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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만에 반가운 이를 만났다. 독서 클럽 모임에 예의 활짝 웃는 모습으로 그미가 들어왔다. 그미는 우리 독서 모임의 초대회장이었다. 모임에 뒤늦게 합류한 나는 그미의 다사롭고 정감어린 성품에 매료되는 중이었다. 천성이 무미건조하다 못해 시니컬한 쪽인 나는 그미의 살뜰함을 벤치마킹해야지, 하면서 한껏 고무되어 있었다. 한데 채 정도 들기 전에 이별이란다. 구상 중이던 사업을 펼치게 돼 그미는 더 이상 독서 모임에 나올 수 없게 된 것이다. 가슴팍으로 싸한 바람 몇 겹이 지나갔다. 모두들 그미를 보내고 싶지 않아했다. 서운함을 삼키며 송별회 점심을 같이 하던 날이 떠오른다. 아직 모임에 적응이 덜 된 나는 따뜻한 밥 한 끼 대접할 기회를 마련하지 못했다. 어리바리 눈치 없이 구는 동안, 도리어 그미가 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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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10.06.14
게재일 2010-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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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들과 영화를 봤다. 두 팀으로 나눠졌다. 각자의 취향 또는 사정에 따라 관람한 뒤 `헤쳐모여` 하기로 했다. 내가 속한 쪽 영화가 조금 빨리 마쳤다. 나중 팀이 나오려면 일이십 분 정도를 기다려야 했다. 내 기준으로는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일정이 빠듯한 사람들에게는 그 시간도 아까웠으리라. 먼저 점심 먹으러 가잔다. 내 맘이야 조금 기다리고 싶다. 하지만 다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는 분위기다. 바쁜 사람들도 있고, 감기 걸린 이도 있어 따뜻한 곳으로 옮겨야 하기 때문이다. 급히 식당으로 옮긴다. 거기서도 기다렸다 같이 주문하자고 말하지도 못한다. 다들 사정이 있으니. 시킨 음식을 먹고 있는데 늦은 일행이 들어온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마음 한구석이 편치 않다. 부러 늦은 것도, 긴 시간도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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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10.06.07
게재일 2010-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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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맘껏 읽고 싶다는 욕심 앞에서 언제나 게으름이 방해꾼이다. 이 명백한 사실이 부끄러워 `바빠서 못 읽는다` 고 말도 안 되는 핑계를 슬쩍 갖다 붙이기도 하는 것이다. 급기야 어렵고 두꺼운 책보다는 쉽고 간편한 책을 찾기에 이르렀다. 못 읽는 것보다는 그래도 읽는 게 낫다는 허영이 그런 타협을 불러왔다. 그 타협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 필요에 의해서든, 한 박자 쉬어 가고 싶은 마음에서든, 집어 들게 되는 어린이 도서들에서 의외의 책 맛을 발견한다. 이영서 작가의 `책과 노니는 집`(문학동네, 2009)에 눈길이 오래 머문다. 한 편의 동화가 그 어떤 읽을거리보다 많은 것을 독자들에게 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주인공 장이는 유일한 가족인 필사쟁이 아버지마저 잃는다. 금서인 천주학 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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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10.05.31
게재일 2010-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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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철이다. 6·2지방 선거를 앞두고 홍보 전략도 각 당의 노선만큼이나 다양하다. 그 중 홈페이지에 올린 여당의 한 동영상이 논란이 되고 있다. 인기 있는 케이블 방송 프로그램을 패러디한 `선거 탐구생활`이란 홍보 영상물인데, 하필이면 여성을 비하하는 내용이란다. 여성 유권자 및 야당의 반발을 불러일으킨 건 당연하다. 논란이 증폭되자 해당 동영상은 이틀 만에 슬며시 꼬리를 내렸다. 다행한 일이나 여성유권자들에 대한 사과보다 변명이 앞서는 것도 영 마뜩찮다. 영상 제작 관계자에 따르면 `정치에 관심이 없는 20대 여주인공이 정치와 한나라당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다는 점을 원작을 빌려 말하려고 했던 것`이라나? 남녀의 차이점을 꼬집어 공감을 산 원작과 여성을 노골적으로 비하한 패러디물은 그 거리가 한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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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10.05.24
