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소화가 집니다. 무너진 꽃잎들, 담장 아래로 붉은 꽃그림자를 이룹니다. 오점의 예견도 없이 추락의 예감도 없이, 찢어지고 오므라들다 마침내 누렇게 타들어갑니다. 담담한 생의 끝자락에서 스스로 길을 내는 저 화흔(花痕)들. 제아무리 화려하고 향기로운 꽃도 지고 나면 찐득한 상처를 남깁니다.그 상처는 아이러니하게도 우연에 기댈 때가 많습니다. 꽃나무로 마당에 발을 들이는 순간, 운명이 된 우연은 상처인 줄도 모르고 꽃을 피웁니다. 그러다 돌풍 실은 바닷바람 한 점에, 여름을 재촉하는 다급한 장맛비 한 방울에 꽃잎을 떨굽니다. 일견 화
도서관에서 잠시 상주작가로 일할 때였습니다. 일찌감치 집을 나서곤 했습니다. 주차 공간을 확보한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아침 시간을 마디게 활용하기 위해서였지요. 중앙 출입문을 통과하면 미화 담당 여사님이 가장 먼저 반겼습니다. 연두색 앞치마를 두른 채 대걸레 하나로 로비와 계단을 누비는 그녀는 누가 봐도 에너자이저였습니다. 밀대를 쥔 여사님 손끝, 붉은 메니큐어가 그 열정을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고희 넘은 연세인데 환갑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젊고 유쾌한 분이었습니다. 언제 봐도 분양받고 싶은 기운이었습니다.여사님이 마지막
김살로메. 제 필명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이름에 관심을 보입니다. 특이한 이름이네요,라며 호기심을 보이거나 세례명이죠,라고 눈치 빠르게 되묻곤 합니다. 호의적인 그들은 눈빛으로 ‘진짜 이름은 뭐예요?’라고 말합니다. 눈치껏 진짜 이름을 말하는 순간, 빵 터지는 웃음소리.세례를 받던 스무 살 즈음, ‘살로메’라는 세례명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좋아하던 작가 루 살로메를 차용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성녀 살로메와 루 살로메, 중의적 의미의 그 이름은 그렇게 제 곁으로 왔습니다. 세례명은 자연스레 필명으로 이어졌습니
저는 뭐든 잘 버립니다. 안 그래도 좁은 집, 그리 필요치 않은 물건이 여기저기 쌓이는 걸 참아내지 못합니다. 틈 날 때마다 뭐 떠나보낼 게 없나 살피곤 합니다. 보내는 입장에선 홀가분해서 좋고, 떠나는 물건 입장에선 사랑 받을 새 주인이 생겨서 좋고. 버려야만 하는 자로서 저런 변명이나 합니다. 어쨌거나 버리지 못하는 것보다는 잘 버리는 편이 낫다고 말하곤 합니다.우리가 잘 버리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알뜰 콤플렉스’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저와 동시대를 지나온 이들은 아껴야 잘 산다,라는 말을 캠페인 문구처럼 듣고 자랐습니다
모 출판사에서의 전화. 원고청탁이라면 짐짓 거절 제스처로 만용이라도 부려보겠지만 그럴 리가요. 블로그에 올린 서평을 인용하고 싶답니다. 재발간하는 책 말미에 몇 문장을 인용해도 되겠느냐고 양해를 구합니다. 처음 있는 일이 아닌 걸 보면 편집자들은 자사의 책과 관계 되는 것이라면 구석구석 구글링을 하는 모양입니다. 변방의 글까지 찾아내니 말입니다. 물론 그리해도 좋다고 답했습니다.따옴표로 묶어 보내온 그 문구들을 들여다봅니다. 소설 ‘파이 이야기’에 관한 단상입니다.
블로그 알림창이 뜹니다. 3년 전 오늘 날짜에 올린 당신의 글을 확인하세요. 그런 시절이 있었나 싶게 방치해둔 온라인 공간에서 짧은 글과 함께 사진 몇 장이 보입니다. 로마 스칼라 산타 주변 몇 컷에다 헬레나 씨 부부에 대한 단상이 적혀 있습니다. 스쳐지나가든 오래 곁에 머물든, 따뜻한 인연들과의 시간은 늘 여운을 남깁니다. 정작 본인들은 그런 선한 영향력을 끼쳤다는 낌새조차 의식하지 못하겠지만요.여행에서 헬레나 씨 부부와 저는 같은 조원이었습니다. 초로의 헬레나 씨 남편은 차에 오르면 제일 먼저 일행의 간식이나 안부를 챙겼습니다.
