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어(長魚)는 미끄럽다. 맨손으로 잡으면 미끈거리며 빠져나간다. 정체를 알기도 힘들다. 장어의 정체를 비교적 정확하게 이야기한 것은 손암 정약전(1758~1816년)의 ‘자산어보(玆山魚譜)’다. 장어를 ‘해만리’라고 표기했다. 정확하게는 뱀장어, 민물장어다.“큰놈은 길이가 1장(丈)에 이르며, 모양은 뱀을 닮았다. 덩치는 크지만, 몸이 작달막한 편이고 빛깔은 거무스름하다. 대체로 물고기는 물에서 나오면 달리지 못하지만, 해만리만은 유독 뱀과 같이 잘 달린다. 머리를 자르지 않으면 제대로 다룰 수가 없다. 맛이 달콤하고 짙으며 사람에
상추쌈을 좋아한다. 돼지 불고기 얹은 상추쌈, 마늘, 된장과 더불어 먹는 고등어구이 상추쌈, 맨밥에 강된장만 얹은 상추쌈도 좋다. 세상의 모든 상추쌈을 좋아한다.상추쌈은 슬프다. 아린다. 쓰라리다. ‘경북매일’ 2015년 6월 8일 기사다. 제목은 ‘6월의 울림, 명예로운 보훈을 기대하며(필자 이칠구 전 포항시의회 의장)’다.“어머니, 어서 전쟁이 끝나고 어머니 품에 안기고 싶습니다. 어머니,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꼭 살아서 다시 어머니 곁으로 가겠습니다.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아,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쇠고기에 대한 열망은 강했다. ‘벌’도 무거웠지만 ‘열망’이 벌을 넘었다. “소를 불법 도축하면 사형, 전 재산을 몰수한다”라고 해도 소 불법 도축은 사라지지 않았다. 숙종 시대를 지나며, 소를 도축하는 이들을 부르는 이름이 ‘백정’으로 굳어진다. 그 이전에 사용했던 ‘화척’ ‘양수척’ ‘재우적(宰牛賊, 소 도축하는 도둑)’은 서서히 사라진다. 이민족으로 지냈던 이들이 조선 사회에 동화된다. 원래는 ‘도둑’이라고 불렀다. 우리 백성이 아니라는 뜻이다. ‘백정’은 하층민이지만 조선사람이다. ‘산속에서 모여 살면서 자기들끼리 결혼하고,
이른 새벽이었다.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할머니의 목소리. “쟈, 오늘 먼 길 가는데 콩대도 좀 넣고. 여물 잘 끓여서 멕여라.” 아버지의 대답. “예, 그러잖아도, 콩대 마이 넣고, 보리쌀도 쫌 넉넉하게 넣니더.”1960년대 후반 어느 겨울 새벽, 외양간에는 누렁이가 여물을 먹고 있었다. 우리 집에서의 마지막 식사. 우시장에 팔려나간 누렁이는 도살장으로 끌려갔을지도 모른다. 저녁 무렵, 아버지는 오백 원 지폐 한 뭉치와 어린 송아지 한 마리를 데리고 오셨다.소는 식용의 대상이 아니었다.