게재일 2010-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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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과 극은 통한다. 지나치게 활발하거나 말이 많은 사람일수록 제 안의 우울을 감추기 위해 그런 행동양식을 택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울을 포장할 매혹적인 통제력마저 놓쳐버린다면? 맥 풀린 그 우울은 `말`까지 버리라고 강요할지도 모른다. 혼마 야스코의 `대한제국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역사공간, 2008)를 읽으면서 공권력의 횡포 앞에서 개별자의 운명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저항은 `할 말 없음`이란 걸 알게 되었다. 인간이 존엄하다고 말할 때, 그 존엄은 개별자로서의 존엄을 말하지 힘의 논리 앞에서 그것을 양보하거나 희생해도 좋은 존엄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인류 역사를 돌이켜 보건대, 언제나 개별자의 인권은 권력의 마수 안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덕혜옹주도 그런 길을 걸었다. 혼마 야스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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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10.05.17
게재일 2010-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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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끈한 시집을 선물 받았다. 윤석홍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이다. 첫 시집을 낸지 십여 년 만이란다. 소리 소문 없이 출간된 시집 제목은 `경주 남산에 가면 신라가 보인다`(산악문화, 2010)이다. 남산에 그렇게 많은 골짜기가 있다는 걸 시인의 시집을 통해 알았다. 남산에 대한 내 무지를 부끄럽게 만드는 그의 시편이 나는 미덥다. 산이 좋아 골골마다 행장 꾸리고 나섰을 시인의 모습이 시집과 오버랩 된다. 아직 몇 편 밖에 못 읽었지만 그래도 리뷰 쓰고 싶은 욕심에 덜컥 연필을 들었다. 이런 시는 한꺼번에 몰아 읽어서는 안 된다. 숨겨 논 추파춥스를 혀끝으로 녹여먹듯 야금야금 읽어야 제격이다. 리뷰 제목 `시 한 편 건졌다`는 시인의 시 한 구절에서 따왔다. `비석대골` (87쪽) 마지막 행에서 빌렸음을 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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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10.05.10
게재일 2010-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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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결에 뉴스가 들린다. 알람으로 맞춰놓은 텔레비전 아침 일곱 시 뉴스. 천안함 침몰 현장에서 수거한 알루미늄 조각이 너무 작아, 외부 공격을 입증하는 결정적 증거물로 단언할 수 없다는 국방장관의 말을 전해준다. 여기까지만 들었으면 좋으련만 해군참모총장이 보복의지를 밝혔고,이에 장관마저 `동의한다`고 말했단다. 물론 이 말을 곧이곧대로 해석하고 싶진 않다. 분노하는 국민들에 대한 심정적 대변쯤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원인 규명도 명확히 되지 않은 상태에서 나온 이런 멘트는 불편하기만 하다. 그저 요즘 읽고 있는 수잔 손택의 `타인의 고통` (이후, 2004)이 오버랩 된다. 우리는 타인의 아픔이나 고통에 대해 각자의 방식대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완전하게 이해되지 못하는 그 타인의 고통은 항상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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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10.05.03
게재일 2010-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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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번호로 문자가 왔다. 모임 날짜 변경을 알리는 내용이었다. 모임명도 발신처도 없이 다짜고짜 모임 날짜를 한 주 미루겠다는 단체 공지 문자였다. 건망증을 달고 사는 편이라 혹 내가 챙기지 못한 모임이 있지 싶어 답문을 보냈다. 뉘신지요? 내 확인 문자에 금세 전화벨이 울린다. 두 달에 한 번 꼴로 모이는 봉사단체 총무의 목소리였다. 상대가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나서야 아, 참 모임이 있었지, 라고 알아챘다. 깜박하고 전화번호를 제때 저장하지 않은 탓에 생긴 해프닝이었다. 같은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곧장 핸드폰에 이름과 전화번호부터 등록했다. 건망증은 나의 오래된 친구이다. 크고 작은 건망증 때문에 식구들을 피곤하게 하고 걱정시킨 게 한 두 번이 아니다. 제 생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거야 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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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10.04.26
