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부차기는 잔혹하다. 반면에 보는 사람들은 짧은 시간에 통쾌한 승리감을 느낄 수 있어 순간적 쾌감은 말로 다 표현하기 힘들 정도다. 홍명보 감독이 이끄는 한국 올림픽 축구팀은 지난 5일 한국시간으로 새벽 3시 영국 웨일스 카디프 시티 밀레니엄 스타디움에서 7만 관중이 영국 팀을 열렬히 응원하는 가운데 열린 8강전에서 양 팀은 연장전을 합쳐 120분간의 혈투에도 승부가 가려지지 않자 승부차기에 들어가 5-4로 이겼다. 영국 선수의 선축으로 시작된 승부차기에서 영국은 1~4번까지의 선수는 차례로 골을 성공시켰다. 한국 선수들도 구자철, 백성동, 황석호, 박종우가 골을 넣으며 장군 멍군을 불렀다. 7만 관중이 자국 선수가 골을 성공시킬 때마다 함성을 질렀지만 운명의 승부는 다섯 번째 키커에서 갈렸다.
동양에서 침과 뜸은 인류최초의학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태초부터 신체 어딘가가 아프거나 가려우면 손으로 긁거나 꼬집고 찌르고 한다. 처음엔 뾰족 한 돌로 하다 나뭇가지로 바뀌고 철을 발명한 이후로는 침으로 발전했다. 우리 주변엔 여전히 침 뜸, 명상 등 대체의학으로 난치병을 낫게 했다는 전설 같은 명의(名醫)얘기는 늘 들린다. 그런 재야의 고수 침쟁이들이 심심찮게 의료법위반으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침구사 면허제는 일제 때부터 있다가 1962년 의료법이 개정되면서 막혀버렸다. 지금은 침구사 면허를 받은 사람 말고는 한의사만 침 뜸을 놓을 수 있을 뿐이다. 잔인한 일제도 허용했던 것을 대한민국이 막아 버린 셈이다. 현재 면허 없이 침 뜸을 붙들고 있는 침구인은 전국적으로 30만명이 넘을 것이라고 한다.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량과 함께 중국 역사 속의 2대 재상으로 불리는 관중(管仲)은 예의염치(禮義廉恥)를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으로 삼았다. 예와 의는 나라를 다스리는 기본 틀로, 염과 치는 청렴과 부끄러움을 아는 품격이다. 관중은 이 네 가지 가운데 하나가 빠지면 나라가 기울고, 둘이 부족하면 위험에 처하며, 셋이 무너지면 근간이 뒤집히고, 넷을 모두 갖추지 못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했다. 권력의 창에서 말 바꾸기를 손바닥 뒤집듯 하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층이 정치인이다. 정권말기가 되니 그런 사람들을 거의 매일이다시피 언론을 통해 만난다. 그 과정은 모두가 코미디다. 비리나 불법 정치자금 혐의로 조사를 받으면 “일단 모른다”며 발뺌부터 먼저하고, 수사망이 좁혀지면 “표적수사”라고 반발한다. 뇌물정황이
16세기 유럽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수세식 화장실은 질병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하는 훌륭한 이기이나 물을 너무 많이 쓴다는 단점을 갖고 있다. 처음 등장했을 때는 설거지물이나 빗물을 모아두고 사용했지만 편리함을 쫓는 인간 심리로 인해 지금은 수돗물을 쏟아 붓고 있다. 수세식 화장실의 물 사용량은 엄청나서 벽돌(2ℓ)을 넣어도 한번에 10ℓ를 쓰지만 편리함이 우선이다. 수세식 화장실의 진화는 눈부시다. 일본 효고현에 만들어진 바다 속 화장실은 그 자체가 명소가 됐다. 수세식 변기를 둘러 싼 해초류와 고기가 노는 바다 속 광경을 온몸으로 체험하는 곳이다. 런던은 밤이 되면 남자 변기가 갖춰진 화장실이 노면에서 솟는다. 점잖은 영국신사들의 노상 방뇨를 방지하는 편의 시설이 됐다. 우리나라 변소는 원래 거
