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宦官)은 통상 내시(內侍)라고도 불렀다. 환관들은 거세된 남자로, 궁에서 일하는 직책이다. 이들은 내시부(內侍府)에 속해 대궐 안 음식물의 감독, 왕명의 전달, 궐문의 수위, 청소 등의 임무를 맡았다. 오늘날로 치면 청와대 비서관의 일종이었다. 내시부의 정원은 140명. 그들은 왕과 왕비 등 왕족을 모신 유일한 남자 궁인이었다.내시부의 으뜸 벼슬은 왕의 식사와 수행비서 역할을 하는 종2품 ‘상선’이었다. 종2품은 조선시대 제4위 품계로 그동안 ‘내시’하면 떠올리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권력을 보여준다. 그 대표적인 예를 중국에
1690년(숙종 16) 10월 12일, 사늘한 바람이 간간히 불어오는 들녘에는 가을걷이가 한창이었다. 외지 손님이라곤 손꼽힐 정도로 한적하던 경상도 장기 땅이 갑자기 시끌벅적해졌다. 한양에서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허겁지겁 내려왔고, 장기현감은 이들을 수발하느라 혼비백산이었다. 이유를 들어보니 작년 2월에 이곳으로 유배를 왔던 영의정이 갑자기 객사를 했다는 것이다. 죽은 사람의 직책도 그렇거니와, 그가 다름 아닌 김상헌(金尙憲)의 손자인 김수흥(金壽興)이었다. 그의 명성하나로도 전국의 이목이 경상도 장기현으로 집중되기에는 충분했다.김상
우암의 은행나무. 우암 송시열 선생이 심은 것이라고 한다. 장기초등학교의 교목이 은행나무인 것도 여기서 연유된 것이다. 원목은 고사하고 그 뿌리에서 난 손자나무가 다시 자라나 그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우암 송시열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사람마다 호불호의 견해 차이가 있다. 하지만 그가 조선사회에 끼친 영향력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는다. 그는 에 3천 번이나 이름이 등장한다. 사약을 받고 죽었음에도 유교의 대가들만이 오른다는 문묘(文廟)에 배향되었고, 전국 23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그의 죽음은 신념을
과옥죄인(科獄罪人)은 과거 시험에서 부정을 저지른 죄인을 말한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시험이 있는 곳이면 부정행위는 있게 마련이다. 조선시대 유배형벌 중 ‘유 3천5백리’에 해당하는 경상도 장기현에는 조선조 내내 과옥죄인들의 유배행렬이 끊어지질 않았다.과거 제도는 중국 한나라 때부터 시작되었다. 우리나라에도 788년 신라 원성왕 때 ‘독서출신과’라는 시험이 있었다. 독서 능력에 따라 상중하 3품으로 나누어 등용하였던 제도이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의 과거는 고려 광종 때 시작되었다. 이후 조선 말기까지 과거 제도는 우리나라 정치 문화에
1628년 (인조6) 2월 4일, 인조가 반정으로 왕권을 잡은 지 6년이 될 무렵이었다. 설명절 분위기가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류백수(柳栢壽)라는 낯선 사람이 고을에 들어섰다. 절충장군(정3품 무관)이었던 그는 그냥 몸만 온 것이 아니라, 최근 몇 년간 한양에서 회오리쳤던 몇 가지 역사적 사건들까지 짊어지고 왔다.이야깃거리의 실마리는 광해군이었다. 선조는 한참 동안 정비 소생의 아들이 없었다. 대신 후궁 출신 사이에서만 13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 중 공빈김씨(恭嬪金氏)와의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난 사람이 광해군이다. 여러 가지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도와 준 세력들이 있었다. 세조는 이들의 공을 잊지 않았다. 계유정난 때 공을 세운 43명에게는 정난공신, 왕위를 잇는 데 일조를 한 44명에게는 좌익공신이란 훈호를 각각 줘서 우대했다. 한명회 등 이른바 훈구파라고 불리는 이들은 국가로부터 공신전과 과전을 부여받아 대토지를 소유함으로써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뿐만 아니라 의정부 정승과 판서 등 요직을 독점하면서 강력한 정치세력을 형성했다. 한때 이들은 남이(南怡) 등 신진세력들로부터 정치적 도전을 받긴 했으나, 유자광의 고발로
환술(幻術)은 재빠른 손놀림이나 여러 가지 장치 등을 이용하여 눈속임으로 불가사의한 광경을 보여주는 연희의 일종이다. 지금은 마술(魔術)이나 요술이란 말을 쓴다.우리나라는 환술에 관한 문헌기록이 매우 드물다. 삼국시대의 환술에 대한 기록은 입호무(入壺舞)가 유일하다.‘신서고악도’에 실린 입호무에 대한 그림을 보면, 재주꾼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작은 항아리에 몸을 구겨 넣어 반대편에 놓인 다른 항아리로 빠져 나오는 모습이다. 마치 오늘날의 마술사들을 연상케 한다. 고려시대에는 불을 토해내는 토화(吐火)와 칼을 삼키는 탄도(呑刀)가 있었