게재일 2010-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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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석 신부를 알게 된 건 방송을 통해서였다. `KBS 스페셜`에서 부활절 특집으로 신부님의 짧았던 생애를 조명해주었다. 한마디로 신부님은 수단의 슈바이처였다. 20세기 초, 가봉의 람바레네에 슈바이처 박사가 있었다면, 21세기 초, 수단의 톤즈에는 이태석 신부가 있었다. 지구상, 가장 키 큰 종족 딩카족이 사는 마을 톤즈에 이태석 신부가 나타났다. 스쳐 지나는 만남이 아니라 그곳의 정착민이 되기 위해. 의과대학을 마치고 군의관으로 제대한 신부님은 물질적 풍요와 보장된 미래를 미련없이 버렸다. 그리고 사제가 되었다.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서였다. 아랍계 북수단과 원주민 남수단은 내전 중이고, 1980년대 이래 이백 만 이상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톤즈는 그 중 피해가 가장 심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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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10.04.19
게재일 2010-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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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값은 너무 비싸다. 김용철의 `삼성을 생각한다`(사회평론, 2010)를 두고 한 말이다. 혹시라도 절판될까 싶어 부랴부랴 장바구니에 넣고 보니 무려 이만 이천 원. 인터넷 책방에서 산 덕에 좀 에누리했지만 그래도 그리 만만한 가격은 아니다. 재벌 신문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진보 언론사들조차 광고 싣기를 부담스러워 하는 책이라면? 조만 간에 쥐도 새도 몰래 책이 회수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으리라. 해서 절판되기 전에 읽어보자는 심정으로 샀다. 400여 페이지가 넘는다는 것 말고, 책이 이토록 비싸야 할 이유는 없었다. 편집이 세련되었거나 표지가 고급스럽거나 제본이 견고한 것 같지도 않다. 그럼에도 그만한 가치를 지불해야 할, 독자로서의 의무 같은 것을 지게 만드는 책이다. 씁쓸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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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10.04.12
게재일 2010-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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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끼리도 질투하고 삐칠까? 아주 그런 맘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편견 많은 나는 남자들은 사소한 일상에서는 그런 감정이 없는 줄 알았다. 혹여 있더라도 그런 부분은 애써 무시하고 사는 부류들인 줄 알았다. 대의명분을 중요시 하는 남자들은 사소한 것에서는 의연할 것이다, 라는 왜곡된 남성관을 알게 모르게 지니게 되었음이 틀림없다. 오늘 그것에 관한 그들의 생생한 증언을 들었다. 남자들만 참석하는 독서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그들의 포복절도할만한 솔직담을 경험했던 것이다. 본격적인 독서 토론을 하기 전, 분위기 조성을 위해 회원들끼리 자유발언 시간을 갖곤 한다. 회원 중 한 명이 다른 회원 누군가를 성토하겠다고 나섰다. 물론 농담이었다. 성토 대상은 평소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어느 누구보다 회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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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10.04.05
게재일 2010-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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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의 소설을 만나러 가는 길은 망설임의 연속이었다. 팬 혹은 마니아층을 다수 확보한 작가일수록 그간 나는 적응하기 힘든 편이었다. 입소문이 무성한, 그러나 생각보다 열광하지는 않게 되는 작가들에 입문할 때처럼 폴 오스터도 뭔가 찜찜함을 안겨다주는 작가이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앞섰다. 돌이켜보면 그 찜찜함이란 문학성과 예술성보다는 지나치게 대중이나 상업성을 의식하는 글쓰기를 하는 작가에 대한 저항감 같은 것이었다. 폴 오스터 에게 거는 독자로서의 기대는 대중성을 확보하되, 문학성까지 겸비했으면 하는 맘이었다. `빵 굽는 타자기`를 비롯해 `신탁의 밤`을 거쳐 `달의 궁전`(열린책들, 2000)까지 이르는 동안 내가 내린 결론은? 찜찜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나 당신 팬이 되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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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10.03.29
