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리는 밤에 평론가와 소설가와 시인이 만났다. 평론가와 소설가는 본래 친분이 있던 터라 언제 한 번 보자고 벼르던 게 그 밤이 되었다. 평론가는 최근에 시집을 낸 시인이 생각나서 합석을 하자 했다. 시인이 한 사람 더 동반해 와서 일행은 모두 합해 넷이 되었다. 네 사람은 `오늘도`라는 간판이 달린 소설가의 단골 음식점에 모여 앉았다. 그날 자리를 처음 제안한 소설가께서 포항에서 고래 고기를 공수해 오고 일본 술까지 가져왔다. 술자리가 아주 고급스러워졌다. 네 사람 다 이제는 사십대 중반을 넘어선 나이들. 시끄러운 곳은 귀가 감당을 못해 가지 못한다. 아무나 하고 어울리는 성품들도 못 된다. 낯선 곳 찾아다닐 모험심조차 잃었다. 단골 음식점의 따로 나 있는 조용한 방 같은 곳이 이런 사람들
지난 며칠 동안은 목에 디스크가 도져서 며칠 다시 침을 맞으러 다녔다. 몇 년 전이었던가. 한 4년쯤 된 것 같다. 어느 날 늦가을에 눈을 뜨니 엉치뼈가 금이 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고관절 부근이었던 것도 같다. 마치 유리창에 돌멩이가 날아와 금이 간 것처럼 기분 나쁘게 번져 가는 통증이 허리 디스크의 시작인 줄은 그때는 몰랐다. 그런데 그게 앉지도, 서지도, 눕지도 못하는 상태로 전개되는 것이었다. 나는 평소에 건강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몸을 함부로 굴리는 경향이 있고, 웬만한 아픔쯤은 별 것 아니려니 하고 넘기는 악습이 있었다. 서른일곱 살까지는 담배도 하루에 한 갑 이상을 피웠고, 술은 여전히 소주나 양주 같은 독주를 마신다. 일을 시작하기를 두려워하는 진입 공포증 같은 것을 지
여행 가면서 책 두 권을 들고 갔다. 그 중 한권이 조지 오웰의 산문집.`나는 왜 쓰는가`하는 제목의 산문집이다. 왜 쓰는가. 너무 근본적인 질문이어서 혼자 여행할 때 부담스러워 보이기도 하지만 언젠가 다 읽지 않은 게 늘 마음에 걸리던 참이었다. 그 중에 사형수를 처형하는 얘기를 써놓은게 있었다. 조지 오웰은 원래 영국 사람이지만 버마에서 경찰을 했다. 식민지를 다스리는 경찰이니 결코 좋은 일을 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 일을 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고 했다. 경찰 일을 하면서 오히려 영국이 식민지를 끝까지 다스릴 수 없고, 언젠가는 물러나게 되리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버마 사람들은 이 젊은 영국 경찰 머리속에서 그런 의식이 작동하고 있다는 걸 알 리 없었을 것이다.
일본 동북부의 에치고유자와(越後湯澤)라는 곳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설국`의 고향이다. 이곳은 도쿄에서 신칸센으로 1시간 20분 정도 걸리는 곳이다. 옛날 같으면 훨씬 더 오래 걸렸을 곳이다. `설국`이 가와바타 야스나리에게 노벨문학상을 안겨준 작품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최근 일본에 갔을 때, 요미우리신문 1면에`세설`의 작가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노벨문학상 후보에 네 번이나 올랐다는 기사가 났다. 그러나 결국 그 세대의 일본쪽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가와바타 야스나리로 낙착된 것이었다. 왜일까.`설국`은 두 번은 읽은 것 같은데, 줄거리 같은 것이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대신에 작품 전면에 흐르는 어떤 아련한 슬픔 같은 것이 기억에 남아 있다. 주인공 시마무라와 게이샤 고마코의
다큐멘터리를 좋아하는 나는 디스커버리 애청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최근에는 지구 45억년의 비밀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지구에 어떻게 생명체가 나타났으며, 공룡은 어떻게 해서 멸종됐고, 인간은 어떻게 이 땅에 출현하게 되었느냐를 이 프로는 참 생생하게 알려 주었다. 새롭게 알게 된 사실 한 가지. 예전에는 공룡이 멸종하고 나서 포유류가 나타난 것으로 알았는데, 땅속 생활을 하던 포유류가 소행성 충돌로 인한 화마를 피해 지구를 지배하는 주인공으로 떠올랐다는 것이다. 하기는 어렸을 적에는 공룡과 인간이 함께 사는 원시시대 만화를 보았으니 내 기억이 잘못 되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인간이 이 땅에 접붙이고 그 생명이 이어지고 이어져 `나`라는 존재에까지 이르렀다고 보면, 그런 사연이 예
