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좋아하는 밥식혜를 담으려고 미주구리를 사왔다. 미주구리는 일본어에서 유래된 말로 물가자미의 경상도사투리이다. 미주구리라는 말이 더 친근감이 드는 것은 그 말이 주는 날 것의 어감 때문일 것이다. 밥식혜는 주로 경북 동해안지방에서 접할 수 있다. 생선과 밥을 적당히 섞어 삭혀서 만드는데 가자미와 오징어, 고둥을 사용하며 그중 최고로 치는 게 미주구리 밥식혜이다.미주구리 밥식혜를 만난 건 어느 식당에서였다. 사실 접시에 담긴 밥식혜의 형태는 먹다 남은 밥처럼 이지러진 밥알이 다른 찬들과 섞여 있는 모습에 영 비위가 상했다. 게다
아버지는 길에서 가셨다. 일하던 곳이 길이었고, 쉬는 곳 또한 길이었다. 그래서인가. 그 곳에서 또 다른 길로 가버렸다. 아버지는 청소부였다. 이른 새벽 청소차를 뒤따르며 길을 쓸었다. 손톱과 손가락의 경계가 선명해서, 길 위에 선 아버지와 보행도로를 걷는 사람들을 구분지었다.‘아버지’ 하고 몇 번이나 불렀던가? 지금 생각해보아도 한 손으로 꼽을 정도이다. 집에서도 멀찍이 앉았고, 눈 한 번 제대로 맞춰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늘 혼자였다. 아버지와 얘기하는 사람은 막내동생 뿐이었다. 아버지는 나이가 어린 막내에게는 무동과 말이
생이별을 당했다. 세상에, 바람에게 생이별을 당하다니 어처구니 없다. 사월 말에 불어닥친 살바람이 기습적 일격을 가할 줄이야. 흐드러지게 핀 이팝꽃을 시샘하는 심보인지, 꽃샘추위 몰고 온 살바람은 정든 벗을 낚아채 가버렸다. 있는 듯, 없는 듯 목을 감싸 안아 언제나 따사하게 하던 벗이었다. 벗을 만난 뒤로는 덕분에 감기도 거의 걸리지 않았다. 흠뻑 든 정에 가슴이 먹먹하다. 세상의 어떤 헤어짐도 서운하지 않은 게 없겠지만, 생각지도 못한 생이별이기에 더욱 마음이 싸하다.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목이 허전했다. 저절로 목에 손이 올라갔다
봄의 잉여를 솎아낸다. 도톰한 입술을 내밀며 새순들이 해바라기하듯 가지 끝에 앉아 있다. 장갑 낀 손에 지긋이 힘을 준다. 겨우내 혹한을 견뎌낸 여린 생명들이 땅바닥에 떨어진다. 위로 향한 꽃눈들은 햇볕에 과다 노출되어 제대로 된 결실이 어렵기 때문에 솎아내기를 해야 한다. 채 피어나지 못한 생명들이 내지르는 단말마가 애처롭다. 하지만 가을의 알찬 수확을 위해선 어쩔 수 없이 겪어내야 하는 통과의례다.귀농은 퇴직 후 소일거리가 없어진 남편을 위한 궁여지책이었다. 처음엔 작은 텃밭을 꿈꾸었지만 뜻하지 않게 지인으로부터 과수원을 소개받
벚꽃이 진 영일대둘레길에 또 다른 분홍빛이 꽃불을 켰다. 아, 이 꽃 이름이 뭐였지? 누가 알려줬는데 지난해 휴대폰으로 검색도 했었는데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나무와 꽃 이름을 잘 아는 태명씨에게 전화를 걸어 둘레길에 터널을 이루고 피어있는 꽃나무의 이름을 다시 물었다. ‘꽃아그배나무’라고 금방 알려주었다.왜 이렇게 안 외워질까? 뇌세포가 쪼그라들었나, 만날 듣고도 자꾸 까먹는다. 이름이 생소하기도 하지만 관심 부족이란 걸 느낀다. 꽃아그배나무가 내게 많이 사랑스럽지 않았나보다.나와 일주일에 한 번 이상 보는 그렇게 삼사 년