게재일 2010-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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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소유`에 관한 그간의 내 주장을 철회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법정스님도 아니면서 나는 책 이야기가 나오면 `책을 소유하려고 하지 마세요. 책의 효용은 읽는 것이지 가지는 것이 아니랍니다.` 라고 떠들어대는 편이었다. 무릇 책이란 우애 있게 돌려 읽고, 과감하게 놓아줘야할 때는 놓아줘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하지만 예외가 있으니 바로 `영국화가 엘리자베스 키스의 코리아 1920~1940` (책과함께, 2006) 같은 책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커피얼룩 한 점 묻히지 않았고, 그 좋아하는 밑줄조차 긋지 않았다. 별 생각 없이 화장실 가는 남편이 이 책을 집어들 때 필사적으로 뺏기까지 했다. - 그건 화장실에서 읽을 책이 아니야! 내 절규에 눈이 휘둥그레진 (그간 이런 일은 없었다.)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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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10.03.22
게재일 2010-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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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의 다비식이 마무리 되었다. 화면에 비춰진 장례의식은 소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장중한 관도 화려한 만장도 보이지 않았다. 그럴듯한 기단마저 마련되지 않은 장작더미 속에서 한줌 뼈로 변해가는 스님의 마지막 길은 그래서 더욱 존엄하게 다가왔다. 수습된 유골은 길상사와 송광사 불일암에 나누어 안치된다고 한다. 스님과 조금이라도 더 호흡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쇄골과 산골작업은 49재 이후로 연기한다는 소식도 전해진다. 언론마다 하나같이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다 떠나신 법정스님이라고 소개한다. 스님의 무소유 철학은 온 국민에게 회자될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정작 나는 스님의 책 한 권 변변하게 읽은 적이 없다. 유명세 때문에 읽지 않아도 마치 다 아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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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10.03.15
게재일 2010-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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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텔레비전 드라마에 잘 집중하지 못한다. 어떻게 하면 좋은 글을 쓸 수 있을까 고민하는 입장에서 그런 면은 환영받을만한 건 못된다. 드라마는 삶의 표현 양식 중 하나이다. 갈등, 번민, 절망, 화해하는 인간에 관한 이야기이기에, 삶을 녹여내는 글쓰기와 그리 무관한 일은 아니다. 등장인물들이 내뿜는 촌철살인의 대사와 적재적소의 기발한 에피소드 같은 걸 눈썰미 있게 보면, 분명 글쓰기에도 도움이 될 터인데 쉽게 몰입하지 못한다. 이야기를 따라가거나 주인공에 감정이입 되기도 전에 비현실적인 상황이 전개되면 나는 그만 지겨워져 딴 짓을 하곤 한다. 불륜 설정, 대가족주의에 대한 환상, 신데렐라 만들기, 은근한 쇼비니즘 등이 드라마의 소재가 되어 온 것은 어제 오늘이 아니다. 시청률을 의식해야 하는 방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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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10.03.08
게재일 2010-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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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내미, 짐을 꾸린다. 기숙사 입사 준비물을 챙기는 딸아이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다. 드라이기, 화장품, 머플러 심지어 손톱깎이까지 살뜰히 챙기는 딸아이의 손끝이 야문 듯 재바르다. 나는 안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과 야문 손놀림이 낯선 세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라는 것을. `학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라는 핑계가 아니더라도, 열아홉 나이라면 대개 집 떠나 독립하고 싶어 하리라. 오직 설렘으로 짐을 챙기는 딸아이를 보면서 야릇한 서운함이 이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내 본심이 아니고, 실은 노파심에서 오는 걱정 때문에 잔소리만 잦아진다. 청춘을 건너는 통과의례가 얼마나 아름답고 동시에 잔인한 것인가는 그 시절을 다 보낸 뒤에야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이미 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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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10.03.01
