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시 봄이다. 우수도 있고 경칩도 있고 꽃샘바람도 지나간다. 베란다에 죽은 듯이 있던 화분들이 어느새 생기를 보여 주듯 삶의 시간도 분명 꽃한 송이 피우는 그 순간을 위해 이어져 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주옥같은 시간들은 어디에서 왔다가 언제 사라져 버리고 마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사람마다 각자의 시간들은 지니고 있는가 보다. 어느 때부터 인지 꽃의 순간들은 그렇게 내 마음속에 머물러 떠나지 않은 채 남아 그림 소재로 되살아나 한 송이 꽃을 그리고 있다. 초록이나 푸른빛이 색색이 펼쳐진 바탕 한가운데 작게 핀 하얀색 혹은 노란 꽃 한 송이는 바로 순간순간의 삶을 대신 말하고 있다. 인생에서 가장 화려하고 즐거웠던 어느 순간이 되기도 하고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외로
공예의 쓰임은 불변의 가치로서 공예의 장르적 고유성이며 존립의 근거라고 말할 수 있다. 과학 기술과 물질 문명의 발달로 일상의 효율을 크게 향상 시키고 인간 생활에 편리한 산업 제품의 개발로 인하여 소비욕구를 충족 시키고 남음이 있다 하더라도 공예의 쓰임은 여전히 유효하다. 산업화의 단계를 넘어 정보화 사회를 살고 있는 지금, 우리 사회의 여러 징후들을 통해 감지되듯 머지않아 감성이 새롭게 가치의 중심이 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이러한 정서를 미루어 보건데 수공예의 새로운 가치 즉 쓰임의 공예에 초점이 맞추어 진다. 좋은 공예가는 어느 시기를 막론하고 생활문화를 견인하는 주체이다. 이러한 생활문화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다도는 우리의 정서를 풍요롭게 한다. 차를 마시면서 일상에 지친 몸과 마음의
유니콘은 흰오릭스를 모델로 한 전설상의 동물로 일각수라고도 불린다. 이름 그대로 한 개의 뿔이 달려있는데, 모든 힘이 이 뿔에서 나오며 적을 만나면 칼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여서 갑옷이나 방패를 뚫어버리지만, 해독 능력이 뛰어나 중세 유럽에는 그 뿔을 담그기만 해도 바다나 호수 전체가 깨끗해진다고 믿었다. 또한, 유니콘은 영험한 능력이 무한대로 샘솟는 이 뿔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힘이 세고 행동이 민첩해서 정상적으로는 도저히 붙잡을 수가 없지만, 순결한 젊은 처녀를 좋아하여 그 순결한 냄새를 맡고 처녀 앞에 앉아 무릎 위에 머리를 눕히고 잠들지만 , 순수하지 않은 처녀는 그 자리에서 큰 뿔로 처녀를 주이는 잔혹함도 보여준다 한다. 따라서 유니콘의 본성은 사납고 길들지 않은 짐승이지만, 격렬하지만 착하
한국화가 김동광 나의 작업은 한지죽의 요철성이 가지는 시각적 효과에 착안한 작업을 한지에 그림을 그린다기 보다는 신라의 석공이 자연 상태인 돌을 투박하게 쪼아 마지막에는 자신이 원하는 형상이 드러나게 하듯이 재료상태인 한지를 계획에 따라 장인적인 공력을 기울이며 완성해간다. 작업 과정은 처절함이 아니라 작업과정 자체에 대한 즐거움과 여기에 결과적으로 이루어지는 형상을 통하여 삶의 수용하고 그러한 수용을 통해서 모든 것이 의미를 가지면서 표출되는 환희심이라 하겠다. 대상의 객관적인 사실을 드러내거나 설명을 하고자 함이 아니라 작품을 통해서 즐거이 대면할 수 있는 내면의 조형언어인 나무, 꽃, 새, 동물, 종 등을 심상의 표현 언어로 재구성하여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대상에
