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엔 `아름다운 해변`이 적지 않다.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 이탈리아의 아말피, 태국의 피피 섬…. 하지만, 청아한 물 빛깔과 새하얗고 고운 모래만으로 이야기하자면 지구 위 어떤 해변도 필리핀 중부 비사야제도에 미치지 못할 듯하다. 개인적 취향을 이야기하자면 기자는 산보다는 강을, 강보다는 바다를 더 좋아한다. 해서 `만약에 전생(前生)이란 게 있다면 아마도 나는 커다란 농어 또는, 나붓거리는 해초가 아니었을까`란 생각을 하곤 했다. 어려서부터 사파이어 색채로 반짝이는 바다를 보면 사족을 쓰지 못했다. 그런 이유로 적지 않은 나라의 해변을 여행했다. 바다를 편애하는 사람의 필리핀 중부지역 여행은 당연지사 즐거웠다. 비사야제도의 여러 해변을 기쁘게 만났다. 속절없고 바람 같은 인간의 생을 위로해주는 새파
나이에 관계없이 낯을 심하게 가리는 사람들이 있다. 성격 탓이다. 그런 경우 여행자로서는 낙제점이다. 다행이랄까? 기자는 처음 보는 사람과도 어렵지 않게 어울리는 인간형이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불가리아 소피아에서도 적지 않은 낯선 이들과 터놓고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가격에 비해 시설이 나쁘지 않은 숙소 호스텔모스텔에서 아침과 저녁까지 제공받으며 비교적 잘 지냈다. 익숙하지 않은 치즈와 홍차, 빵과 소시지, 소금에 절인 올리브로 아침을 먹는 것도 곧 익숙해졌다. 저녁으로 나오는 스파게티도 한국에선 즐기지 않는 음식이었지만 뭐 어떤가. 미국과 영국, 크로아티아와 폴란드에서 온 젊은 친구들이랑 잡담을 주고받으며 달게 먹었다. 일본 친구와 먹은 중국식당의 볶음밥과 양념 돼지고기 구
불가리아는 기자가 여행한 첫 번째 유럽국가다. 보통의 한국인 관광객들이 프랑스, 독일, 스위스 등의 서유럽을 즐겨 찾는 것과 달리 조금은 특별한 선택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불가리아로 입국하기 하루 전 조그만 노트에 메모를 남기기도 했다. 그간 살아온 아시아가 아닌 낯선 대륙을 향한다는 일종의 설렘 때문이었을 것이다. `불가리아 소피아로 가는 열차 출발시간이 1시간 50분쯤 남았다. 시간은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빨라서 우크라이나 키예프를 거쳐 터키에 도착한지도 벌써 1개월이 넘어서고 있다. 막상 떠나려고 마음먹고 보니 매일 보던 이스탄불의 석양이 유난히 슬프고 아름다워 보인다. 이제 배낭을 정리해 숙소와 15분 거리인 시르케지(Sirkeci)역에서 기차를 타면
`모스크와 케밥(kebab)의 도시`로 불리는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밤 11시에 출발하는 야간 국제열차를 타고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를 향했다. 야식으로 챙긴 소시지와 샌드위치를 안주 삼아 마신 포도주 한 병에 기차여행의 즐거움은 배가됐다. 그러나, 여행자가 늘 즐거울 수만은 없는 법. 갑작스런 2번의 여권 검사 탓에 좋았던 기분을 망쳤다. 터키-불가리아 국경을 넘은 건 안개 낀 새벽이었다. 불가리아 국경경찰인지 세관원인지 정체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제복 입은 여성이 잠든 기자를 조심성 없이 툭툭 쳤다. 억지로 눈을 뜨니 웃음기 하나 없는 무심한 표정으로 묻는다. “어디 가세요?” “저요? 이거 불가리아행 열차잖아요. 소피아에 갑니다.” “왜요(Why)?”
