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오하이오주립대 교수 로이 J. 레위키(Roy J. Lewicki) 등 전문가 5명의 공저 `최고의 협상`은 투쟁적 협상상황에서 갈등을 줄일 수 있는 전략을 다섯 단계로 설명한다. 첫째 적대감 완화, 둘째 소통강화, 셋째 쟁점의 수와 규모 축소, 넷째 합의근거를 찾기 위한 공통점 확립, 다섯째 바람직한 옵션과 대안 강화 등이다. 사시사철 멱살잡이에 빠져 생산성 빵점짜리 국회운영을 탐닉해온 우리 정치권의 행태에 비쳐보면 한숨이 나올 덕목이다. 정치권은 각 정당이 새 원내대표를 선출하는 등 뜻밖이었던 4·13총선 결과의 충격에서 급속도로 벗어나고 있다. 3당 체제 구축이라는 상황이 강제한 측면이 없지 않지만 정치권을 관통하고 있는 으뜸 화두는 `협치(협력정치)`다. 오랜 세월 투쟁적 협상에만 몰두하던
토니 블레어 전 영국총리는 1998년 3월 프랑스 하원 연설에서 `제3의 길(The Third Way)`이라는 개념을 언급해 세상을 놀라게 한다. 이 새로운 이념 모델은 블레어의 정책 브레인인 앤서니 기든스가 자신의 저서 `좌우를 넘어서`에서 처음 제시했다. `제3의 길`은 전후 세계정치를 주도해왔던 전통적 사회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를 극복하자는 `실용주의적 좌파노선`으로서 1960년 다니엘 벨의 `이데올로기의 종언`이래 정치적 상상력을 가장 많이 자극해온 소중한 깨우침이다. 지난 4·13총선을 통해 유권자들이 갈라 준 한국의 정치지도는 지금까지의 정치적 사고방식(思考方式)의 혁명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뉘앙스가 일치하지는 않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말한 대로 `3당 체제`를 엄명한 민심의 저변에는 오
4·13총선 결과를 `새누리당 참패`로 읽는 것은 백번 옳다. 그러나 `더불어민주당 압승`으로 읽는 것은 숫자의 환상에 빠진 오독(誤讀)이다. 20대 국회의원선거는 썩은 음식재료만 진열해놓은 악덕 식품가게의 독점 바겐세일이었다. 가게에 들어간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신선한 재료를 발견할 수 없었다. 재료를 꼭 사야할 형편인 사람들은 가장 나쁜 물건을 버리는 일에 주력해야만 했다. 밖에서 가게를 들여다보다가 살 만한 상품이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아예 문을 열지 않았다. 아주 예상치 못한 것은 아니지만, 선거가 끝난 다음 벌어지는 현상은 참으로 가관이다. 자중지란에 빠졌다가 민심으로부터 몽둥이뜸질을 당한 새누리당은 벌을 서는 상황에서도 눈알 굴리며 서로 옆구리 찌르고 정강이 걷어찰 궁리에 골몰하고 있
노론당파의 옹위를 받아 왕좌에 오른 영조(英祖)는 집권초기 탄생의 비밀과 이복형인 선왕 경종의 급서(急逝)에 연루됐다는 풍설에 끊임없이 시달렸다. 그런데 등극 3년차인 1727년 영조는 우군인 노론을 전격 실각시키고 소론을 전면에 등용하는 정미환국(丁未換局)을 단행해 판을 완전히 뒤엎었다. 소론과 남인세력 일부가 함께 일으킨 이듬해 무신봉기(일명 `이인좌의 난`)때도 영조는 노론이 아닌 소론당파 장수들을 토벌군 지휘부에 임명하는 `신(神)의 한 수`를 구사해 길이 남을`탕평`역사의 기반을 다졌다. 새누리당의 참패로 끝난 20대 총선 직후 진행된 리얼미터의 여론조사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이 전주보다 8.1%p 하락한 31.5%로 나타나 취임 이후 최저점을 찍었다. 새누리당의 지지율 역시 전주대비 7