나에게 되살아나는 영상들과 그것들을 표출하는 내적의미를 분석하기 위해 우주이미지에 접근을 시도했다. 무한한 우주로부터 영감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즉흥성, 자연발생적인 표현양식에서 우주는 이미지화 되고 잠재의식 속에 이미지를 무의식적인 작위속에서 형상을 발견해 나가며 작업을 하였다. 우주를 그리면서도 무언가 가슴속에 자리한 어떤 문제에 대해 인식하게 되었고 내면에 자리한 응어리의 완전한 해소를 초래하지 못했다는 느낌이 좀 더 본질적인 내면의 형태를 추구하던 중 가변적이고 단순하고 명료한 형태의 화면으로 옮겨지기 시작했다. 고요한 우주에 텅 빈 여백이 훨씬 더 근원적이며 무한한 자신의 상상력을 주기도 했다. 근작에서는 관념에 대상으로 사유와 사색을 통해 명상에 공간을 이끌어내는 부표를 상징의 매체로 이용
내 작품은 우리의 전통적인 민간 그림으로 전해져 온 민화에 대한 재해석과 현대적 변용에 근거한다. 그동안 민화를 현대의 감각으로 민화를 어떻게 재해석해낼 것인가에 착안해 다양한 작업을 전개해왔다. 바탕재료로는 옛날 비단(양단)이나 현대의 캔버스 등을 이용하기도 하고, 패널에 직접 천을 올려 수많은 공정을 거친 다음 그 위에 채색하고 이미지를 그려 올리는 식으로 작업하기도 한다. 주로 붉은 색 바탕을 선호하는데, 이는 생명에 대한 찬미와 부귀 및 벽사의 상징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붉은 색 바탕 위에 새겨진 목단은 부귀영화의 길상적인 의미를, 원앙 한 쌍은 부부의 신의와 금실을, 또한 책거리 그림 속의 참외와 수박은 다산(多産)을, 흰색 호랑이는 액운을 몰아내는 벽사의 의미 등을 지니고 부각시킨다.
온 천지가 하얗다. 전국에 눈 폭탄이 며칠째 내리고 있지만 새순은 너무나 밝은 모습이었다. 잘린 나무막대기 둥치에 새순이 돋았다. 다른 설치 전시를 하려고 삽자루 굵기보다 약간 큰 막대기를 구할 때 여벌로 몇 개를 더 준비했다. 작업 구상을 위해 작업실 귀퉁이에 자루에 넣어서 갈무리했다. 시간이 흐르고 어느 날 나뭇가지가 필요해서 자루를 열었다. 나뭇가지에 움이 터 있는 것을 발견했다. 버드 나뭇가지에 숨겨져 있던 생명에너지가 나타나 신기하게도 새순이 돋아났다. 생명력은 사찰 전설에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다. 어느 고승의 지팡이가 생명을 가져 수백 년을 훨씬 넘긴 몇 아름드리나무가 되었다는 것은 멀리 있던 사실이 아니라 주변에 많이 있는데 우리가 자루를 열어 보지 못했던 것이다. 생명력은 우리의 우
모두들 외롭다고 말한다. 그래서 무엇인가에게 빠져들려고도 하고 일에 빠지든 독서를 하든 음악, 그림그리기, 스포츠, 여행, 그렇게 외로움을 채우려고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작업을 하다보면 외로움이란 자체를 즐긴다. 다시 말해 외롭지 않으면 작업할 수 없다. 그 속에 내 작품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그림은 해방과 자유이며 감옥과 구속의 존재이다. 반면, 작가는 그림을 통해 다른 사람과 만나는 공간이 되며 작가와 타자의 지적여행을 위한 연결고리가 되는 것이다. 나의 최근작은 보다 열려진 공간으로서 창시리즈로, 어울림, 시간 여행처럼 호분을 통한 두터운 질감표현으로 나타나는데 이제는 과거와 현재 모두를 담아내는 일정한 내재율처럼 스며드는 뜨거운 율동의 느낌을 가진다. 거기에는 일정한 호흡이 있고 동적
초등학교 시절, 계산성당 옆 아담한 2층 건물의 서실에서 일점일획을 가지런히 그은 시간들이 필묵을 처음 시작한 기억들이다. 하루하루 수 십장의 신문지 위에 굳은 획들이 펼쳐지고 역입 도출을 시작으로`영자팔법`을 거쳐 당대 서가인 안진경의`쌍학명`을 만나게 된다. 그 후 계산 서실이 없어지고 대봉동 골목안의 한옥집, 죽농 서동균 선생 자택, 아담한 사랑방에 예술지망생 까까머리가 마당 쓸고 마루 닦으며, 서화에 심취한다. 감수성 예민한 청소년기에 동양미술에서의 점과 선은 어떻게 이루어지며, 전각에서의 고졸미는 어떠한가라는 것이 나를 다듬고 있었다. 진나라의`왕희지``왕헌지`부자의 얘기를 들려주시던 선생의 낭랑한 음성과 동양예술의 다양한 경험을 습득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것이 어린 시절부터 청소년기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신묘년의 해가 떠올랐다. 