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19일 오전 10시 30분부터 낮 12시까지 전남대 인문대학 소강당에서 의미 있는 사건이 있었다. 대구시장이 전남대 학생들을 대상으로 최초로 강연을 펼친 것이다. ‘권영진이 들려주는 달빛동맹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90분 동안 진행된 강연회에 300여 전남대 학생들이 자리를 빼곡하게 채웠다. 휴대전화 한 번 울리지 않는 분위기에서 학생들은 끝까지 경청하는 자세로 권 시장이 전하는 달구벌 대구와 빛고을 광주 강연에 임했다.“대구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게 뭐죠?” 하는 질문으로 학생들의 말문을 틔운 권 시장은 정치학 박사답게
얼마 전 ‘무등공부방’에서 장편소설 ‘빨치산의 딸’(1990)을 쓴 정지아 작가의 강연을 들었다. ‘기억’에 대한 그녀의 생각은 단출하되 선명하다. 빨치산이었던 어머니가 올해로 94세가 되었는데, 그이의 기억에 자리한 장면은 200개 남짓이라 한다. 90년 가까운 세월을 살아온, 그것도 한반도 남단의 피어린 상처를 경험한 인간이 체화한 기억의 총량이 그것뿐이라니.“여러분도 살아온 날들의 기억을 헤아려 보세요!” 작가의 말이 새삼스레 다가온다. 대단한 기억력은 아니지만, 나는 세 살적부터 경험한 기억에서 출발할 것이다. 문제는 기억이
9월 3일자 ‘다음’ 포털 사이트 실검 1-2위를 다툰 제목은 ‘근조 한국언론’과 ‘한국기자 질문수준’이다. 양자 모두 ‘조국 기자 간담회’ 결과 검색순위 1-2위에 올랐다. 청문회가 무산될 지경에 이르자 여당과 후보자가 ‘기자 간담회’ 형식으로 법무장관 후보자에게 쏠렸던 세간의 의혹을 묻고 답하는 자리를 만든 것이다. 휴게시간 포함 10시간 40분이 소요됐다는 1박 2일 기자 간담회는 처음 있는 일이라 한다.‘근조 한국언론’이야 재론의 여지가 없지만, ‘한국기자 질문수준’은 흥미로운 제목이다. 한국의 내로라하는 언론사 기자 150
세상 살아가는 일은 간단치 않다. 나와 너, 우리와 너희, 우리와 그들이 끓이는 섞어찌개가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흥미진진하고 포복절도할 일도 적잖다. 언어도단의 세계가 펼치고, 일망무제(一望無際)의 도저한 경지가 현현하는 경우도 있다. 세상에는 고수도 많고, 깊이를 측량하기 어려운 인물도 적잖다. 세상은 불가사의한 곳이다.로빈슨 크루소가 다시 인간이 될 수 있었던 소이는 ‘프라이데이’와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다. 혼자 걸머지는 인생은 단출하다. ‘격양가’의 주인공처럼 “해 뜨면 나가서 일하고, 해 지면 들어와서 쉬고, 우물
상사화(相思花)가 피어난 걸 보고 여름이 가고 있음을 알겠더라. 따사로운 4월에 이파리가 앞 다투어 무리지어 솟아오르다 어느 사품엔가 시나브로 자취를 감춘다. 그러다 8월이 지나 여름도 절정을 넘어설 무렵 홀연히 상사화는 연분홍색 화사하고 처연한 꽃을 피운다. 이파리와 꽃이 나뉘어서 피고 지는 까닭에 상사화 이름 얻었다 한다. 상사화 보다가 200년 전에 메리 셸리가 쓴 소설 ‘프랑켄슈타인’(1818)을 생각한다.소설 제목이기도 하고 주인공이기도 한 프랑켄슈타인. 그는 불과 열세 살에 의사이자 연금술사인 코르넬리우스 아그리파의 선집
1592년 4월 임진왜란 발발당시 가토 기요마사의 좌선봉장 사야가(沙也可)는 일본의 조선침략이 잘못되었음을 확신하고 경상좌병사 박진에게 부하들을 이끌고 투항한다. 사야가처럼 일본의 무의미하고 명분 없는 침략전쟁에 반대하여 조선에 투항해 일본에 맞서 싸운 왜인들을 ‘항왜’라 한다.반면에 조선인이되 왜군의 침략에 즈음하여 자발적으로 그들의 앞잡이가 되어 조선군과 대적한 자들을 일컬어 ‘순왜(順倭)’라 한다. 선조가 명나라 신종에게 요동태수 자리를 애걸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순왜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휘하의 신료들조차
지난 7월 27일은 한국전쟁이 멈춰선 날이다. 1950년 6월 25일 발발해 1953년 7월 27일 총성이 그친다. 하지만 그날은 전쟁을 종결한 날이 아니라, 전쟁을 멈추겠다고 결정한 날이다. 그래서 종전(終戰)협정이 아니라, 정전(停戰)협정이나 휴전(休戰)협정이라 한다. 정전협정은 유엔군 총사령관 클라크 대장과 북한군 최고사령관 김일성 및 중국인민지원군사령관 팽덕회 사이에 체결됐다.“귀하의 총체적인 지휘를 받게 되어 영광”이라며 이승만이 1950년 7월 14일 국군통수권을 맥아더에게 이양한 탓에 한국군은 정전협정 당사자 자격조차