토끼는 고전설화나 동화속에서 다양한 캐릭터로 묘사된다. 이솝은 우화 `토끼와 거북`에서 토끼를 오만하고 어리석은 동물로 등장시키지만 `겁 많은 토끼와 개구리`에서는 맹수 공포에 찌든 나머지 자살하려고 연못으로 몰려갔다 놀라서 달아나는 개구리들을 보고 용기를 얻는 지혜로운 존재로 풍자한다. 토끼는 대체로 유순하고 깨끗하며 귀엽고 예쁘고 나약한 존재의 이미지로 인식되고 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정치인들은 선거판에서 유권자들을 `토끼`에 비유하곤 한다. `집토끼 단속`이라느니 `산토끼 사냥`이라느니 하는 말을 쓴다. 워낙 예민하여 작은 소리에도 쏜살같이 달아나기 십상인 기질이 유권자의 성향과 비슷하기 때문에 붙인 별칭이기도 할 것이다. 하루 앞으로 다가온 20대 총선전을 치르는 과정에서 새누리당과 더불
중국 당나라 태종 때 간의대부(오늘날 감사원장 격) 위징(魏徵)은 최고 권력자인 황제에게 무려 300번이나 목숨을 걸고 `그것은 아니 되옵니다`를 외쳤다. 위징의 깐깐한 간언에 분노한 태종은 수없이 “끌어내어 참하라”고 소리쳤지만, 곧바로 명을 거두곤 했다. 위징은 어느 날 황제에게 자신을 `충신(忠臣)보다는 양신(良臣)으로 살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태종이 그 까닭을 묻자 위징은 이렇게 대답한다. “충신은 자신과 가족과 가문이 풍비박산되며 군주 역시 악인으로 낙인찍혀 나라가 결국 멸망합니다. 하지만 양신은 살아서는 명성을 얻고 죽어서도 대대손손 번창하며 군주 역시 태평성대를 누려 나라의 종사가 지속될 수 있습니다.” 훗날 당 태종은 고구려 침략에 나섰다가 안시성 전투에서 무참히 패퇴한 뒤 “위징이 살
`가장 좋은 것은 백성들이 임금이 있다는 사실만 아는 것이고, 그 다음에는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이며, 그 다음에는 두려워하는 것이고, 가장 나쁜 것은 임금을 모욕하는 것이다. (太上下知有之, 其次親譽之, 其次畏之, 其下侮之)` 노자(子) 도덕경 17장에 나오는 말이다. 신문·라디오뉴스와 영화관 `대한늬우스`로 인해 지도자의 존재를 매일 각인하며 자란 세대에게 3천여 년 전 초나라 현인의 지혜는 경탄스럽다. 여야 정치권이 바야흐로 20대 총선전쟁 출정채비를 모두 마치고 출발선에 섰다. 각 당은 후보자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온갖 잡음들을 씻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중이다. 정치인들이 숱하게 맹세했던, 그리고 국민들이 학수고대했던 `공천혁명` 기적은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 대한민국에서 공천은 여전히
`달이 태양을 가리면, 민(民)의 광채는 졸(卒)로 퇴색한다. 때문에 그 나라와 누리는 과연 누구의 것인가를 새삼 묻게 된다. 나라와 권력은 민을 위해서 있다는 것만으로는 모자란다. 나라와 권력 그 자체가 민의 것이라야 한다.`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언론인 김중배(金重培)가 펴낸 `민(民)은 졸(卒)인가`라는 평론집 서문에 나오는 대목이다. 김 선배는 엄혹한 시절을 어렵게 살아낸 많은 기자들의 표상이었다. `막장 드라마`라고 불리며 온 국민을 `정치 넌더리` 속으로 몰아넣던 여야의 20대 총선 공천이 마무리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새누리당 TK(대구 경북)지역의 공천이 이렇게 전국적인 관심사가 됐던 적은 없었다. 지난해 박근혜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현직의원들에 대한 섭섭함을 표출한 이래 TK