토끼는 뒷다리가 길어 내리막에는 서툴고 오르는 것을 잘한다고 한다. 인생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다. 올 한해는 모든 이들에게 내려오는 일이 없이 오르는 한해이기를 염원한다. 건강이 최상에 오르고, 삶의 희망과 열정이 끝도 없이 피어오르는 한해였으면 한다. 새로운 한해의 시작, 새롭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새롭다는 것은 단순하게 새로움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새로움에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상상하게 하는 에너지가 있다. 상상할 때 꿈꾸기를 시작하고 꿈을 꿀 때 삶의 가치란 의미를 알게 된다. 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나에게 있어서 포항은 새롭기 그지없다. 포항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철의 연금술`이라는 주제의 전시에 초대돼 처음 찾은 포항의 밤은 행
이름 모를 병에 걸린 용왕을 위해서 육지에 토끼의 간을 구하러 간 자라 이야기로 시작 되 는 `별주부전`은 어린 시절 즐겨 들었던 전래동화 중 대표작이다. 2011 신묘년 토끼해를 맞으며 순간의 방심으로 목숨 까지 잃을지 모르는 상황을 슬기롭게 극복하는 토끼의 지혜와 충성심 깊은 자라의 우직함이 깊은 감동으로 전해주던 별주부전의 줄거리가 새삼스러워 진다. “수소문 끝에 토끼를 찾아내 용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주겠다는 자라의 꼬임에 꾀 많은 토끼는 여러 번 의심을 해보지만 결국 재물의 욕심에 이성을 잃고 용궁행을 택하게 된다. 하지만 용궁에 와서야 비로소 자신이 속았다는 걸 안 토끼는 깊은 좌절에 빠지지만 지혜를 발휘해 위기를 기회로 극복해 낸다. 자신의 간은 몸 밖으로 빼낼 수 있는데, 마침 산속에 두고
올해도 어김없이 색색의 알전구들이 가로수를 장식했다. 행복한 성탄을 알리고 새해를 맞이할 사람들의 기대와 설렘이 도시 전체를 아름답게 뒤덮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 가족들과 오붓하게 저녁을 먹으러 가는 길에 딸 아이가 말했다. “가로수에 이렇게 알전구를 감아놓고 밤새도록 불을 켜놓고 있으면 나무들이 잠을 못 잔대요. 나무들이 불쌍해, 아빠.” 딸 아이의 소박한 걱정에 가슴이 멈칫했다. 연말이면 으레 연중행사처럼 꾸며놓은 도심 속 아름다운 불빛을 나는 그저 무심코 지나치기만 했었다. `미관상 좋다`는 이유로, 단순히 축제분위기를 내보자는 이유로 나무들이 고충을 겪는다면 이는 안 될 일이다. 바야흐로 낮은 곳으로 사랑이 흐르고, 모든 만물들에게 행복이 충만한 크리스마스가 아닌가. 명멸하는 알전구
지난 2010년은 내가 인생을 살아온 지 88회를 맞은 미수(米壽)였다. 쌀이 싹을 피워 밥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공기와 물, 농부의 손길이 88번씩이나 갈 정도로 많은 정성이 필요하다는 말에서 유래된 `미(米)`처럼 나 역시 예술가로 한 평생을 지내왔으며 이제서야 예술에 대해 어렴풋하게 알 것만 같다. 하지만 그토록 사랑했고 열정을 쏟았던 나의 예술세계도 쇄약 해져 가고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지 않는 육신 앞에서는 한낮 노화가(畵家)의 욕심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일찍이 고향 이었던 흥남(함남)을 등지고 1947년부터 10여 년간 지냈던 경북 포항은 나의 인생에 있어 교육자이며 예술가의 길을 걷게 해 준 참으로 고맙고 인연이 깊은 도시였다. 전시장이라고 하기에는 보잘 것 없던 공간이었지만 내 생애 첫 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