마음이 옴찔해졌다. 걷는 도로가 콘크리트 틈새에 시선이 저절로 머문 때문이다. 부슬부슬 단비 오는 사월 초순 한낮이다. 어제 이맘때는 저곳에서 황금빛 해님 셋이 활짝 웃으며 오가는 이를 반겼는데, 오늘은 웬일로 그 해님들이 기도 손으로 변신해 열심히 기도하고 있다. 큰길 가로수 밑 잔디 새싹 사이에도, 같은 종의 쪼그만 기도 손이 여럿이다. 잔디 잎에 숨어있어, 잘 살펴야 보인다.‘황금빛 해님들이 사월의 기도를 바치다니! 사람 몸 둘 바를 모르게 하는구나.’그랬다. 도시에 살면서도 여기저기서 숱하게 보는 꽃이기에 늘 무심히 다녔었다
“봄이 쳐들어오는구나 혁명처럼 목련이 피고 목련이 후두둑 지고 동백과 개나리 진달래 잇달아 피고 복숭아꽃 살구꽃 수수꽃다리…. 차례를 기다리고 눈부신 봄볕에 부드럽고 은밀한 봄바람에 천지가 꿈틀대며 기지개를 켜는구나 아아, 봄이 불가항력으로 진주해 와서 구악과 폐습을 무찌르는구나 천지는 시시각각 혁명이로구나 그래서 언제까지 늙지를 않는구나. 모든 감았던 눈까풀이 열리고 눈부시게 눈부시게 보는구나 나무 줄기마다 수액이 흐르는 소리 보리밭 푸른 갈기를 흔들며 달려가는 바람 높이 떠 지저귀는 종달새 밭 어귀 샛노란 배추꽃 유채꽃 노랑나비
‘진달래는 바빠서 꽃부터 대뜸 피운다. 재거나 뜸들이지 않고 결론부터 말한다. 가지 끝에 여러 송이 분홍빛을 켜고 봄은 이래요 한다.’ 친구가 보내준 문자메시지다. 어느 사진작가가 한 말이라며 꼭 나를 두고 하는 말 같다고 했다. 봄꽃은 꽃을 먼저 피운다. 눈 속에 피는 매화를 시작으로 산수유, 목련, 벚꽃, 개나리까지 회색빛 가지에 푸른 물이 들기도 전에 꽃잎을 장식한다. 성질 급한 나와 닮았다.그런데 며칠 전 아침신문에서 개나리나 진달래도 잎이 난 다음에 꽃을 피운다는 기사를 보았다. 새로 가지가 자라서 잎이 난 뒤에 꽃눈이 맺
바야흐로 봄이다. 이맘때면, 언 땅이 녹고 동면 들었던 벌레가 기어 나오며, 물고기들이 얼음장 밑을 돌아다닌다. 남편은 묵혀두었던 관리기를 꺼내 엔진이 부식되었거나 고장 난 곳이 있는지부터 점검했다.우수가 지나면 밭갈이가 시작된다. 울퉁불퉁 했던 땅이 순식간에 갈아엎어지면서 부드러운 평면이 펼쳐진다. 기계가 해내는 작업을 바라보노라면 마치 마법을 부리는 것 같다. 유박비료와 퇴비를 듬뿍 뿌리고 다시 한 번 갈아엎은 뒤 고랑을 만든다. 땅이 가르마처럼 정갈하게 양쪽으로 갈라진다. 다음은 비닐 씌우기이다. 작업순서가 바뀔 때마다 부속품
다시 삼월이 왔습니다. 삼월은 설렘입니다. 유년시절 삼월이 연록새싹으로 찾아왔었기 때문입니다. 산골 우리 둥지 앞 양지바른 밭두렁입니다. 얼어 죽은 풀잎뿐인 두렁을 삼월 명지바람이 간지럽히면, 해님이 질세라 따사한 손길로 어루만집니다. 어느새 새싹이 옹기종기 땅을 비집거나, 마른 풀잎을 들추거나 혹은, 돌 틈새로 솟아오르지 뭡니까. 올망졸망 해님을 찬미하는 연록새싹들에, 어린 마음은 무턱대고 설렜습니다. 새싹들의 그 무엇이, 그토록 유년의 내 마음을 설레게 했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새 생명이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풀들의 새