조선을 망국으로 몰아넣은 지독한 당파싸움은 피비린내 나는 사화(士禍)들을 낳았다. 역모조작과 궤변으로 왕을 꼬드겨 반대파를 몰살시키려는 사악한 정치집단이 존재했고, 그런 흐름을 왕권강화에 써먹은 교활한 군주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참화였다. 천재 학자요 대표적인 북벌론자였던 백호 윤휴가 당쟁에 몰려 사약을 받으면서 “나라에서 유학자를 쓰기 싫으면 안 쓰면 그만이지 왜 죽이는가?”라고 한탄했다는 야사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4월13일로 예정된 20대 총선을 저만큼 앞두고 정치권의 권력다툼이 점입가경이다. `컷오프`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학살극은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에서 먼저 시작했다. 야당 불모지 대구에서 출마를 준비하던 홍의락을 `컷오프` 명단에 넣은 것이 김부겸의 잠룡 부상(浮上)을 차단하려는 음험
우리가 배우고 익힌 역사는 반쪽 승자의 역사다. 1948년 7월 17일에 제헌헌법이 시행되었으니,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역사는 고작 70년도 채 되지 않는다. 역사를 파고들다보면 진실은커녕 사실에조차 근접하지 못한 대목이 적지 않다는 깨달음을 갖게 된다. 특히, 생사여탈권을 무자비하게 휘둘렀던 절대군주에 대한 복종여부를 기준하여 충역(忠逆)을 나눈 가치매김을 그대로 믿는 것은 아무래도 중대한 잘못이지 싶다. 요즘 정치권 돌아가는 모습은 정상적인 이성으로는 도무지 해석이 불가하다. 낡은 이념갈등과 인물 중심의 패거리 정치가 뒤죽박죽이다. 격앙과 오기와 사리사욕이 뒤범벅이 되어 원칙도 의리도 논리도 없이 조변석개(朝變夕改)로 무차별 섞이고 충돌한다. 유권자를 속이기 위한 정치꾼들의 온갖 요설이 난무하지만,
개성공단이 끝장났다. `가동중단`이라고 쓰지만 대다수 국민들은 `끝장났다`로 읽는다. 지난 2004년 12월에 본격 가동돼 만 11년이 넘도록 `남북교류의 상징이요, 평화통일의 희망`이라고 일컬어지던 모델하우스가 우여곡절 끝에 결국 파장을 치고 말았다. 박근혜정부의 전면 가동중지 결정을 놓고 정치권은 또다시 상반된 반응을 내놓으며 맞서고 있다. 새누리당은 적극 찬성하는 반면, 야당 정치인들은 `결정적 패착`이라고 물어뜯고 있다. 개성공단은 경기도 개성시 봉돌리 일대 9만3천㎡(2만8천여 평) 면적에 조성된 공업단지다. 지난 2000년 6·15공동선언 이후 추진된 남북경제협력사업의 하나로 체결된 `개성공업지구건설운영에 관한 합의서`가 공단조성의 단초가 됐다. 북한의 근로자철수 조치로 2013년 4월8일
왜들 이러는지 모르겠다. 문재인은 고 김대중 대통령의 삼남 김홍걸을 데려다가 기념촬영을 하고, 안철수의 측근은 몰래 녹음한 안 의원과 이희호 여사와의 대화내용을 언론에 흘렸다. 대구에서는 자칭 진박(眞朴) 몇 명이 따로 모여서 마치 신당창당이라도 한 듯 폼 잡고 사진을 찍었다. 잇달아 나타나는 퀴퀴한 영상들은 우리가 지금 어느 시대에 살고 있는지 착각마저 들게 한다. 상식과 체면에 기초하지 않은 행동들이 빈발하는 것으로 보아서, 이미 20대 총선은 불이 붙었다. 예선이 곧 본선일 확률이 상대적으로 높은 TK(대구·경북)지역은 진작부터 총선 한복판에 돌입해 있다. 후보들은 각종 연고를 끌어다대며 젖 먹던 힘까지 다 짜낸다. 박근혜 대통령을 당선 보증수표 삼아 권력을 쟁취하려는 발싸심들은 거의 용광로 수준