세조가 왕권을 잡은 지 13년이 되는 해였다. 북쪽 변방에서 큰 반란이 일어났다. 전 회령부사 이시애가 절도사 강효문(康孝文)과 그 일행들을 참살하고, 함길도(지금의 함경도) 일대를 장악한 것이다. 이 난은 약 3개월간 지속되었다.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이 한양에서 700여리 떨어진 경상도 장기 땅에도 전해질 무렵, 한 무리의 유배객들이 우르르 이곳으로 몰려왔다. 이 난에 연좌된 사람들이었다. 그 숫자는 무려 십 수 명이나 되었는데, 대부분이 여자와 아이들이었다. 이후에도 잊을만하면 여기에 연좌됐던 사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또
1456년 7월 초순, 장맛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빗줄기를 뚫고 몰골이 꾀죄죄한 두 남자가 포항 장기 땅을 밟았다. 절뚝거리는 다리에다 비에 젖은 괴나리봇짐을 지고 들어서는 그 행색이 한눈에 봐도 유배객이었다. 이름이 박용이(朴龍伊)와 박사평(朴斯枰)이라고 하는 이들은 형제지간이었는데, 능지처참 당한 박중림(朴仲林:박팽년의 아버지)의 조카들이었다. 이들은 모반대역죄의 연좌에 걸려 그해 6월 28일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가 결정된 이래 하루에 80리씩을 걸어서 이제 도착한 것이다.이들이 여기까지 온 비통한 사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1423년(세종 5년) 10월 초, 가을이 한창 무르익는 들판을 따라 한 선비가 장기로 유배를 왔다. 바로 그해 9월 26일 장기현으로 유배가 결정된 최윤복(崔閏福)이란 사람이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는 의주 판관으로 있었다.그는 개국공신의 아들이었다. 윤복의 아버지 최운해(崔雲海)는 고려말 조선초 경상도 창원 출신 무신으로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참여한 원종공신(原從功臣)이었다. 그의 친형인 최윤덕(崔閏德)은 꽤 유명하다. 세종 때 김종서와 함께 평안도와 함경도에 있던 여진족을 몰아낸 뒤 4군6진을 개척하여, 압록강과 두
홍여방의 장기현 유배가 결정된 날이 1420년 4월 26일이었으니, 여기 도착한 날짜는 아마 그해 5월 초순경이었을 것이다.대사헌은 사헌부의 수장(首長)으로 종2품이다. 지금으로 치면 검찰총장 격이다. 역할로 본다면 수사권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현재의 검찰보다는 훨씬 권력이 막강했고, 간여하는 범위도 넓었다. 우선 정사를 토론하고 모든 벼슬아치를 규찰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현재의 감사원의 기능이다. 또 풍속을 바로잡고 억울한 사정을 풀어주며 협잡행위를 단속하는 업무도 사헌부의 일이었다.사헌부 관리는 대관(臺官)이라고 한다. 길에서
임금이 세종으로 바뀌었다는 바로 그 해, 1418년 12월 초순이었다. 삭풍이 몰아치는 길등재를 넘고 휑한 방산천을 따라 내려와 장기현에 도착한 초로(初老)의 한 선비가 있었다.그의 이름은 이원강(李元綱)이었다. 바로 이조참판이던 이관(李灌)의 숙부이다. 11월 26일 벌어진 강상인(姜尙仁)의 옥사(獄事)에서 이관은 참형(斬刑)에 처해지고 이원강은 장기현으로 유배가 결정되었는데, 이제야 도착한 것이다.이원강이 여기까지 온 내막을 알기 위해서는 세종 즉위년에 피바람 몰아쳤던 그 강상인의 옥사에 대해 짚어봐야 한다.1418년 8월, 태
태종 이방원이 왕위에 오른 지 9년째 되는 해였다. 가을이 한창 무르익어가는 1409년 10월 초순경, 한양에서 내로라하는 공신(功臣)의 아들 한명이 포항 장기로 유배를 왔다. 10월 2일 장기현으로 유배가 결정되던 날만 해도 그게 어느 쪽에 붙어있는 땅인지도 몰랐다. 한양에서 말을 타고 영남대로를 따라 9일 반이 걸려 도착한 바닷가 고을은 한없이 빈한해 보였다. 살아갈 날이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는 형조정랑((刑曹正郞))이라는 중앙 관리였지만 지금은 유배객의 신분이 되어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의 이름은 이승
조선조 맨 처음 포항 장기로 유배를 온 설장수(偰長壽)는 위구르족(Uighur) 출신으로 고려에 귀화한 사람이다.원나라에서는 위구르를 고창(高昌)이라고 불렀는데, 설장수의 아버지인 설손(偰遜)은 고창 설(偰)씨의 후손이다. 원나라에서 중앙관료로 활동하였던 사람들 중에는 고창 설씨 가문이 막강했다. 이는 시조가 칭기스칸에 협조한 공로도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문이 유학을 수용하고 자녀들의 교육에 힘을 쏟았다는 것이다. 시조인 위에린테무르(岳璘帖穆爾)는 무신이었지만 자식들에게 논어·맹자·사서 등을 공부시켰다. 때문에 그의 가문
어떤 사람들은 장기를 ‘유배지’라고 폄하하기도 한다. 심지어 장기사람들을 유배 온 사람들의 후손인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도 있다.이처럼 마치 장기지역 전체가 귀양지인 것처럼 인식된 이유는 조선시대의 형벌제도를 정확히 알지 못한데서 비롯된 것이다.장기는 신라 때는 지답현(只沓縣)이었다. 유배인들이 머물다 간 유배지는 한 선비에게는 말 못할 고통의 장소였겠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문학의 산실이자 더 높은 문화의 보급 장소이기도 했다.장기지역을 거쳐 간 수많은 유배객들도 그들이 머물렀던 이곳의 풍광과 서정을 주제로 많은 음영과 저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