산책을 하려고 날마다 들로 나간다. 마을 주변에 너른 들이 있어 발길 가는 데로 이리저리 걸어 다니다 오는 산책이다. 몸의 건강을 위해 걷기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양 팔을 크게 흔들며 빠른 걸음으로 걸어야 효과가 크다고 하지만, 별다른 목적이 없이 이것저것 해찰을 하며 느릿느릿 걷는 게 나의 산책이다.산책은 말마따나 살아있는 책이다. 달마다 철마다 새로이 출간되는 계간지나 월간지다. 하루하루 촘촘히 들어있는 건 월간지이고 가끔씩 듬성듬성 읽는 사람에겐 계간지이다. 나는 거의 매일 빼먹지 않는 월간지 구독자다. 하루라도 밥을 먹지 않으
영양군은 선비들이 숨어살던 곳이다. 태백산맥에 둘러싸여 해발 고도가 경상북도에서 가장 높은 분지이며 일월산을 품고 있어 산이 높고 물이 맑다. 감천, 석보 등 고인돌과 고분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은 분명하다. 신라에 흡수된 뒤에는 읍호를 고은(古隱)이라 하였다가 말기에 영양(英陽)이라 하였다.일월산 자락 한쪽 끝에 자리한 두들마을을 찾아가는 길은 굽은 길이다. 들고나기 힘든 곳이라 육지의 섬이라고도 부른다. 굽은 길을 조금 펴기 위해 뚫은 청기터널을 지나자 골뱅이골이라는 이정표가 보였다. 골뱅이처럼 구불
입춘 지나고 세 번째 날이다. 산 너머 남촌의 꽃바람이 그리운 마음을 하늘도 아는 지, 따사한 날이다. 삼년 째 벼르던 주인공을 이주를 시키기로 마음먹었다. 어제 설날, 고향에 다녀온 노곤(路困)이 다 가시지는 않았으나, 오전까지 쉬었으니 됐다. 작년과 재작년에도 주인공을 치우자는 아내의 주장에, 날씨를 구실삼아 미적거리며 내심 이주시키지 않으려 했었다. 그만한 연유가 있는 주인공이기 때문이다.필요한 도구를 챙겨들고 나서며, 아내에게 함께 가지고 했다. 피곤한지 내키지 않아 한다. 힘들어도, 마음먹은 김에 해야 한다고 말하며 현관문
“입춘 날 들에 나가/ 봄까치꽃 핀 걸 본다// 몸 낮추고 눈 맑아야/ 겨우 찾아 보이는 꽃// 그 곁에 쪼그려 앉아/ 봄소식을 듣는다” - 拙詩 ‘봄소식’입춘이 지났지만 들녘은 아직 겨울입니다. 지난 여름의 무성한 초록과 가을의 황금물결은 다 어디로 갔는지 메마르고 삭막한 무채색의 풍경입니다. 그 풍경 속으로 자주 산책을 나갑니다. 산책하기에는 산속 오솔길도 좋지만 사방이 탁 트인 들길이 더 좋습니다. 경정리로 곧게 뻗은 들길은 걸음걸이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됩니다. 무의식적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걷다보면 누워있거나 앉아 있는 것보
물루의 걸음걸이는 도도하고 아름답다. 턱을 약간 쳐들고 ‘S‘ 라인의 몸매를 유지하는 폼은 거의 환상적이다. 왼발과 오른발을 교차시키며 사뿐사뿐 걷는 걸음걸이는 영락없는 ‘백조의 호수’의 발레리나다. 식사할 때도 고급레스토랑에 앉아 있는 귀부인처럼 우아하다. 아무리 맛좋은 음식이라도 금방 달려드는 일이 없다. 천천히 다가와선 혀로 조금 맛을 본 후 잠시 뜸을 들였다 느긋하게 먹는다.반면 남편이 좋아하는 시지프는 수컷이다. 정확한 혈통을 알 수 없는 호랑이 무늬 빛으로 치장한 녀석이다. 시지프는 우둔하다 못해 미련스럽다. 물루와 시지
그 많던 낙엽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초겨울까지만 하더라도 보도(步道)를 메우던 낙엽들이 자취를 감췄다. 보도 옆 학교 운동장 가에 플라타너스나무가 하늘 높이 서 있다. 가지에는 마른 잎과 열매가 간간이 붙어있다. 무슨 미련이라도 남은 건가. 초겨울까지 푸른 잎을 놓지 않고 버티던 플라타너스나무다. 대한(大寒) 무렵의 한겨울인데도, 가지와 마른 잎은 서로 부둥켜안고 아직도 긴 이별연습을 하고 있다니.반면, 간선도로에 줄지어 선 은행나무는 완벽한 나신(裸身)으로 변모해 있다. 마른 잎을 한 개라도 달고 있나 싶어, 여러 나무를 유심히