봄날이었다. “병아리 손도 빌린다”라고 할 정도로 바쁜 모내기 철이었다. 열 살도 되지 않은 어린아이도, 병아리 대신 들일에 ‘동원’되었다. 새참으로 내놓을 막걸리 배달. 대단한 양은 아니고 작은 양은 주전자 둘이었다. 양은 주전자 주둥이에 젓가락 네댓 벌을 꽂고 제법 먼 논둑길을 따라 우리 논으로 막걸리 배달을 갔다.저 멀리 모내기를 하는 우리 논이 보였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찰랑찰랑 막걸리가 움직였다. 주전자 주둥이로, 뚜껑 사이로, 막걸리가 조금씩 흘렀다. 아깝다. 귀한 술이 쏟아지다니. 논둑 언저리에 주저앉아 막걸리를 홀
병아리는 태어나서 처음 본 대상을 어미로 알고 따른다. 외지인에게 포항물회도 마찬가지다. 처음 만난 ‘포항물회’가 ‘진짜 포항물회’가 된다. 불행히도 처음 먹어본 포항물회가 수준 이하면? 포항물회는 맛없는 음식, 엉터리가 되고 만다.포항물회 사이에 맹물과 고추장, 물엿 덩어리 초고추장, 육수 슬러시를 둘러싸고 ‘다툼’이 진행 중이다. 외지 관광객들은 알 리가 없다. 포항 토박이들은 알면서 짐짓 모른 체한다. 몇 차례 물어보면 “나는 이 집 간다”라고 말한다.회(膾)와 물회 이야기다. 물회도 회의 한 종류다. 회의 역사는 길지만, 물
조금은 지저분한(?) 풍경으로 오이, 참외 이야기를 시작한다.1960년대 농촌, 초가집 마당 한 귀퉁이에 거름더미가 있었다. 열 살이 되지 않았던 나는, ‘통시’에 가지 않고 거름더미에 바로 ‘응가’를 할 수 있는 특권이 있었다. 어린아이니까. 무더운 한여름의 어느 저녁. 거름더미에 응가를 했다. 며칠 후 거름더미에 싹이 돋았다. 아, 그 무렵 먹었던 참외의 씨앗. 아름다운 참외 넝쿨은 여름 내내 죽죽 뻗었다. 뿌듯한 심정으로 거름더미에서 아름답게 자라는 참외 넝쿨과 꽃을 바라봤다. 이제 곧 열매를 맺을 것이다. 샛노란 참외가 달릴
동양에서는 문어를 즐겨 먹는다. 일본 ‘다코야키(takoyaki)’는 문어가 들어간 풀빵이다. 중국도 오래전부터 문어를 먹었다. 우리는 문어를 귀하게 여겼다. 제사상에도 오른다. 귀한 선물로도 쓰였다. 고려 시대, 목은 이색(1328~1396년)도 동해안 영일만에서 잡은 문어를 선물로 받았다.문어(文魚)는 머리가 크다머리가 크니 공부를 잘한다? 그래서 문어라고 부른다는 속설이 있다머릿속에 먹물이 들어 있어서 문어라 부른다는 이야기도 있다◇ 목은, 영일만의 문어를 선물로 받다‘목은고_시’의 일부다. 제목은 ‘동경(東京)의 윤공(尹公)
이제는 잊어버린 단어가 있다. ‘청요릿[淸料理]집’ ‘유니짜장’ ‘유슬짜장’ 등이다. 이 단어를 기억한다면 50대 이상 나이다. 청요릿집은 중식당의 옛 이름. 청나라, 중국 음식을 파는 집이란 뜻이다.유니짜장[肉泥炸醬]은 고기 혹은 고기와 채소를 잘게 다져서 고명, 양념으로 쓴다. 고기는 돼지고기다. 유슬짜장[肉絲炸醬]은 고기, 채소를 길게 썰어 실처럼 만든 후 고명으로 쓴다. 이제 청요릿집, 유니짜장, 유슬짜장은 대부분 사라졌다. 화상(華商)이 아닌 한국인이 운영하는 중식당이 훨씬 많아졌다. 서울 짜장면, 한국식 짜장면중국인들이
열 살 무렵, 시골에 살았다. 어느 날 이웃집에 놀러 갔다. ‘계란밥’이 나왔다. 쌀 조금에 보리쌀과 좁쌀을 잔뜩 넣은, 가난한 집의 식사였다.노란 좁쌀이 달걀과 비슷한 색깔이었다. 그 후 오랫동안 ‘계란밥’ 타령을 했다. 그나마 밥은 먹고 살 정도의 중농. 할머니는 철없는 손자의 ‘계란밥’ 타령을 듣다못해 말씀하셨다. “쟈, 저러다 병나겠다. 고마, 계란밥인지, 좁쌀밥인지 해조라.”그로부터 몇 번 ‘계란밥’을 먹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오래지 않아 그게 달걀이 아니라 좁쌀이라는 사실은 알아차렸다. 밥그릇에 담긴 작고 노란 좁쌀 알갱
