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의 기초가 돼 ‘산업의 쌀’ 이라 불리는 철강. 철강 패권을 거머쥐는 것은 곧 제조업의 근간을 다진다는 뜻. 철강은 제조업 전반에 소재로 쓰이고 있기에, 제조업 발달을 위해서는 안정적인 철강 소재 확보가 필수적이다.한국은 일찌감치 ‘철’의 중요성에 눈을 떴다. 미국, 유럽, 일본에 비하면 후발주자지만 철강으로 나라를 다시 일으키겠다는 열정은 뒤지지 않았다. 전후 최빈국이었던 1960년대 대한민국은 일관제철소 건설에 사활을 걸었다. 실패하면 바다에 빠져 죽겠다는 ‘깡다구’로 만들어진 포항의 한국 최초 일관 제철소는 이후 반세기 동
영주시의 최대 숙원사업이었던 영주댐과 첨단베어링국가산단이 각각 준공과 최종 승인이 발표됨에 따라 영주시가 추진 중인 미래 발전을 위한 경쟁력 확보에 청신호가 켜졌다.영주댐 다목적댐은 지난달 22일 환경부로부터 최종 준공 승인이 나면서 본댐 준공 7년만에 그 결과를 얻으며 영주시의 새로운 관광 지평과 경제적 성장에 큰 발판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영주 첨단베어링 국가산업단지는 지난달 25일 국토교통부로부터 최종 승인을 받아 최근 5년간 신청된 국가산업단지 가운데 가장 빨리 국가산단으로 승인받는 성과를 이뤘다.국가산단은 영주시는 미래 전
다섯 번째 인터뷰하던 날에 비가 내렸다. 우산을 쓰고 선생과 동해면 신정리 선돌과 금광리 고인돌군을 둘러보고 금광저수지를 산책했다. 함께하는 네 시간 내내 선생은 우리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이야기했다. 선생의 눈에는 지역의 거의 모든 것이 역사의 흔적이었고 이야기보따리였다. 신정리 선돌을 보러 가던 중에 선생이 승용차의 창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오천 문충리에 가면 포은 정몽주 생가터가 있는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 승마석뿐이지. 그래도 거기가 정몽주 생가가 아닌가. 이육사 시인도 일제강점기 때 도구에 있는 동양 최대 규모의 포도
울진은 계절마다 다른 얼굴을 지니고 있다. 울진의 늦여름은 어린아이의 말간 얼굴이 연상된다. 순수한 자연과 향기조차 그윽한 금강송 송이가 있는 곳. 계곡 사이로 수정처럼 맑은 물이 흐르면 세상사 시름과 번뇌조차 말끔히 씻어지는 곳. 이제 얼마있어 가을이 오면 그리운 사람을 찾아가듯 울진을 느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십이령옛길·산림유전자보호구역 품은 금강송숲길220~300년 수령 100만 그루 원시모습 그대로 간직마사토와 바닷바람으로 키워낸 ‘천하일미’ 금강송이9~10월에만 잠깐 만나보는 호사 누려봐도 좋을 듯백암산 신선계곡 옥빛
1885년 포항 동해면 임곡리 출신인 석곡은 근대 한의학의 선구자로 알려졌어. 원래 유학에 바탕을 둔 학문에서 출발해 성리학까지 통달한 분이지. 놀라운 일은 이분이 모든 학문을 독학으로 했다는 것이지.내가 처음 석곡 묘소에 간 게 2008년이야. 소문학회 회원들이 석곡 묘소의 참배를 다닌 지 14년쯤 되었을 때지. 그 후로 방송에 나갈 때마다 석곡을 이야기했고, 그다음 해 묘소를 참배할 때는 지역 언론사의 기자들과 함께 갔어. 그때 석곡 묘소 참배하는 것을 YTN에서 소개하면서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었지.포항이 낳은 큰 인물로 석곡
처서가 지나고 어느덧 여름의 끝자락에 서있다. 비가 오고 무더웠던 여름 더위의 기세도 한풀 꺾이니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지는 것만 같다.아직 휴가를 떠나지 못했다면 여유롭고 한적한 고택에서 늦여름의 정취를 느껴보는 건 어떨까.봉화군에는 옛 아름다운 정서를 고이 간직한 고택들이 모여 있는 전통문화마을이 있다. 과거에 마을이 하상(河上)보다 낮아 바다였다는 뜻을 가진 바래미마을이다.바래미마을은 봉화읍에서 영주쪽으로 약 2㎞ 정도 떨어진 해저리에 있다. 자연과 사람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옛 정취가 지금까지 간직되어 내려온 작은 마을로 독립운
삼국통일이 이뤄진 7세기는 소설의 소재가 될 만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당나라를 축출한 문무왕 김법민은 죽어서 용이 됐다는 설화가 전한다. 바로 그 설화에서 소재를 얻은 김강 씨가 짤막한 소설 한 편을 완성해 본지로 보내왔다. 딱딱한 연재기사를 잠시 쉬어간다는 차원에서 이를 게재한다. 2017년 심훈문학상 수상자인 김강 씨는 작품집 ‘우리 언젠가 화성에 가겠지만’ ‘소비노동조합’ 장편 ‘그래스프 리플렉스’ 등을 출간한 소설가다. #1구릉과 계곡의 휘어진 길을 벗어나자 시야가 탁 트였다. 맑은 날이면