오늘은 특별하고 중요한 날이다. 무슨 특별한 행사나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가 아니다. 집안의 경조사가 있거나 가족의 기념일도 아니고 건강검진의 결과나 복권 추첨을 기다리는 날도 아니다. 하다못해 국경일이나 공휴일도 아니다. 그런데도 오늘이 특별하고 중요한 것은 바로 내 여생(餘生)의 첫날이기 때문이다.죽을병이라도 걸려서 시한부 인생을 사는 게 아니라면 새삼스럽게 무슨 소리냐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 곰곰이 따져보면 남은 생의 첫날보다 더 소중하고 절실한 날도 없을 것 같다. 더구나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적게 남은 사람들일수록
신년회를 했다. 이십여 년 동안 친구로 지낸 사람들과의 만남은 늘 기다려진다. 한 달에 한 번은 꼭 보자고 하지만 바쁘다 보면 건너뛰기도 하고 서너 달 못 나온 친구도 있어서 한 번 시작한 수다는 끝이 없이 이어졌다.어떻게 지냈는지 무엇으로 바빴는지 나누다 보니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딱 맞았다. 나를 포함한 네 명 모두 쓴 감투가 여러 개였다. 아파트에 살고 있는 세 명은 통로 반장을 몇 년째 맡고 있었고 주택에 사는 친구는 다들 맡기 싫어하는 돈 관리와 서기까지 도맡아 고생했다고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새해에는 절대로 아무 감투도 쓰
가로수들이 자신의 내부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서 있다. 매서운 북극 높바람이 사정없이 몰아쳐도 윙윙 소리만 낼뿐, 끄떡도 않는다. 사람들은 방한복에다 귀마개와 마스크까지 끼고 종종걸음인데, 훌훌 벗은 저 나무들은 매서운 칼바람에 어찌 저리도 의연할까. 그 모습이, 조그만 변화에도 안달인 나를 부끄럽게 한다.지난 늦가을, 이 거리는 나무들이 벗기 경쟁이라도 벌이듯 낙엽이 그득했었다. 붉은 옷, 노랑 옷, 갈색 옷, 모두 벗으며 시나브로 속을 드러내는 나무들의 모습이 마치 성스런 의식이라도 치르는 것만 같았었다. 한줄기 하늬바람에 팔랑팔
자본주의의 가장 나쁜 형태가 빈익빈(貧益貧) 부익부(富益富)의 극단적인 양극화 현상일 것이다. 인간사회에는 강자와 약자가 있게 마련인데, 자유경쟁을 시켜놓으면 갈수록 격차가 벌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맨손으로 경쟁을 해도 그럴진대, 잘나고 강한 자들은 최상의 조건을 두루 갖추었는데 약하고 못난 자들은 맨손으로 경쟁해야 한다면 그것은 애당초 경쟁이랄 것도 없는 일이다. 백 개를 가진 자에게 단 하나 가진 것까지 빼앗길 수밖에 없는 것이 자본주의 자유경쟁의 속성인 것이다.그 대안으로 나온 것이 공산주의였다. 모든 재산을 공동의 소유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