국회선진화법은 축구경기에서 골키퍼만이 아닌 모든 선수가 다 손으로 공을 잡을 수 있도록 허용한 웃음거리 경기규칙 같은 `돌연변이` 법규다. `당론투표` 전통이 금과옥조처럼 지켜지고 있는 나라에서, 어느 당도 점유하지 못한 2/3이상이나 3/5이상의 의결정족수를 적용한 것은 실질적으로 `만장일치제법`으로 작동되고 있다. 아테네 고대민주주의 이래 민주주의국가에서 철칙으로 지켜져 온 과반다수결 원칙을 깬 것이다. 19대 국회 후반기 수장인 정의화 국회의장이 때 아닌 동네북 신세다. 특히 친정인 여당으로부터 `목에 걸린 생선가시`, `하늘에서 떨어졌느냐`는 둥 뭇매질을 당하고 있다. 작금의 상황을 국회법 제85조의 규정에 명시된 `국가비상사태의 경우`로 해석해 직권상정을 강박하던 새누리당은 다시 국회법 87조
섭공이 “정치란 무엇입니까” 하고 묻자 공자가 대답한다. “정치란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기뻐하고, 먼 데 있는 사람들은 찾아오도록 하는 것이다.(葉公問政 子曰, `近者說, 遠者來`)”- 요즘 정치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지켜보면서 문득 논어 제13편 16장에 나오는 공자의 말씀이 떠올랐다. 수년 만에 다시 정치권은 `영입`이라는 구실로 `양자(養子)정치` 혹은 `데릴사위 정치`에 미쳐 있다. 자식이 없어서가 아니라 친자식들이 수두룩한데도 믿을 만한 씨알을 찾지 못하여 바깥에서 적자(適者)를 꿔다 쓰려는 심산들인 것이다. 친자식들을 불신하는 당 지도부가 잘못인지, 신뢰할만한 적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정치인들이 더 문제인지는 새삼스럽게 논란할 의미가 없다. 물을 열심히 긷다가 물독을 깬 일꾼은 일꾼으로
철없는 옆집아이가 점점 더 고약한 무기를 만들어내며 협박을 일삼고 있다. 그런데 우리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다른 이웃들에게 일러바치는 고자질뿐이란다. 북한의 4차 핵실험 이야기다. 저들은 한사코 `수소폭탄`이라고 욱대기고 우리는 자꾸만 `그냥 핵폭탄`이라고 해석한다. `핵폭탄`은 별 것 아닌 것 같은 터무니없는 착각마저 횡행한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매번 그랬다. 북한문제에 관한 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희망사항을 과학적 분석인 양 떠들어댄다. 북한 지도자를 우스꽝스런 삐에로로 만들어놓고 나서는 희한한 자위에 빠진다. 정말 위험한 것은 북한은 절대로 전쟁을 못 일으킬 것이고, 설사 일으킨다 해도 한반도에서는 핵을 쓰지 않는다고 터무니없이 낙관하는 일이다. 이번
프랑스 정부는 지난 연말 `국가비상사태`와 관련한 헌법 개정안을 전격적으로 발표했다. 개정안은 지난해 11월의 끔찍한 `파리 연쇄테러`를 교훈으로 테러범에 대한 구체적이고 강력한 조치를 담고 있다. 올랑드 정부가 내놓은 개헌안은 올 2월초부터 논의될 예정인데, 일부 인권단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체 분위기는 긍정적인 것으로 전해진다. 새해 벽두에, 흥미로운 개헌 관련 여론조사 결과가 떴다. 한 중앙언론이 현역 국회의원 166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개헌` 관련 설문조사에서 85.2%인 139명이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필요하지 않다`고 답한 국회의원은 24명 14.7%에 불과했다. `찬성` 의원들의 정당별 점유율은 새누리당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각각 48.2%, 46.0%로서 차이가 없었다.