원시의 바람을 느끼고 싶다면 호미곶으로 가야 한다.망망한 수평선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은갈기를 휘날리며 한반도의 동쪽 끝으로 몰려온다.바람이 거세 쌀농사가 힘들었기에 온통 보리밭이었다.호미곶 처녀는 시집갈 때까지쌀 서 말을 못 먹는다고 했다.호미곶 구만리에 보리가 피어나면초록의 물결이 온 누리를 뒤덮는다.차가운 땅 밑에서 키워 온 생명의 기운은사람의 마음밭도 초록으로 물들인다.이른 봄 샛노란 유채꽃이 피어나면하늘색과 바다색도 더 짙어진다.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유채꽃밭으로 뛰어들어한 송이 꽃이 된다. 세워진 지 백 년이 지난
황인 선생은 포항이 고인돌, 선돌 같은 선사시대 유물 외에도 명망 높은 고승을 낳은 곳임을 발견하고 널리 알려왔다. 특히 고려시대 진각국사(眞覺國師) 배천희(裵千熙)와 조선시대 남파(南坡) 대사에 대한 재조명은 선생의 대표적인 업적이다.(여국현=여) : 선생님은 고려시대 배천희 국사에게 많은 관심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황인=황) : 배천희 국사는 1307년 흥해 출신으로 13세에 출가해 19세에 승과에 합격했지. 그 후 10여 개 사찰의 주지를 지내다가 1367년(공민왕 16년)에 국사가 되었고 1382년 76세로 입적하셨어. 당
황보 집성촌을 찾아가던 선생은 우연히 고인돌을 발견하게 된다. 이 우연은 이후 선생이 포항의 고인돌과 선돌을 비롯한 선사시대 유물에 대해 본격적인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포항 지역에 500여 기의 고인돌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돼. 내가 하나하나 다 기록했는데, 사진만 해도 500장이 넘어. 기계면에서만 65기, 흥해와 동해에 각 30기 등 포항에 213기의 고인돌이 있는 것을 확인했지. 할배짝지돌은 선돌인데 할배짝지돌을 찾은 후 할매짝지돌을 수년간 찾아 다녔지만 찾을 수 없었지. 그러던 어느해 신정리에서 마을 앞 보 공사를 하다
무열왕 김춘추, 흥무왕 김유신, 문무왕 김법민. 인척(姻戚) 관계로 맺어진 이 세 사람은 ‘삼한일통(삼국통일)의 트로이카’라 불러도 무방하다.무열왕과 김유신은 660년 의자왕과 계백을 제압하며 백제를 병합했고, 무열왕 사후(死後)인 668년엔 무열왕의 아들인 문무왕이 외숙부 김유신의 도움을 받아 연개소문 자식들의 갈등으로 혼란스러웠던 고구려까지 절멸시킨다.하지만, 온전한 삼국통일을 위해선 한 가지의 문제를 더 해결해야 했다. 바로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동맹세력으로 활동했던 당나라를 내몰아야 한다는 것. 외부세력의 축출 없는 삼한일통은
심해를 맨몸으로 유영하는 프리다이버의 모습은 신비로움 그 자체다. 땅에 발붙이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외계의 생명체 같다고나 할까. 실제로 바닷속 환경은 우주와 가장 유사하다고 알려진다. 행성을 탐사하기 전 우주비행사들이 대서양 아래서 훈련하는 이유기도 하다. 바다를 연구하는 사람들도 프리다이버가 많다고 한다. 바닷속 가장 신비로운 생물들에게 다가가는 빠르고 효율적 방법이 프리다이빙이기 때문이다. 우주를 유영하듯 바닷속을 헤엄치려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훈련이 필요하다. 우주를 유영하듯 바닷속을 오가는 사람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
포항은 바람의 땅사람도 꽃도 나무도 채소도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자란다.영일만에서 샛바람이 거세게 불면육지는 모래투성이가 되었다.일제강점기에 송도 백사장에나무를 촘촘히 심어 방풍림을 조성했고이를 송림이라 불렀다. 나무는 쑥쑥 자라 어느새 하늘을 가렸고울창한 숲을 이루었다.소나무와 측백나무가 빽빽했고다람쥐, 청설모, 산토끼, 노루가 무리를 지어 다녔다.세월이 흘러 송림은 사람들의 아늑한 쉼터가 되었고어린 학생들이 소풍을 즐기는 곳이 되었다.술래잡기, 보물찾기를 하기에 더없이 좋았고나무 아래 팔베개를 하고 누우면 솔향기가 온몸
선생은 황보 집성촌에 찾아가 황보인 가문의 충직한 여종 단량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뿐만 아니라 갑연, 순량 등 여종들의 충절을 기리는 비(碑)가 있다는 사실을 통해 포항이 예부터 충절과 보은의 고장이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여종 단량은 가문의 대를 이어달라는 부탁을 받고 황보인의 손자 황보단을 물동이에 넣고는 뒷문으로 도망쳤어. 구룡포읍 성동리에 옮겨 평생을 숨어 살면서 황보인의 손자 단을 키웠던 거지. 황보인 가문의 대가 안 끊기고 구룡포읍 성동리에 영천 황보씨 집성촌이 형성된 데는 그런 사연이 있었던 거야. 지금도 구룡포읍 성동리