지난 7월 1일 시작된 일본의 경제침략이 진행되고 있다. 가장 가까운 이웃 나라 대한민국을 콕 집어서 일본이 자행한 경제보복이 세계적인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2차 대전 당시 도조 히데키가 주도한 진주만 공습에 비견되는 아베의 급습이 무엇을 겨냥한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다. 7월 21일 참의원 선거, 남북과 북미의 급속한 해빙과 평화체제 구축방안 논의에서 일본의 배제, 한국과 중국의 부상(浮上)에 따른 열패감 등등.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제기돼온 징병과 징용, 위안부 문제, 과거사를 둘러싼 한국과 일본의 갈등, 새
2002년 ‘대망’을 끝으로 드라마와 작별했다. 1995년 ‘모래시계’로 선풍을 일으킨 송지나 작가와 김종학 연출이 만든 작품이었다. 우리로 하여금 1980년 5월 광주항쟁을 다시 생각하도록 인도한 ‘모래시계’. ‘모래시계’전에 좋아한 드라마는 ‘서울의 달’이다. 출세를 위해 부나방처럼 떠돌던 촌놈의 허망한 삶을 아프게 그려낸 사회드라마.‘대망’ 이후에는 드라마를 보지 않았다. 희곡과 연극 연구자가 드라마와 연을 끊는다는 것은 곡절이 있을 터. 혁명과 변혁의 80년대를 불처럼 바람처럼 파도처럼 산 자들은 1988년 대선패배와 군부독
2010년을 기점으로 세계경제의 위상에 변화가 표면화한다. 40년 가까이 부동(不動)의 2위를 고수했던 일본이 중국에 3위로 밀려난 것이다. 두 나라의 격차는 날이 갈수록 벌어져 작년의 경우 중국의 국내총생산은 13조 6천억 달러, 일본은 5조 달러 언저리다. 흥미로운 점은 3위 일본, 4위 도이칠란트, 5위 영국, 6위 프랑스의 국내총생산이 14조 5천억 달러로 2위 중국과 거의 맞먹는 규모라는 점이다.이런 추세 때문에 미국 제일주의를 주창한 트럼프가 중국을 강력하게 견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투키디데스의 함정’에 빠진 21세기
“열 가구로 이루어진 마을에도 나처럼 진실하고 믿음직스러운 자는 반드시 있겠지만, 나처럼 배움을 좋아하는 자는 없을 것이다.” ‘공야장’에 나오는 말이다. 평생 ‘학인(學人)’을 자처한 공구(孔丘)는 스스로를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자가 아니라, 배워서 알게 된 자로 규정한다. 그래서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명언을 남길 수 있었다. 일본을 대표하는 지식인 다치바나 다카시는 매일 쏟아지는 신간(新刊)을 읽고 싶은 마음에 죽음이 두렵다는 소회를 피력한 적도 있다.지난주 ‘무등공부방’에서 광주의 향토사 전문가
이분법은 단순하되 힘이 세다. 나와 너, 친구와 적, 이익과 손해로 극명하게 갈리는 이항대립은 선택장애를 일소한다. 기원전 6세기 무렵 낮과 밤의 주기적인 교체에 기초하여 광명과 암흑, 선과 악, 아후라 마즈다와 앙그라 마이뉴를 창안한 조로아스터(차라투스트라)가 배화교(拜火敎)를 창시한다. 배화교에서 구원은 선신과 악신의 대결로 실현된다.1만2천년 후에 선신(善神) 아후라 마즈다와 악신 앙그라 마이뉴가 최후의 결전을 벌이고, 선신이 승리한다. 아후라 마즈다를 따르는 사람은 구원받아 천국에 태어나고, 악신의 추종자는 버림받는다. 조로
1985년 3월 10일 소련 공산당 서기장 체르넨코가 서거하고, 이튿날 고르바초프가 54세 나이로 서기장에 취임한다. 소련 공산당 서기장 가운데 1917년 10월 사회주의 혁명 이후 출생자는 고르바초프가 유일하다. 장로정치(長老政治)에 익숙한 소련은 젊고 역동적인 고르바초프에게 묵직한 과업을 부여한다. 위대한 미국의 재건을 내세운 레이건의 국방과 외교정책에 효율적으로 대응하고, 소련내부의 적폐를 청산하는 역사적인 과업.케네디와 존슨, 닉슨을 거쳐 15년 넘게 2천억 달러를 쏟아 부은 베트남전쟁에서 참패한 미국은 1979년 호메이니가