음식이 도시의 운명을 좌우한다. 육류에 특별히 입맛이 더 끌리는 것은 인간이 갖는 동물적 본성 때문일까. 칠면조·닭 요리를 좋아하는 영국 사람들은 매년 3천500만 마리의 칠면조와 8억2천만 마리의 닭을 먹는다. 80%의 영국인들이 도시에서 살고 있으니 도시인들이 대부분을 먹어치우는 셈이다. 영국인들은 1세기 전만해도 국민 한사람이 연간 25kg정도의 육류를 먹었지만 21세기 들어서는 80kg으로 상향됐다. 중국의 경우는 훨씬 더 심각하다. 1960년 대 초까지 중국인들은 연간 4kg의 육류를 먹었지만 2005년 이후엔 무려 60kg으로 섭취량이 늘어났다. 도시인구가 늘어나면 육류 소비량은 세계의 모든 도시가 정비례한다. 상대적으로 육류 섭취에 따라 들어가는 비용은 엄청나다. 그런데 놀라
고전의 끝은 어디인가. 읽을수록 새 맛이 나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그린 학문의 깊이에 끝없이 빨려 들어간다. 송나라 제 1시인으로 꼽히며 당송시대 8대가에 이름을 올린 소동파(蘇東坡·본명 蘇軾·1036~1101)의 출생지(四川省)와 문학적 고향을 몇 차례 여행한 적이 있었다. 20대 초에 지금으로 말하면 문과고시에 패스한 공의 문장은 대를 이어 전해진다. 44살 때에 독서가 만권에 이르러도 율(律)서는 읽지 않는다고 말했던 필화(筆禍)사건은 중국역사에 올랐을 정도로 유명하다. 극한을 오가는 굴곡과 부침의 운명, 삶과 관운의 허망함을 눈밭에 찍힌 기러기 발자국에 비유했던 소동파는 미식가로도 별호가 붙었다. 중국에서조차 대표작이 된 적벽부(赤壁賦)를 읽은 사람은 거의 없고 `동파육`이 더
경주의 신라 왕릉은 어머니의 젖무덤처럼 늘 편안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천년 고도의 능은 늘 따뜻했다. 몸은 비록 잿빛 현대도시에 머물고 있지만 사람들은 늘 어머니의 젖무덤같이 편안한 고도를 그린다. 경주 도심의 부드러운 능선(線)은 물론이고 부처님의 땅 남산은 정신적으로 고단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겐 마음을 풀 수 있는 곳이다. 바미안 석불이나 간다라 불상은 크기만 했을 뿐 엉성하다. 돌 색깔도 불상에 맞지 않다. 사람이 갖는 신체적 대비나 구도를 사실적으로 표현하지 못해 보는 영감을 살리지 못했다. 불교 예술은 결국 발생지 인도에서부터 가장 먼 곳인 경주에서 꽃피었다. 질박한 돌 색깔이 그렇다. 담박하고 소박하고 불상이 짓는 미소는 사람들이 탄성을 지를 만큼 예술성을 지녔다. 그 대
대구의 한 고교생이 스스로 생명의 끈을 놓기 전 엘리베이터에서 쭈그리고 앉아 고민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본적이 있다. 자신이 처한 입장이 얼마나 어려웠기에 그런 참담한 고민을 했을까. 그 때 그 현장을 주변사람들이 놓치지 않았으면 그 학생은 여전히 해맑은 소년으로 남았을 것 같다. 막판까지 몰린 고민은 어른이나 아이가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나의 가치가 무(無)라고 느껴질 때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가장 많다고 한다. OECD 자살률 1위 국가라는 명예는 치명적이다. 소득은 2만 달러가 넘고 국격도 날로 향상되는데 국민은 왜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할까. 우리나라 국민 행복지수는 소득 수준과는 거리가 먼 25위다. 소득수준으로 보면 5천 달러 수준인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맞먹는다. 일본은 1