이념이 정당의 색깔을 대변하는 미국이나 영국의 정치와 달리 한국정치의 키워드는 `패거리`다. 우리 정치사는 이승만에서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패거리정치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문과 방송을 장식하는 정치뉴스 역시 정책 이야기가 아니라, 친노계·친이계·친박계 등 패거리정치 동향에 흥미를 보태는 관성 언저리에 머물러 있다. 이같은 특성은 우리 정치인들을 움직여온 가장 큰 요소는 사뭇 정책이 아닌 `공천권`이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정치권력의 한 복판에 군림하는 주군(主君)에게 행여 밉보이기라도 하는 날엔 단박에 `공천장`이 찢어질 위기에 처하게 된다. 주군에게 충성을 바치는 것이 정치생명을 이어가는 필수조건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20대 총선을 저만치 앞두고 안철수 의원이 새정연을 탈당해
대한민국의 축구역사는 거스 히딩크(Guus Hiddink) 이전과 이후로 나눠 기록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2002월드컵 4강 신화보다도 더 소중한 것은 따로 있다. 그것은 우리 축구가 국제무대에서 줄곧 `뻥 축구`로 남우세를 당해온 원인을 정확하게 알아냈다는 사실이다. 히딩크는 명성이 아닌 실력과 상태만으로 선수를 뽑았다. 운동복을 빠트리고 연습장에 나온 한 스타플레이어를 그가 끝내 외면한 일화는 유명하다. 뿐만이 아니었다. 히딩크는 포지션별로 선수들을 복수로 선발해 공정하면서도 혹독한 경쟁을 시켰다. 내부긴장 강화로 실력향상은 물론이고 주전선수 부상에도 대비했다. 그는 `경쟁이 없으면 경쟁력도 없다`는 진리를 철저하게 신봉하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수십 년 고질적 병폐였던 축구계 파벌주의를 얼씬도 못
신라시대 화백회의(和白會議)는 진골 이상의 20여명 귀족들이 참여해 국가 중대사를 의논하던 최고 의사결정기구였다. 국가형태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던 시대에 경주를 중심으로 한 연맹왕국 사로국(斯國) 6개 촌락의 대표들이 모여 중대사를 논하던 남당(南堂)제도에서 유래한 것으로 전해진다. 화백회의는 의사결정 방식이 `만장일치제(滿場一致制)`였다는 점에서 후세 사학자들과 정치가들에게 큰 관심을 끈다. 그런데 놀랍게도, 21세기 대한민국 국회에서도 내용상 `만장일치제`가 운영되고 있다. 그 어떤 법안도 소속의원 전원 또는 100%에 준하는 찬동의사가 발현되지 않으면 본회의에 상정조차 되지 않는다. 무슨 엉뚱한 소리냐고 할 지 모르지만, 근년 국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행태를 보면 `우리 국회가 만장일치제를 택하고
내년 4월 총선이 가시권에 들기 시작한 요즘 TK(대구·경북)정치권에 `낙하산 비상령`이 내렸다. 현역 국회의원들과 지역에서 붙박이로 살면서 텃밭을 가꿔온 정치인재들은, 불쑥불쑥 나타나 입지(立志)를 외치는 새로운 인물들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 있다. `전면 물갈이`설에 현역의원들이 벌벌 떨고 있다는 말도 나돌고, 이미 누군가 내정돼 사실상 게임이 끝났다는 확인불가의 예단도 시시때때 돌출한다.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에 출마하려는 인재들이 많다는 것은 축복이다. 눈치를 보아야 할 요인들이 없어졌다는 반증이기도 해서 민주화를 추구해온 나라에서는 행복한 일이다. 그러나 최근의 출마선언 러시가 마냥 즐거울 수만은 없는 요인들이 있다. 일부 인사들 주변에서 직·간접적으로 풍겨나는 `전략공천` 냄새 때문이다. “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