전말을 알게 되면 누구나 통곡할 수밖에 없는 발칸반도의 역사. 상호배제와 끔찍한 학살, 비명과 고통이 수백 년간 반복돼온 아픔의 땅. 우리가 쉽게 이야기하는 `인간으로서의 희망`을 보스니아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무심한 햇살과 그 아래 새하얀 비석들 수만 개가 아프게 눈을 찔러오던 사라예보의 공동묘지. 실핏줄이 터진 붉은 눈동자로 사납게 짖어대던 개를 막대기로 쫓아준 꼬마들이 또래다운 호기심을 발휘해 드물게 보는 동양인인 기자에게 궁금한 것들을 물어왔다. 하지만 그날 그 아이들에게 어떤 질문을 들었고, 무슨 대답을 했는지 도통 떠오르지가 않는다. 시간은 증발했고 기억은 휘발됐다. 그건 단지 기자와 꼬마들의 힘겨웠던 의사소통 탓만은 아니었을 터. 아이들이 하나둘씩 산을 내려가고도 한
사람살이의 냄새가 물씬 풍겨오는 재래시장은 기자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다. 그간 여행한 나라마다 시장은 빼놓지 않고 들렀다. 하지만, 박물관이나 유적 등에 관한 흥미는 크지 않다. 사람마다 여행스타일이 다르니까 그렇다. 사라예보에서도 굳이 박물관을 찾아갈 생각은 없었다. 라틴 다리 인근 노천카페에 앉아 높고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거나, 시원한 보스니아 맥주를 마시며 오가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게 더 좋았다. 그런 여유를 즐기는 가운데 멀리 산마다 새하얗게 들어찬 것들이 눈에 띄었다. 저게 뭐지? 궁금증이 일었다. 사라예보는 야트막한 산으로 빙 둘러쳐진 지형이다. 그 산마다 하얀 기둥 혹은, 막대기 같은 게 지천이다. 뭘까? 궁금증은 즉각 해소해야 한다. 게다가, 게으른 여행자에게 남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반면교사 해야 할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 죄 없는 수백만 명의 사람을 죽인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1889~1945), 캄보디아의 폴 포트(1928~1998)와 함께 아래 세 사람의 이름을 기록해두고자 한다. 이들은 자신이 도대체 무슨 악행을 저지른 것인지 제대로 알고나 있을까? 슬로보단 밀로셰비치(1941~2006) 라도반 카라지치(1945~) 라트코 믈라디치(1942~)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이하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의 새벽 거리는 괴괴하리만큼 조용했다. 크로아티아의 해변도시 스플리트에서 밤늦게 출발하는 국제버스를 타고 10시간을 달려 도착한 도시. 1984년 동계올림픽이 열린 곳이며, 폐병을 앓던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Gavrilo Princip·189
베오그라드 중앙역에서 금발의 호객꾼을 따라 도착한 숙소는 오래되고 깨끗하지 못했지만, 젊은이들이 내뿜는 열기로 인해 분위기는 더없이 좋았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온 대학생 10여 명이 단체로 묵고 있었고, 스물넷이라는 호스텔 주인의 친구들도 왁자지껄 모여 탄산음료에 독한 보드카를 섞어 마시며 뭐가 그렇게 좋은지 1분 간격으로 너털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말하자면, 스페인과 포르투갈 청년 절반에 세르비아 청년 절반, 거기에 얼굴색이 다른 중년의 동양 사내 하나가 낀 풍경이었다. 나이로 보자면 그들은 기자의 조카뻘이지만, 서로가 초면인 여행자들에게 나이 차이는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스페인 영화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Pedro Almodovar)와 할리우드에서도 인정받은 스페인 여배우 페넬