15세부터 64세까지의 생산연령 인구가 증가하면 실질 GDP도 늘어난다. 생산연령인구가 피부양인구보다 빨리 증가하는 기간을 `인구 보너스기'라고 한다. 아시아에선 우리나라와 싱가포르·홍콩·대만·태국·중국 등 비교적 소득이 높았던 6개국이 인구보너스 기간이 곧 끝난다. 일본은 이미 1990년에 끝나버린 인구구조의 변화다. 물론 경제위기가 장기화 될 수 있다는 경고는 쏟아졌다. 2007년을 기준으로 볼 때 6개국은 65세 이상 노인이 전체인구의 7%를 넘어 `고령화 사회'로 옮겨가는 현상이 일본 속도와 비슷하거나 앞서고 있다. 특히 한국은 지난 2000년의 고령화 사회로부터 `초고령화사회'로 까지 18년 밖에 걸리지 않는다는 예상수치다. 인구비관론으로 보면 다른 아시아 국가에 비해 한국은 단연
당신의 스승은 누구입니까? 고문진보(古文眞寶) 스승 얘기에 나오는 말이다. 사람이 얻는 복(福) 가운데 인연 복을 으뜸으로 치고 인연 복 가운데서도 눈 밝은 명사(明師)를 만나는 복이 가장 크다. 스승은 긴 인생을 항해하는데 나침반(針盤)이기 때문이다. 지난 봄날 늦은 시간 아들이 다니는 고등학교에 대학진학 상담을 하러 들렸다가 눈에 들어온 광경이다. 절반이상이 책상에 엎드려 자는 것이 아닌가. 통계청 조사를 보면 우리나라 고 3 수험생들은 하루 평균 5시간 24분을 자고 11시간 공부하는 것으로 나왔다. 잠은 선생님도 감당하지 못할 일이다. 우리아이들은 고등학교 다닐 때에 주로 밤을 새우지만 미국 청소년들은 대학에 다닐 시기 밤을 새운다. 어느 쪽이 성공을 먼저 할까. “요즘 학교는
히말라야는 세계의 지붕이다. 해발 6천m가 넘는 구름층을 통과하면서 부운기(浮雲起)와 부운멸(浮雲滅)을 읊조려 보았으나 생사(生死)가 말처럼 환원(還元)되지 않을 뿐 아니라 늙는 것도 병드는 것도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서산대사는 생과 사를 그렇게 읊었다. “삶이라는 것은 한 조각 뜬구름이 일어나는 것이요(生也一片浮雲起)” “죽음이란 한 조각 뜬 구름이 흩어지는 것이다(死也一片浮雲滅)” 허망하고 무상하다. 세상일은 다 그렇게 허망하고 무상한 것만은 아니다. 봄에 지천으로 피는 꽃이 그렇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권력이 그렇다. 꿈같은 사랑인들 흘러가지 않고 남을 수 있는가. 부귀영화도 마찬가지다. 세상일 어느 것 하나 허망하지 않고 무상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여산여수(如山如水)의 삶이
요즘 효를 얘기하면 마치 우화처럼 듣는 층이 늘어났다고 한다. 독거청년· 독거처자 등 홀로가구가 급속하게 팽창하는 뒤안길에는 원룸· 오피스텔이 그 실체다. 문을 닫아걸면 세상과는 단절이다. 이러니 홀로 보내는 노인사정은 더 참혹하고 가족관계를 벗어난 아이들을 제어할 가정교육이 무너지니 버릇없는 아이가 늘어날 뿐이다. 고려장에 얽힌 얘기를 다시 써보자. 고려조정에서 높은 벼슬을 하던 관리가 늙은 어머니를 산속 움막에 내려두고 눈물을 흘리면서 하직 인사로 큰절을 올리자 노모는 “얘야, 네가 내려갈 때 길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나뭇가지를 꺾어 표시를 해두었다. 잘 살피면서 내려가라”고 일렀다.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 마음을 가슴깊이 새긴 그 관리는 노모를 다시 집으로 모셔와 법을 어기면서 평생