일본의 중부도시 시코쿠(四國) 북동 해안 에히메현(愛媛縣)의 마쓰야마는 소박하고 한적하지만 따뜻한 곳이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온천인 도고온천을 비롯해 일본의 국민소설가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 ‘도련님(坊っちゃん·봇짱)’의 배경지이기도 한 마쓰야마는 깊은 여운이 남는 곳이다. 예술의 섬 나오시마도 마찬가지다. 때로 여행은 볼거리가 많지 않아도 번잡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즐거울 수 있다. 소도시 마쓰야마와 나오시마가 바로 그런 곳이다. 3천년 최고 역사 자랑하는 ‘도고온천’日 최초 문화재·애니 배경지로 유명수건 60% 생산·판매하는 ‘
이 글은 필자가 포항 지역의 사학자 황인 선생과 나눈 다섯 번의 대담과 수차례의 통화 그리고 서면 대화를 정리한 것이다. 당시 선생은 임플란트 시술 중이었고, 필자 또한 서울과 포항을 오가야 하는 상황이라 인터뷰가 순조롭지 않을 수 있겠다고 우려했으나 기우였다. 첫 만남의 대담부터 선생은 매번 두 시간이 넘도록 포항의 역사와 문화, 문화재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주었다.“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역사학자 E. H. 카의 말이다. 이 말이 맞다면 개인 또는 사회가 자신의 역사를 잊거나 혹은 왜곡해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
668년 고구려의 붕괴와 기원전 207년 중국 진나라의 멸망에서는 적지 않은 유사점이 발견된다.두 사건 사이에는 900년 가까운 시차가 있지만, 양국 모두 호걸(豪傑)의 사망과 간신의 횡포, 죽고 죽이는 형제간 다툼이라는 악재가 단시간에 겹쳤다.진나라의 최초 통치자는 모두가 알다시피 진시황(秦始皇·재위 기원전 246~기원전 210)이다.학자들을 산 채로 땅에 묻고, 농사법과 실용기술에 관련된 책 외에는 모두 불태우라는 명령을 내린 ‘분서갱유(焚書坑儒)의 독재자’로 이름이 높지만, 진시황은 그렇게 두부 자르듯 한마디로 단순하게 평가될
인터뷰는 매번 최인수 선생의 단골 식당에서 점심을 하고 나서 진행했는데 메뉴는 늘 된장 전골이었다. 식사하는 동안 선생은 필자가 물을 따르거나 수저를 놓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고 손수했다. 어린 아들에게 밥을 먹이는 아버지 같은 행동이었다. 최인수 선생은 포항시 체육회 부회장에서 물러난 후에도 지역 체육계를 보살피는 일을 계속해 나간다. 그에 얽힌 이야기를 들으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엘리트체육과 생활체육 간 간격 좁힐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포항생활체육협의회 상임부회장직 수락, 종사자 처우개선 노력원로들 모아 지난 2014년
1963년 제1회 경북도민체육대회가 대구에서 열렸다. 대구와 경북의 행정구역이 분리되기 전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정구 선수로 제1회 도민체육대회에 출전한 최인수 선생은 이후 44년간 선수, 혹은 임원으로 도민체육대회에 참가하게 된다.김 : 포항시 체육회에도 오래 몸담으셨지요?최 : 1975년에 포항으로 온 지 얼마 안 돼 체육회 이사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았어. 그때는 포항시와 영일군이 통합되기 전이었고 체육회도 지금처럼 조직적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았지. 변변한 사무실도 갖추지 못한 상황이었거든. 체육을 전공한 사람이 흔치 않
동서와 고금이 크게 다를 바 없다. 대저 ‘제국(帝國)’이 멸망하는 이유는 강력한 외세의 위협도, 바깥에서 오는 충격파 탓도 아니다. 내부가 무너지는 게 가장 큰 몰락의 시그널이다.고구려는 1천500여 년 전 신라와 백제를 포함한 우리 땅 고대 3왕국 중 가장 큰 영토를 차지했고, 당대의 강대국이었던 인근 수나라와 당나라의 모골을 송연하게 한 군사 대국이었다.그럼에도 668년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게 무참하게 패배해 기원전 37년 동명성왕이 세운지 705년 만에 역사 속에서 이름이 지워진다. 허망하고 슬픈 마지막이었다.신라는 고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