아름답고 고풍스런 건물이 줄줄이 늘어선 세르비아의 전원도시 노비사드. 운 좋게도 머물던 시기에 영화 촬영이 진행되고 있어 그 현장에도 가볼 수 있었다. 아마도 `1차 세계대전`을 다룬 작품인 듯 멋지게 장식한 마차와 클래식한 디자인의 자동차가 함께 등장했다. 팔과 다리가 늘씬한 남녀 배우들이 대기하는 카페에선 그들과 눈인사도 나눴다.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영화배우들은 미남이고 미녀였다. 여배우의 푸른 눈동자가 빛나는 햇살 아래 사파이어처럼 반짝였다. 오랜 시간의 산책과 영화촬영 현장 구경이 지겨워진 기자는 잠시 쉬려고 묵고 있던 `소바 호스텔`로 돌아왔다. 유럽과 할리우드의 영화포스터가 벽면 가득 걸린 깔끔한 숙소.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숙소 주인은 동양문화에도 관심이
세르비아. 구(舊)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주도국이었던 이 나라에 관해 기자가 아는 것이라곤 칸영화제와 베니스영화제 그랑프리를 수상한 영화감독 에밀 쿠스트리차(1954~)가 활동한 곳이라는 정도였다. 영화 관람을 통해 습득한 지식이 옛 유고 연방과 세르비아에 관해 아는 것의 전부였다는 이야기. 냉철한 유럽풍의 사실주의에 남아메리카 예술의 특징인 마술적 요소를 결합한 `환상적 리얼리즘`에 기반을 둔 쿠스트리차의 영화. 그중에서도 `집시의 시간`과 `언더그라운드`는 슬라브족 특유의 쾌활함과 에너지, 위트를 극대화해 보여줌으로써 한국은 물론 세계적으로 화제를 모았다. 1990년대 초반부터 말까지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몬테네그로, 코소보 등 연방국들의 독립선언과 이어진 내전으로 유고슬라
비엔나와 잘츠부르크를 포함해 오스트리아의 몇몇 관광지를 여행했을 때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사람들의 여유와 느긋함이었다. 빡빡한 일상을 사는 도시인들이나 상대적으로 느슨한 생활을 하는 시골 사람들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어지간한 일에는 화를 내거나 짜증을 부리지 않는다.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미소로 상대방을 바라보는 오스트리아인들의 얼굴에는 느긋한 여유로움이 묻어나왔다. 그런 편안한 웃음은 대체 어디에서부터 오는 것일까라는 의문이 생겼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오스트리아의 노동자와 자영업자, 공무원과 관광업 종사자는 여느 나라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열심히 일한다. 비엔나를 오가는 트램(tram·노면전차)을 아침 일찍 타보면 양복을 제대로 갖춰 입은 사무직 노동자부터 편안해 보이는 작업복을