한반도의 봄이 짧아지긴 했으나 그래도 5월을 일러 `계절의 여왕`이라고 부를 만큼 싱그럽고 아름답다. 찻잎을 따는 우리나라 5월은 더 아름답다. 첫물 차를 마시면 여운이 오래가며 마지막 한 모금이 넘어가지 않은 것 같다. 동다송(東茶頌)으로 유명한 초의선사와 신분의 벽을 허물고 차 벗이 되었던 추사와는 차에 얽힌 별난 얘기가 많다. 추사는 차가 바닥나는 겨울· 초봄을 아이들처럼 간졸증을 낸 흔적을 곳곳에 남겼다. 차가 늦게 도착하면 초의에게 스님은 보고 싶지도 않으니 차만 보내달라는 서찰을 보내기도 했었다. 추사는 언제부터 차 맛을 입에 담기 시작했을까. 그 역사는 20대 중반 북경에 갔을 시기로 추정될 뿐이다. 추사의 북경행장을 살펴보면 옹방강의 서재에서 10만권이 넘는 서적과 금석문(碑拓)을
흔히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에서 자동차를 운전하는 시민과 걷는 시민의 생각은 충돌한다. 운전자는 보행자가 빨리 걷지 않고 천천히 걸으면 짜증이 나고, 보행자는 자동차가 좀 여유 있게 기다려주지 않고 성급하게 통과하려 하면 화가 치밀기 일쑤다. 같은 장소를 걷는 시민이라 할지라도 자동차를 운전할 때와 보행할 때의 생각은 이처럼 엇갈리기 쉽다. 간사하게 느껴지지만 사실이 그렇다. 그만큼 보행권에 대한 시민의 인식이 낮다는 얘기다. 오랫동안 한국의 도로교통정책이 보행자가 아니라 자동차 위주로 시행돼 왔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지난해 길을 걷다 차에 치여 숨진 사람은 2천29명으로, 전체 교통사고 사망자의 39%에 이른다. 그래도 2000년대 들어서는 지방자치단체와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보행자를 배려
삶은 원래 한바탕 꿈이다. 세속 잡사를 놓아버리면 죽음을 극복 하는 일이 과연 가능한가. 삶과 죽음이 하나가 되는 생사일여(生死一如) 이치를 깨닫는 일이 명상수행이다. 마음의 평온은 어디서 오는가. 세상사를 다가지려는 탐욕 때문이다. 엉덩이를 한곳에 두지 못하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오지랖 넓은 사람도, 나 없으면 세상 돌아가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편치 못하다. 별별 생각이 꼬리를 물고 머릿속으로 들어 왔다가는 이내 다른 생각에 밀려 흔적 없이 사라진다. 마음은 원래 티끌만큼도 잘못된 것이 없다. 본래부터 깨끗하고 고요하다. 마음이 요동치는 것이라면 마음이 세사의 감정을 따라붙었기 때문이다. 절 마당에 켜진 불을 꺼야 하늘의 별이 잘 보이듯 마음구석 여기저기 담아 놓은 허상의 사진을 치
우리아이들 67만명이 학교 폭력에 운다고 한다. 교실에선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기에 이런 참혹한 일이 되풀이 되는 걸까. 대구 중학생 왕따 자살 사건이 일어 난지가 얼마나 됐는데 지난 17일 영주의 한 중학생이 같은 반 친구들의 괴롭힘을 더는 견디지 못하고 생명의 끈을 놓았다. 정부가 학교 폭력 대책을 만들고 부산을 떨었지만 교실에선 여전히 학생을 괴롭히는 폭력이 존재하고 있음을 뒷받침해주는 놀라운 사건들이다. 소통은 되지 않고 교실은 능력위주의 수업만 강행되니 우리아이들은 고민을 풀길이 없다. 감동 없는 교육 환경 때문이다. 이해와 나눔 배려(修己爲人)를 건학이념으로 하는 포항 영일 고등학교(교장 최상하)가 이 시대의 아픔에서 탈출할 방향을 명료하게 제시하고 있다. 지난해 5월 교육