공자와 자공의 수많은 대화 중 ‘좋은 사람’에 관한 부분은 제법 회자 됩니다.자공이 묻습니다.“마을 사람이 다 좋아하는 사람은 어떻습니까?”공자가 대답합니다.“좋은 사람이 아니다.”“마을 사람이 다 미워하는 사람은 어떻습니까?”공자가 대답합니다.“좋은 사람이 아니다. 마을의 선한 사람이 그를 좋아하고, 마을의 선하지 않은 사람이 그를 미워하는 사람만 같지 못하다.”좋은 스승답게 공자님 화법은 에둘러 갑니다. 곧장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이다,라고 말하지 않고 독자로 하여금 두어 번 호흡을 가다듬을 여지를 줍니다. 우선, 공자님이 말씀
여전히 사회적 거리 두기가 강조 되는 나날입니다. 사회적 거리 두기를 잘 실천하고 있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그만큼 가족 간의 물리적 거리는 가까워졌음을 의미합니다. 기숙사 생활을 하던 아들이 코로나를 핑계로 귀가했습니다. 스무 살 넘으면 집 떠나야 한다, 는 생각을 지닌 터라 갑작스런 아들과의 동거가 적잖이 신경 쓰입니다. 일찍이 객지 생활을 한 아이였기에 애틋한 감정이 앞서지만, 며칠 새 불편한 상황들이 그 감정을 섞어버리는 걸로 보아 제 모성에도 이끼 같은 스트레스가 끼나 봅니다.여기까지야 엄마로서 감당할 저만의 상황이니 괜찮은
병원 가는 날입니다. 한 달에 한 번, 흡입기와 천식 비염약 등을 처방 받습니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호흡기내과를 찾는 게 그렇게 달갑지만은 않습니다. 비대면 진료를 받을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간단한 문제만은 아닌 모양입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올 들어 가장 무더운 날씨랍니다. 여름이 채 오지도 않았는데 36도가 넘는데다 습도마저 높습니다. 차문을 열자마자 숨이 막히고 기침이 납니다. 비상용 인삼 캔디 한 알을 머금습니다. 사실 출발할 땐 더운 건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후식으로 달달한 케이크까지 먹은 터라 도리어 상기된 기
1930년 경오생 조갑규 씨는 오늘도 일기를 씁니다. 소일거리로 만지던 재봉틀을 놓아버린 뒤 생긴 습관입니다. 91세, 노동에서 해방 되면 자유를 얻을 줄 알았는데 웬 걸요. 뒤늦게야 무료함이야말로 생의 가장 무서운 적임을 알게 됐지 뭡니까. 버젓한 자식들이 둘레둘레 있으니 사전적 의미로는 독거노인이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매일 일기를 써도 홀로 사는 왕노년의 하루해는 길기만 합니다.또래 할머니들이 그랬듯이 조갑규 씨 역시 평생 ‘심심하다’는 말뜻을 이해할 여가가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열여섯에 시집 와, 농사일에서 장삿길까지
아침마다 음악과 시를 전송해주는 지인이 있어요. 연세도 많은 분이 어쩜 그리 한결 같으신지. 처음엔 송구한 맘에 의무적으로 클릭을 했지만, 요즘은 늦잠을 완벽히 깨우는 마법의 음료수로 삼고 있어요. 눈을 뜨면 습관처럼 찾곤 하지요. 누군가의 수고로 제 하루의 시작이 신선합니다.오늘은 황지우 시인의 ‘겨울산’이 배달되었어요. ‘너도 견디고 있구나// 어차피 우리도 이 세상에 세 들어 살고 있으므로/ 고통은 말하자면 월세 같은 것인데/ 사실은 이 세상에 기회주의자들이 더 많이 괴로워하지/ 사색이 많으니까// 빨리 집으로 가야겠다’.몸은