지난 6월 4일은 천안문 사태가 발생한 지 30주년 되는 날이다. 1989년 6월 4일 북경의 천안문 광장에서 언론자유, 법치주의, 사상해방 및 민주화를 요구하던 100만의 학생과 시민들에게 인민해방군이 무차별적으로 발포함으로써 대규모 유혈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1990년 중국정부의 공식발표에 따르면 희생자는 민간인사망 875명, 부상자 1만4천550명, 군인사망 56명, 부상자 7천525명이었다. 현대중국 역사에서 씻을 수 없는 비극적인 사건이 천안문 사태다.천안문은 명-청시기에 국가의 주요 법률이나 명령을 공표하던 장소로 출전과
공부 싫어하는 대학생을 위해 장자 ‘내편(內篇)’의 ‘양생주 (養生主)’ 첫머리를 인용한다. “우리 인생은 끝이 있지만, 앎에는 끝이 없다. 끝이 있는 것으로 끝이 없는 것을 따름은 위태롭다. 그럼에도 앎을 추구함은 더욱 위태로울 따름이다.” 유한한 인생에서 무한한 지식을 추구하는 한계와 무의미를 지적한 대목이다. 태상노군(太上老君)과 달리 장주(莊周)가 백성의 무지를 주장하지 않은 사상가라는 점에서 이 구절은 낯설게 다가온다.끝없는 살육과 전쟁 그리고 백성의 피폐한 삶의 근원을 장주는 지식인의 탐욕에서 본다. 각종 방편과 책략을
조리스 위스망스는 소설 ‘거꾸로’(1884)에서 격절된 공간 ‘테바이드’를 찾아 나서는 염세주의자 제쎙트를 그려낸다. 주인공이 세상과 작별하고 고독과 은둔의 공간을 찾으려는 근저에는 쇼펜하우어의 명제가 자리한다. “지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정녕 비참한 일이다.” 세상과 인연을 끊고, 하인들과 함께하는 시공간마저 최소화하는 제쎙트. 19세기 후반 프랑스 세습귀족의 후예가 절대고독을 추구한 배후는 무엇인가.급속도로 진행된 산업화와 자본주의, 제정과 공화정을 줄타기하는 정치체제, 귀족과 성직자 계급의 몰락과 부르주아의 대두. 사회-정치적
날마다 마주하는 뉴스에 가장 많이 나오는 직업은 무엇인가. 필시 정치인일 것이다. 정치의 요체가 분배에 있고, 그것의 실행주체가 정치인이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정치인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렇다면 정치인의 밑천은 무엇일까?! 자의반 타의반으로 들여다보게 되는 국내와 세계정세의 변화양상을 보면서 가지는 의문이다. 무슨 자산을 가지고 정치인들은 지역사회와 국가, 세계를 쥐락펴락하는 하는 것일까.21세기 한국사회의 초석을 놓은 사람들은 노동자와 농어민이었다. 그들은 산업사회를 경과하면서 정치-경제적인 불평등과 소외를 우심하게 겪은
젊은 날 즐겨 불렀던 노래 가운데 ‘이 산하에’가 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과 1919년 3·1운동, 1930년대 만주의 항일 무장투쟁을 내용으로 하는 3절 노래다. 형언하기 어려울 만큼 아프고 괴로웠지만, 눈부시게 빛났던 1987년 어느 여름날 새벽 거리에서 그 노래를 처음 들었다. 가사에 담긴 근현대 한국역사의 질곡과 해방을 절절하게 담아낸 ‘이 산하에’. 완창(完唱)하려면 10분도 넘게 걸리는 이 노래에 빠져든 것은 20대 청춘의 당연한 귀결이었다.유학시절 베를린 공대건물 야경꾼으로 일하러 가는 길에 나지막하게 부르곤 했던
누구에게나 약점이 있다. 나의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은 그림이다. 수많은 인간적인 결함도 그렇지만, 지적인 능력에서 가장 부족한 것이 그림 그리는 것이다. 오죽했으면 고교 시절까지 그림숙제를 형이 대신해주었을까?! 나무나 꽃을 스케치하는 것도 힘들고, 사람이나 개와 같은 대상을 그려보면 아예 비슷하지도 않다. 내가 자신 있게 그릴 수 있는 유일한 형상은 귀신 그림이다.서두가 장황한 데에는 까닭이 있는 법. 지난 4월 30일 광주 ‘무등 공부방’에서 특별한 경험을 한 때문이다. 박종석 화가의 강연 ‘검은 고독, 푸른 영혼’을 보고 들은
올해도 어김없이 숲은 일어서고 있다. 초록과 연두(軟豆)로 무장한 신록의 나무들이 팽팽하게 봉기하는 4월과 5월의 숲.이영도 시인은 “눈이 부시네 저기 난만(爛漫)히 멧등마다 그날 스러져간 젊은 같은 꽃사태”로 절창(絶唱)‘진달래’를 시작한다. 4월 혁명으로 산화해간 이 나라 청춘들의 붉은 피와 산야에 하염없이 피어나는 진달래를 대비한다. 오랜 세월 응어리진 한이 일순 터지듯 산등성이를 붉게 물들이는 진달래의 개화를 선연히 드러내는 것이다.해마다 봄은 그렇게 온다. 시인이 진달래를 바라보는 것처럼 나는 초록 초록한 색으로 산마루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