섬진강 3월은 매화꽃이 구름처럼 피어나고 4월엔 벚꽃이 도로 양편으로 끝 간 데 없이 펼쳐진다. 그래서 섬진강은 봄꽃이 천지를 휘날리는 강이 됐다. 이른 봄에 피어 사람들의 가슴을 환희로 채워주는 벚꽃은 나무 중에 가장 사랑스럽다. 고도경주는 이즈음 벚 꽃잎이 시가를 덮고 있다. 보문관광단지가 준공되었던 1979년부터 벚나무가 엄청 심어져 벚꽃의 대명사처럼 불리어진 일본 동경 우에노 공원보다 꽃잎이 더 흩날린다고 한다. 초봄의 나무 중 가장 사랑스러운 벚나무는 지금 가자마다 꽃을 달고 있고 활짝 핀 꽃을 볼 때마다 보는 순간이 너무 짧다는 표현으로 세월의 빠르기를 견주기도 한다. 벚꽃을 지독스럽게 좋아하는 국가와 국민은 일본이다 보니 벚꽃과 얽힌 얘기가 많다.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가슴 저리게 아름다운 순백 연적(硯滴)이다. 청화나 진사, 철사로 꽃문양을 그려 넣지도 않고 그냥 우유 빛 흰옷을 입힌 연적이다. 복숭아 꼭지를 따고 앉혀 놓은 것 같은 순백의 자태에 가녀린 줄기가 양각돼 있을 뿐이지만 18세기 조선 사기가 절정에 이르렀을 시기 경기도 분원요에서 만들어 졌다. 어느 사대부집 사랑채를 돌다가 지금의 주인을 만나 귀여움을 독차지 한다고나 할까. 가슴에 그냥 품고 싶은 이런 연적을 서안에다 두고 바라볼 수만 있다면 이제라도 일필휘지 붓을 잡고 싶어진다. 이 연적을 붙들고 글씨를 섰던 옛 선비들의 옷깃이나 숨결이 내 볼을 스치는 것 같기도 하다. 절제된 아름다움과 쓰임새가 물결처럼 펼쳐진다. 단순함의 극치라고 할까. 조선선비의 마음을 훔쳤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
선진국에서는 외로움이 넘친다. 잘 살기는 하지만 슬플 때 기댈 어깨가 없고 함께 큰 소리로 웃을 수 있는 이웃이 드물다는 얘기다. 벽속에 갇혀 사는 사람들이 넘쳐 난다는 뜻이다. 영국 래스터 대학이 2009년 실시한 행복지수 조사에서 GDP가 1천800달러에 불과한 부탄이 선진국 틈(8위)에 유일하게 끼여 있다. 2천m가 넘는 히말라야 설산에 갇혀 사는 불교국(입헌군주국) 부탄은 이웃을 배려하고 고통을 나눌 줄 아는 사람들이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0 인구주택총조사`를 보면 2000년 조사에서 222만 4천 가구이던 1인가구가 2005년엔 317만 천 가구로 늘어나더니 2010년엔 403만 9천 가구가 됐다. 우리나라 전체 가구 가운데 1인 가구가 차지하는 비율이 23.7%여서 4가구
올해(3월11일)로 탄생 100주년을 맞는 성철 스님(1912~1993)이 가야산에서 일으킨 선풍은 지금도 유명하다. 성철 큰 스님은 돈오점수가 우세했던 종래 대승불교의 선풍과는 달리 `단번에 깨친다`는 뜻의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지향한 선승(禪僧)이셨다. 무의식의 세계에서 자기 마음을 꺼내 오기까지 밑바닥에서부터 피 땀을 흘리면 내공을 쌓는 치열한 수행을 통해 큰 깨달음을 세상에 내놓으신 분이시다. “깨달음을 얻는 순간에 번뇌 망상을 떨쳐내지 못했다면 깨달았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일갈했다. 그 한마디로 가야산 호랑이라는 별명이 자연스럽게 따라 붙었다. 1936년 가야산 해인사에서 출가한 성철 스님은 승복을 입은 30년간 산문(山門)을 나서는 것을 꺼렸다. 눕지 않고 8년을 수행(長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