게재일 2010-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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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레드 호세이니는 `천 개의 찬란한 태양`으로 먼저 만났다. 쉽고 편안하게 쓰는 작가였다. 동시에 그런 소설을 쓸 줄 아는 이야말로 진정 좋은 작가라는 것도 새삼 깨달았다. 모든 소설이 쉽게 쓰일 필요는 없겠지만, 스토리텔링이 확보되고, 주제의식이 확실할수록 어렵게 쓸 이유가 없다는 것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이번에 그의 다른 작품을 접하게 되었다. `연을 쫓는 아이`(열림원, 2005)는 `찬란한 태양` 그 이상이었다. 처음, 독서토론 회원 중 누군가가 이 책을 추천했을 때 하마터면 나는 이 책 대신 `태양`을 선정할 뻔했다. 같은 작가라면 먼저 읽어 검증된 책이 다루기 쉬울 것 같아서였다. 한데 마침 책값도 반값 세일 중인데다, 이참에 할레드 호세이니의 확실한 팬이 되자 싶어 쉽게 토론도서로 정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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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10.02.22
게재일 2010-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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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이십대 때 한 여자를 사랑했으리라. 청춘을 지나온, 하자 없는 대부분의 독자가 그러했듯이. 스무 살의 사랑은 파국이 예견되기 십상이지. 사랑이 실체 없이 막막한 것임을 미처 몰랐던 순정한 이들의 이십대가 그러했듯이. 잘 뻗은 메타세쿼이아, 그 적막한 그늘 벤치에 함께 앉았을지라도 사랑은 온전히 내 것이 아님을 알게 되는 것, 그것이 이십대를 건너온 자들의 삶의 톱니바퀴이기도 하지. 작가 김연수는 `세계의 끝 여자친구`(문학동네, 2009)에서 그런 사랑에 대해 말하지. `사랑은 저처럼 뒤늦게 닿기만 하면, 닿기만 하면 흔적도 없이, 자국도 없이 삼월의 눈처럼` 사라져 버리는 것이라고. 시를 쓴 적 있는 작가는 스무 살 시절 메타세쿼이아 나무가 등장하는 시 한 편을 썼을지도 몰라. 작가에게 그 나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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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10.02.15
게재일 2010-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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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레모를 쓰지 않은 선생님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간혹 두피에 땀이 챌 때나 엉긴 이마머리칼을 정리하기 위해 모자를 고쳐 쓴 적은 있었다. 하지만 결코 사람들 앞에서 모자를 벗어 보인 적은 없었다. 어느 날 한 수강생이 물었다. 왜 빵모자를 쓰시냐고. 당연한 대답이 나올 줄 알았다. 작업에 몰두하다 보면, 치장 자체도 거추장스러우니 편리를 위해 모자를 찾는다는 그런 대답. 하지만 내 예상은 빗나갔다. 선생님은 `단 한 순간도 화가라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 모자를 쓴다`라고 답하셨다. 흔히 `화가 빵모자`로 불리는 베레모는 선생님께는 자신을 향한 채찍이자 정체성을 확인하는 매개체였다. 다시 말해 선생님의 자존심이자 예술혼의 상징이었다. 진정한 예술가였던 선생님은 얼마 전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화단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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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10.02.08
게재일 2010-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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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감자들을 만나러 교도소에 갔다 왔다. 독서토론 지도라는 명목이 있긴 하지만 한 번도 그 자체에 의미를 둔 적은 없다. 십여 명의 회원들과 둘러 앉아 서로의 근황과 무탈을 확인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언젠가 회원들 몇이 말했다. 자신들과 너무 먼 작가들의 작품만 얘기하니 공감도 가지 않고 재미가 없단다. 해서 내 작품을 꼭 한 번 토론해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나는 아직 작품집이 없기 때문에 곤란하다고 답했다. 못내 아쉬워하는 그들을 실망시킬 수는 없었다. 해서 그간 발표한 작품 중 그나마 공개해도 별 무리가 없겠다 싶은 것으로 단편 몇 편을 소책자 로 만들어 갔다. 그 교재로 토론하는 동안 나는 쑥스럽기만 했다. 단편 속 에피소드에서 알게 모르게 드러나는 내 자의식을 그들이 재미있어 했기 때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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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10.02.01
게재일 2010-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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