수목원 나들이를 갔습니다. 변덕 앓는 제 맘과 달리 꽃 피고 지는 일은 어쩜 저리 한결 같은지요. 숲 천지 꽃 잔치, 신록이 한창입니다. 오월 동산에 취한 것도 그만인데, 운 좋게 샤스타데이지까지 만났습니다. 전망 좋은 언덕, 한울타리 가득 흰 꽃을 피워 올립니다.데이지 종류는 제가 좋아하는 꽃입니다. 경계가 분명한 꽃이지요. 뒤집어 보지 않는 한 드러나지 않는 꽃받침이며, 꽃 필 자리보다 한참 밑에 자리 잡은 이파리, 가시 없는 줄기마저 곧게 뻗어 꽃송이와 부수적인 것들이 뒤섞이지 않습니다. 심지 곧고 깔끔하며 소박한 꽃이지요.데
바닷가를 지나다 트럭 행상을 만났습니다. 한 차 그득 쌓아놓고 파는 것도 놀라운데, 그 내용물이 한라봉이라는 데서 더욱 놀랍니다. 감귤이 흔해진 지는 오래지만 업그레이드 된 파생 종류마저 흔하디흔한 세상이 올 줄 몰랐습니다. 한 컷 담겠다는 양해를 구하며 신기해하자, 사장님 왈, 제주 농장과 직거래하기 때문에 신선한 상태로 박리다매가 가능하다나요.제가 귤을 처음 본 것은 1974년 겨울 무렵이었어요. 삼촌이 귀향길에 사온 것이지요. 깡촌 아이였던 제게 귤이란 어린이 잡지책 광고에서나 볼 수 있는 상상의 과일이었지요. 주황빛 부드러운
어머니는 아직도 혼수방에 나가십니다. 그곳에서 당신 노년의 뜰을 가꾸듯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하십니다. 구순을 넘긴 어머니에게 바느질은 벅찬 노동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를 비롯한 오남매 어느 누구도 애써 그것을 말리지 못합니다. 어머니의 손끝이 평생 바지런함과 친구해왔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소일거리가 있다는 게 당신 여생의 활력과 건강을 위해서도 다행일지도 모릅니다. 한창 때의 체력에 비할 바 못 되지만 천성이 밝고 재바른 어머니는 그렇게 해서라도 자식들 앞에서 당신 건강을 증명해 보이는 것이지요.그해 봄,
몸살이 났습니다. 팔다리가 쑤시고 기침도 납니다. 금세 나을 거라며 지인이 한의원을 소개해줍니다. 사흘 치의 약만 쓰면 된다는 선생님의 호언과는 달리 기침이 수그러들지 않습니다. 치료제를 쓰는 건 더 이상 의미 없으니 보약으로 바꿔 보잡니다. 다 낫지도 않았는데 원기 회복제로 몸을 다스린다는 게 이해되지 않아 조심스레 여쭙니다. 염증을 가라앉힌 후에 약재를 쓰면 좋지 않겠느냐고. 순간, 의자에 앉은 선생님 엉덩이가 들썩입니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여기서 진료를 끝내겠다는 신호입니다. 떼밀리듯 집을 향하는데 뭔가 서럽습니다.여기까진
봄볕이 따습습니다. 겨우내 갇혀 있던 화분들을 베란다 창턱에다 내놓았었지요. 다육이들 작은 잎새마다 새순이 돋고, 빨갛거나 노란 기왕의 잎들도 선명한 때깔을 자랑합니다. 물리적 거리 두기 캠페인으로 갑갑하지만, 앙증맞은 잎들을 살피노라면 그나마 작은 위안이 됩니다. 몇몇 화분을 더 들여야지 하는 핑계를 앞세워 봄 마중을 나섭니다.봄을 보채는 온갖 물상들이 점멸등처럼 깜박입니다. 차창으로 스며드는 먼빛의 아른거림을 시작으로, 아파트 꾸밈 벽 바위틈을 뚫고 핀 영산홍의 춤사위며, 물기 서린 바닥으로 내려앉는 벚꽃들의 분분함이 차례로 어
이번 주부터 김살로메 작가의 포토 에세이 ‘뜻밖의 시선’을 연재한다. 일상에서 건져 올린 풍경과 사람의 순간을, 사진 곁들인 사색의 글로 갈무리하는 코너이다. 작가의 소박한 시선이 독자들과 호흡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심상치 않은 나날입니다. 전 지구촌을 장악한 바이러스 무리에 당황스러움과 두려움이 동시에 몰려옵니다. 폭풍처럼 진군하는 저 기세 앞에서 평범한 일상이 꺾인 지 오래입니다. 안타깝게도 사회적 유폐의 시간이 친구처럼 따라붙는 날들입니다.갇힌 세상, 여유가 넘쳐납니다. 책을 읽거나 글을 써보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합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