병자호란(丙子胡亂·Qing invasion of Joseon)은 1636년 12월28일(양력)부터 1637년 2월24일 사이에 있었다. 두 달간의 짧은 전쟁. 상처는 깊었다. ‘삼전도의 굴욕’을 넘어서는 참혹한 피해. 멀쩡한 조선사람 50만 명(추정)이 청나라로 끌려갔다. 대부분 노예로 팔리고, 평생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전쟁이 끝난 불과 예닐곱 달 후, 원수의 청나라에서 사신이 왔다.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했던 국왕 인조다. 청나라 사신에게 잘 대할 수도, 소홀할 수도 없는 처지. 돼지고기 이야기가 나온다. ‘승정원일기
서울 토박이가 물었다. 솔직히 표현하자면 ‘여자애같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얘, 너 대구에서 올라왔지? 너 시골 출신 맞지?”서울 토박이들의 특징 하나. 서울을 제외하면 죄다 ‘시골’이다. 이런! 광주도, 부산도 죄다 ‘시골’이다. 당연히 대구도 시골이다. 그래 인정하자. “응, 나 대구 출신이야!”또 묻는다. “그런데, 진짜 대구에서는 돼지고기로 국을 끓이니?” 한참을 못 알아들었다. 돼지고기로 국을 끓이지. 그럼, 끓이고말고. 그게 얼마나 맛있는데. 한참을 쳐다보다가 “그래 돼지고기 국 맛있다”라고 하자 못
개인적이고 엉뚱한 ‘추억’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만두와 ‘50환짜리 백동전’ 이야기다. 50환짜리 백동전은 1959년부터 1975년까지 통용됐다. ‘5원’짜리 동전으로 썼다.1970년 무렵. 대구 시내버스 차비가 4원에서 6원으로 올랐다. 50% 인상. 왕복 차비가 8원에서 12원으로 올랐다. 통학하던 중학생들은 끔찍해졌다. 10원 지폐 한 장 받아서 8원 쓰고, 나머지 2원으로 군것질을 했는데 그게 불가능해졌다. 군것질은 학교 앞에서 팔던 ‘납작만두’였다. 이제 납작만두를 먹으려면, 1시간 거리 하굣길을 걸어가는 수밖에 없다.
아마도 늦봄 무렵이었을 터이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1970년대 후반, 서울 장충동 하숙집. 지방에서 올라온 대학생 예닐곱이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비 오는 늦은 오후. 하품을 댓 발이나 길게 하면서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주제가 ‘먹고 싶은 고향 음식’으로 튀었다. “이른 봄 첫 부추는 아들에게 주지 않고 사위를 준다” “아들이 양기를 세우면 며느리가 좋고, 사위가 양기를 세우면 딸이 좋다”는 희한한 표현이다.경상도 출신 하숙생이 불쑥 내뱉었다. “오늘 같은 날, ‘정구지 찌지미’나 ‘부치 무쓰모’ 좋겠다.”
해장, 해장국은 없었다.술꾼들의 ‘뜨악’할 얼굴이 눈에 선하다. 무슨 소리? 어제도 과음을 했다. 이게 어디 하루, 이틀인가? 지금도 속이 쓰리다. 점심에는 뭘 먹고 속을 풀까라고 벼르고 있다. 뭐? 해장, 해장국이 없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이런 표정들이 눈에 선하다.방송 ‘먹방’ 프로그램에서도 ‘해장국’은 단골 메뉴다. 비타민이 많고, 미네랄이 많다고 야단법석이다. 멀쩡한 한의사, 의사들까지 해장국 예찬에 한몫 거든다. 신문, 잡지, 개인의 블로그, 유튜브도 마찬가지다. 자신만의 비법이 있다. 대한민국은 ‘해장천국’이다.