`놀라움`이라는 감정은 익숙하지 않은 것을 만났을 때 온다. 그것이 예술작품일 경우 이 놀라움은 경악 혹은, 정신적 공황상태로까지 이어지기도 하는데 그걸 `스탕달 신드롬`(Stendhal Syndrome)이라 부른다. 그런데, 이 스탕달 신드롬이 반 고흐(1853~1890)나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의 그림이 아닌 겨우 `도시의 건축물`을 보고도 느껴질 수 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몇 해 전이다.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에 머물던 일주일은 행복했다. 그해 5월 터키여행 중 만난 친절한 선배는 고맙게도 자신이 살고 있는 비엔나의 조그마한 아파트를 아무런 대가 없이 통째로 빌려주었다. 동유럽을 여행 중이던 카이스트 여학생 3명과 기자는 그곳에서 오랜만에 한국 음식을 요리해 먹고
벌써 꽤 오래 전 일이다. 지루하고 단조로운 직장생활이 7년을 넘어서던 시기. 달디 단 오아시스를 만났다. 1개월의 휴가를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황금보다 소중한 그 한 달을 어디서 어떻게 보낼지 고민했다. 그 고심의 시간 끝에 인도가 기자에게로 왔다. 새카만 그들의 순박한 미소 그리고 무조건적인 친절 첫 대면때의 충격·공포 상쇄시키고도 남을 정도 델리로 들어가 지구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이라는 타지마할을 보고, 인간 존재의 무상함과 삶의 덧없음을 새삼 떠올리게 된다는 바라나시에 갈 수도 있었지만, 태생적으로 `물`을 좋아하는 기자는 인도 북부의 역사와 실존자각 대신 남인도의 바다를 택했다. 인도의 `경제수도`로 불리는 뭄바이로 들어가 역삼
뱅갈로르 시외버스터미널은 복잡하고 컸다. 풍채가 경찰청장급인 잘생긴 제복의 사내에게 `인도의 알프스`로 불리는 우티(Ooty)행 버스티켓을 파는 곳과 출발 장소를 물었다. 대나무 막대기를 든 그가 점잖게 고갯짓으로 기자의 의문에 답해준다. 그 폼 역시 의젓하기가 청장급이다. “곧 승진하길 빌게요”라는 농담으로 고마움을 표했다. 다행히 매표소는 멀지 않았다. 우티까지의 소요시간을 물으니 “10시간 쯤”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 또 그 긴 시간을 낡은 버스에서 시달려야 한단 말인가. 다시 한 번 느끼는 것이지만 인도는 넓고도 크다. 뱅갈로르를 출발한 버스가 털털거리며 우티를 향했다. 대여섯 시간을 달리니 높다란 산길로 접어든 것인지 눈에 띄는 나무부터가 흔해빠진 인도 야자수가 아닌 끝이
익숙하지 않은 공간을 떠도는 여행은 `익숙한 것들`에 대한 그리움을 부른다. 특히 음식이 그렇다. 입에 맞지 않는 걸 먹어야한다는 건 비극이다. 여행자는 이런 비극을 감수하면서까지 `새로운 것들`을 찾아가는 사람이다. 인도에서 만나는 한국음식, 포장용 같은 냉면과 `튀김` 삼겹살 머나먼 이국서 경험한 익숙한 맛에 소주까지… 최상의 맛 느껴 네댓 명의 사람들에게 묻고 또 물어 `코리안 레스토랑`을 찾긴 찾았다. 오후 2시를 조금 넘긴 어중간한 시간이라 그런지 손님이 거의 없다. 주인이라는 한국 여자는 아주 잠깐 얼굴이 보이더니 어디론가 가버렸고, 인도인 종업원들에게 냉면과 삼겹살 구이를 주문했다. 한국에서 수입된 팩소주도 있단다. 익숙한 그것들이 반가웠다.
뱅갈로르로 가는 차는 속도를 높이며 밤길을 달렸다. 야간 여행자를 위한 좌석인 `슬리퍼 시트`인지라 목과 등도 편안하다. 에어컨 역시 속된 말로 빵빵하다. 다만, 하나 거슬리는 게 있다면 뒷좌석에 앉은 이탈리아 여자-인도 남자 커플. 잘생긴 외모의 릭샤왈라가 소개한 영국 지배 역사가 보이는 城과의 만남 무슨 할 말이 그렇게도 많은지 차에 타자마자 시작된 그들의 소곤거리는 밀어(蜜語)는 자정을 넘겨서까지 계속됐다. 이탈리아 억양이 섞인 영어발음은 왜 그렇게 딱딱 끊어지며 잠을 청하는 기자의 귀를 괴롭히던지. 그러나, 어쩔 것인가. 사랑에 빠진 이들은 말이 많아지기 마련이다. 너나없이 누구나 그런 청춘의 시절을 겪고 성장한다. 사랑에 빠진 연인들의 속삭임 탓에 새벽 2시가 넘어서야 잠이 들었
