 이불 속에 발을 묻고 밤을 하얗게 보냈다. 이야기는 이어지고 이어져 23년이라는 시간을 만들었다.휴전선 아랫동네에 사는 나보다 한 살 적은 남동생은 농사지은 콩으로 두부를 만들어 온다. 수녀님과 생활하는 김포언니는 여전히 멋쟁이고, 오빠들을 휘어
매년 우리 집 철쭉은 해사하게 웃는 얼굴로 피어났다. 그런데 올해는 감감무소식이었다. 계절을 알리는 전령사였는데, 물기 없는 수피가 까칠하고 버석거렸다. 말라 헐거워진 흙 아래에 묻혀 있는 뿌리에도 물이 사라졌을까, 걱정되었다.꽃이 피었다가 이우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한 때 푸른 물 정기를 맘껏 받아들여 연초록 잎을 돋우고 꽃불을 환히 밝혔던 시절을 떠올리니 괜스레 측은했다. 서둘러 화분에 물을 주었다. 몸피 가득 물을 머금어 회생하면 좋으련만.내가 다정한 눈길로 바라보고 아픔을 살폈어야 했다.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웃자란 부분은
헤스티아는 불의 신이다. 근래 부쩍 늘어난 산불이 사람들의 생명과 재산을 위협하고 있다. 제우스는 그녀에게 순결을 지킬 권리를 인정하고, 인간이 신에게 바치는 제물을 가장 먼저 받을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그 제물이 산불로 희생된 산과 나무, 사람과 동물을 결코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식목일 가까이 전국에서 30여 건의 산불이 발생했다. 수십 년, 수백 년간 숲을 지키고 자란 수목들이 산불로 잿더미가 되었다. 산불의 원인으로는 실화(失火)가 25%로 가장 많고 쓰레기소각, 건축물화재, 논·밭두렁 소각, 성묘객 실화 등의 순서다. 지
문을 열고 들어서는 그녀의 표정이 여느 날과는 달랐다. 할머니는 의자에 앉기 무섭게 하소연을 쏟아낸다.내 말 한 번 들어봐라, 그게 그렇게도 힘드나? 매번 내가 속이 상해. 먼저 태어난 아들이 선수고 뒤따라 나온 게 차수거든. 얼굴은 고사하고 걷는 뒤태도 둘이 똑 같어. 지 식구들이야 알아보겠지만 동네사람들은 지금도 볼 때마다 헷갈리재. 하기야 선수는 눈가에 흉터가 있으니 자세히 보면 알거라. 에이그 그 상처가 참…큰아들 선수는 말이다, 가끔씩 어디 갔다 오는 길이라면서 옥수수를 한 망태씩 사오거든. 그 많은 걸 누가 다 먹나. 그
텃밭에 갔다. 겨울 동안 뜸했던 발길에 밭이 엉망이다. 펄럭이는 비닐 쪼가리와 도착지를 잃은 종이와 떠나기 싫어 뭉그적거린 낙엽이 바람에 휩쓸려 수없이 굴러다닌 자국이 지천이었다. 가져온 커피를 홀짝이며 혼자서 적적했을 밭에게 무심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전했다.옷을 갈아입고 호미를 들었다. 쓰레기라는 이름으로 묶인 것을 긁어모으니 큰 더미가 되었다. 나중에 분류를 해야겠지만 우선은 모아 두고 흙을 살폈다. 호미질을 해보니 흙이 부슬부슬하다. 아마도 얼었던 흙이 봄기운을 받아 살을 풀어헤치고 있었던가 보다. 무너진 두둑을 새로 흙을 돋
경주 보문단지에 벚꽃이 만개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다. 나뭇가지마다 봄기운이 완연하다. 산들바람을 따라 꽃잎이 날아오른다. 나비떼를 보는 것 같은 황홀감에 한참을 서 있었더니, 앞서가던 일행이 내 이름을 부른다.일행은 꽃나무에 둘러싸여 사진을 찍고 싶어 했다. 그런 연유로 기어이 산책로 가운데로 진입했으나, 나는 가지 않았다. 중심에서 사람들에게 떠밀려 다니는 것보다 양지바른 한쪽에서 전체 풍경을 내 눈에 가득 담고 싶었기 때문이다.돗자리를 깔고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음지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는 벚나무에게도 꽃봉오리가 터질 듯
친구가 운영하는 고물상에 들렀다. 부탁해 둔 주물난로가 들어왔다는 연락을 받은 그 날은 겨울 추위가 막 들어서고 있었다. 친구는 화물차에서 묵은 짐들을 내렸다. 요양원에 간 이웃 할머니의 살림을 정리 중이라 했다. 냉장고에서 나온 계란 몇 알이 소쿠리에 담겨 있고 그 옆에는 미숫가루가 반쯤 담긴 통과 고춧가루 통이 발치에 차였다. 냉동실에서 나온 고등어와 얼어붙은 시루떡 몇 뭉치에 지난 가을에 넣어 둔 홍시까지 혼자 살아 온 할머니의 생활이 다 보이는 듯했다.바닥에 떨어진 수주(數珠)를 줍는데 발밑에 사진이 있었다. 남의 얼굴을 밟
커피를 마신다. 봄볕아래서 후배와 점심 후의 나른함을 섞고 수다를 한 스푼 첨가해서 홀짝거린다. 한겨울의 매서운 추위도 더러 뜨거운 커피에 녹아내렸고 긴 장마에 우산을 털며 들어서는 커피숍의 커피향기는 눅눅함마저도 잊게 했다. 지금은 그저 편안한 휴식의 단맛을 느끼고 있다.오빠는 “인생도 쓴데 커피까지 쓰게 마시겠냐”라면서 두 스푼의 설탕을 넣어 휘휘 저어마셨다.그러고 보니 쓴맛, 단맛, 짠맛, 매운맛, 단맛까지 달달하거나 모든 맛이 커피 속에 있을지도 모른다. 223이라는 말이 한 때 유행했다. 커피 두 스푼에 프리마 두 스푼 설
신선이 쉬는 별장에 갔다. 도심을 벗어나 점점 좁아지는 도로를 지나 굽이지는 시골길을 따라 한참을 달렸다. 들길을 지나 산자락을 올라 가파르다 느낄 때쯤 이정표가 멈췄다. ‘사람과 산 사이에 선유산장’ 간판이 걸려 있다.입구가 예사롭지 않았다. 간판 아래 제주도의 정낭을 옮겨놓았다. 누구든 들어와도 좋으나 예의를 지키라는 무언의 안내처럼 보였다. 주위에는 나무를 이용한 귀여운 다람쥐인지 도깨비인지 모를 조각이 혓바닥을 살짝 내밀고 있다. 주인의 유머스런 감각이 느껴졌다. 산장은 길보다 아래에 위치해 있어 위에서 내려다 본 모습은 건
계절이 바뀌는 길목에 비가 오다 긋다. 빗물에 젖어 있는 고즈넉한 산책로에서 나래비 서 있는 나무를 만난다. 언 땅 아래에 새봄을 알리는 새싹들이 숨죽이고 있듯이 나무들의 몸피 속에서도 새순들이 나붓이 엎드려 있는 것 같다.입춘이 지나고 나면,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 커진다. 봄 마중을 하러 모처럼 집을 나서니 나무가 먼저 눈에 들어오고, 그 다음으로 형산강 가장자리에 있던 새떼들이 눈에 띈다.새들도 봄을 기다리는가. 손님맞이 단장을 하듯 깃털을 손질하고 물 가운데로 미끄러져 들어가 세수를 한다. 첨벙거리는 새의 움직임에 바람도 일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