비빔밥을 적확하게 표현한 이는 비디오 아티스트 고 백남준 선생이다. “비빔밥은 2개 이상의 문화가 같은 공간에서 충돌, 융합하여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했다.“‘한국에 비빔밥 정신이 있는 한 멀티미디어 시대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 (중략) 실제로 나는 서로 섞일 것 같지 않은 이질적인 것들을 비빔밥처럼 버무려 새로운 것을 만드는 걸 즐겼지. 쉬운 예로 서울 아시안게임을 위해 만든 ‘바이 바이 키플링’을 볼까. 서양 연주가가 음악을 연주하는 모습, 일본 마라톤 선수가 결승 테이프를 끊는 장면, 서양의 타악기 연주와
오래 전, 미나리는 ‘각별’했다.2019년 봄, 청도 한재의 미나리는 어수선하다.조선왕조실록 세조 11년(1465년) 5월10일의 기사다. 제목은 ‘침장고(沈藏庫)와 사옹방(司饔房)의 관리를 추국케 하다’다. 미나리 때문에 왕의 부마와 친족, 고위 관리 여러 명이 벌을 받는다. 큰 사단이다. 550년 전, 각별했던 미나리 이야기다.“의금부에 전지하기를, ‘침장고의 관리가 바친 채소는 지극히 거칠고 나쁜데다 또 몸소 친히 바치지 않았으며, 사옹방의 관리와 환관들도 또한 검거하지 아니하여 모두 마땅하지 못하니, 추국하여 아뢰라’ 했다.
닭은 억울하다.‘꿩 대신 닭’이라는 표현이 있다. 꿩이 좋다, 꿩이 닭보다 맛있다는 뜻이다. 꿩이 ‘갑’이다. 의문스럽다. 과연 꿩이 닭보다 나은 존재일까? 그렇지 않다. 오해다. 꿩보다 못하다니, 닭으로선 억울할 노릇이다.왜 꿩이 먼저일까? 간단하다. 꿩은 공짜다. 요즘은 꿩이 없다? 그렇지 않다. 꿩은 지금도 있다. 꿩을 잡는데 품이 많이 드니 기른다. 예전에는 ‘인건비’ 개념이 없었다. 꿩은 공짜고 닭은 집에서 기르던 것을 잡아야 하니 ‘재산’이 줄어든다. 우리는, 닭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20여 일 기른 어린 병아리를 몸보
◇ “그라마 다른 데 사람들은 뭘 먹는교?”네댓 해 전 겨울 저녁이었다. 늦은 시간 배가 제법 출출했다. 경북 예천 읍내. 식당들도 고만고만하다. 자영업자 한 명, 농사짓고 소 키우는 이 등 토박이 셋에 예천 출신 출향인과 필자 등 5명 일행이었다. 가까운 분식집(?)으로 갔다. ‘태평초’나 먹을 겸. 난로 위에 먹음직한 태평초가 놓였다.태평초는 신 김치가 주인이다. 더러는 메밀묵이 더 중하다 하지만 역시 듬성듬성 썰어 넣은 신 김치가 태평초 맛을 좌우한다. 신 김치, 기름진 돼지고기, 메밀묵. 여기에 두부를 썰어 넣어도 좋다. 고
그도 미처 몰랐을 것이다. 폭군으로 몰려 제주로 유배 갔던 광해군(1575~1641년 7월1일, 재위 1608~1623년). 설마 “음식을 얻어먹고 벼슬을 팔았다”는 지청구를 들을 줄은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대단할 것도 없는 더덕, 김치, 잡채 등을 얻어먹고 국왕이 벼슬을 팔았다는 오명이다.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반정(反正)’에 성공한 이들 혹은 광해군에게 해를 입었던 이들이 ‘광해군일기’를 기록했다. 그들은 자신의 개인 문집에도 기록을 남겼다. 그 내용들을 모두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다.“(전략) 계집종이 소리를 지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