인생은 짧고, 하루는 더 짧다. 이 `짧음`을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인간의 생은 위대해질 수도, 비루해질 수도 있다. 모두가 알고 있는 이야기다. 결코 길지 않은 `인생`과 `하루`를 즐겁게 살 수 있는 권리를 우리는 누리고 있는가? 말리기호텔에서 한 번 더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한참 어린 독일 여성 프란시와 만나 저녁을 먹을 것이니, 최소한의 격식은 차려야 했다. 그건 인간으로서의 매너이기도 하다. 오토릭샤 가이드 프랭키와의 서운하고 안타까운 이별 폐허의 장엄함·멋진 풍광에 취한 인도의 시간들 프랭키가 오늘도 고생이 많다. 호스펫에서 함피로, 함피에서 호스펫으로, 다시 같은 길을 되짚어 프란시의 숙소까지 기자를 데려다줘야 했으니. 그의 수고를 생각해 은근슬쩍 100
함피에서 눈 뜬 세 번째 날. 어디선가 스멀스멀 익숙한 향기가 몰려온다. 이건 뭔가? 맞다. 밥 짓는 냄새다. 그랬다. 기억의 회로 저편 멀리에도 엄마가 “탕탕” 도마 두드리고, 조개에 구수한 된장 풀어 아침을 준비하던 향기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건 애틋한 그리움의 영역이다. 집 떠난지 1년… 언제 돌아갈지 모르는 캐나다 청년과의 추억 아침을 제공하는 말리기호텔 레스토랑은 1층에 있는데, 4층 기자의 방까지 휘몰아쳐오는 쌀 익어가는 향기. 그것 때문에 잠을 깼다. 아직은 선선한 이국의 아침 바람을 맞으며 프랭키가 운전하는 오토릭샤에 올랐다. 겨우 통닭 한 마리 사준 걸 두고 “엄마가 당신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라고 했다”며 웃는 프랭키. 덩달아 웃게 되니 기분이 나쁘지 않
아침 일찍부터 소년 오토릭샤 운전수 프랭키와 성스러운 고대도시 함피의 유적들을 둘러봤다. 이슬람과 힌두세력이 각축을 벌이며 서로 대립한 탓에 상당수 유물과 유적이 손상된 상태로 남아있었지만, 함피는 파괴된 폐허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무너진 바위 하나하나에 담긴 역사의 흔적들이 여행자를 매료시켰다. 무너진 바위에 새겨진 함피의 역사…폐허 속에서도 아름다움 빛나 오토릭샤 가이드 소년 프랭키의 초대로 인도가족들과 만나 할머니와 엄마·여동생과 조그만 방 한칸서 생활하는 소년가장 가난으로 일찍 철든 소년 프랭키의 미소에 기자의 삶 되돌아 봐 인도사람들처럼 걸쭉한 카레와 밀가루빵으로 점심을 먹고 오후가 되니 `살인적인 더위`가 함피의 폐허를 뒤덮었다. 길거리에 줄지어 드러누운 개들의
고아의 해변을 출발해 함피를 향하는 여정은 밤 10시가 넘어서야 끝이 났다. 인도 내륙에 위치했고, `성스러운 도시`로 불리는 함피로 가는 관문인 호스펫에 도착했다. 시내는 늦은 시간임에도 몹시 북적거렸다. 인근 마을을 다녀오는 인도 사람들부터 멀리서 이곳을 찾은 이방의 여행자들, 거기에 장사치들까지 시끌벅적 제 할 일과 제 갈 길을 찾고 있었다. 오토릭샤 가이드인 소년가장과 사흘동안 `함피` 여행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과 허물없이 술잔 나눈 추억들 성스러운 도시의 유적군·바위풍경에 넋을 잃기도 수천 리 먼 길을 오느라 힘겨웠으니 숙소는 좋은 걸 잡아 편히 쉬며 여독을 풀려고 마음먹었다. 호스펫 버스터미널 인근 `말리기호텔`이 괜찮다는 정보를 얻어들었다. 하루 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