겨울 눈 내린 대전 중앙시장통 골목길 저녁은 쓸쓸하게 느껴졌다. 나는 금방 어머니, 아버지와 헤어져 이곳에 들렀다. 기차 시간을 기다리는 두어 시간 동안 역에서 가까운 이곳을 돌아보기로 한 것이다. 옛날에는 더 어렸을 때 크던 공주에 자주 갔는데, 이제 공주는 맘을 못 내고 대전의 추억 어린 곳들만 둘러보게 되는 나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려는 사람은 현실과 싸우지 못하는 법. 나는 이 악습을 언제 버릴지 알 수 없다. 겨울 저녁은 어딘가 쓸쓸하고 추워, 따뜻한 곳을 찾고 싶은 심정이 된다. 나는 대전역에서 옛날 도청으로 통하는 큰 길을 걷다 중앙시장 통으로 걸음을 옮긴다. 그 곳에 이른바 `먹자거리`가 있다. 나는 오늘 이 먹자거리며, 생선 파는 곳들을 둘러보고 싶다. 옛날에 몰랐던
48%의 국민들이 박근혜 대통령 당선자를 지지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문재인 후보가 절반은 성공했음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현 정부에 대한 염증이 그렇게 넓고 깊게 자리 잡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당과 문재인 후보는 실패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만약 투표율이 77%를 넘어갔다면 문재인 후보는 선거에 지고도 말춤을 춰야 하는 웃지못할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이번 선거를 두고 우려의 목소리가 많다. 세대 간 대립, 지역 간 대립이 너무 크게 드러났다는 것이다. 이 두 단절 때문에 차라리 눈에 덜 뜨인 계층간 대립도 그에 더하면 더했지 못하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선거 기간 내내 좌절과 증오의 목소리가
먼저 박근헤 대통령 당선자께 진심을 담아 축하를 드린다. 학교 교실에서 반장을 뽑을 때도 드라마가 있는데, 하물며 대선에서야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그 모든 어려움을 겪고 앞으로 5년 동안 새로 나라를 이끌어 가시게 되었다. 이제 며칠 동안은 긴장을 풀고 휴식을 취하며 안정을 취하셔도 될 것이다. 그런데 뜨거운 마음으로 축하를 드리며 함께 기뻐하면서도 마음 한 곳에 기대와 당부의 말씀을 드릴 것을 벌써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벌써 여러 차례 국민의 손으로 직접 큰 지도자를 선출하는 과정을 거쳐 왔다. 그때마다 그 분이 당선되실 때는 큰 기대를 품고도 퇴임하실 때는 참담한 실망을 맛보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우리가 겪어온 5년의 소감도 똑같이 그렇다. 새 대통령 당선자는 그렇게 되지
나라가 온통 사람 뽑는 문제로 뒤숭숭하다. 여당에서는 박근혜 후보가 처음부터 단일 후보로 나섰고, 야당에서는 문재인 후보에 안철수 후보까지 있어 단일화하는 과정을 거쳐 이제야 겨우 전열을 정비한 것 같다. 대통령 선거는 일개 기업이나 학교에서 사람 뽑는 것과 달라서 국민 다수의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 한두 사람이 아니라 몇 백만, 몇 천만을 움직여야 하는 일이 어떻게 쉬울 수 있나. 이 큰 마음은 한 두 시간에 움직이지 않는다. 아무리 마음 급해도 하루이틀 따지지 않고, 급한 사람 마음과는 전혀 다르게 천천히, 움직이지 않는 듯 움직이는 게 이 마음이다. 그러나 또 한 번 어느 방향을 가지고 움직이기 시작하면 어떤 방패로도 그물로도 막지 못하는 게 이 마음이다. 나는 여권은 여권대로, 야권은
세상 사는 일에는 늘 싸움이 뒤따라 다니는 것 같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그저께 토론이 있었던 것도 싸움의 측면이 없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떤 계절이 되면 노사 양측이 타협하지 못하고 일전을 벌이는 것을 보는데, 이것도 다 세상살이의 싸움이라면 싸움이다. 계급이나 계층, 성별이 달라서 집단적인 갈등을 빚고, 더 많은 것, 더 유리한 것을 차지하기 위해 싸울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의 필연이라면 필연일 것이다. 그러나 이 싸움은 단지 집단적 차원에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학창시절부터, 취직을 하고, 승진을 할 때도 한 사람은 다른 사람과 고독한 경쟁을 벌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경쟁은 곧 싸움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싸움은 일반 사회에서만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학교에도 싸움이 있다.
얼마 전에 학교 후배가 대학에 취직하는 문제로 몸살을 앓은 일이 있다. 멀리서 이 일이 되어 가는 과정을 바라보며 삶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됐다. 대학 교수가 되는 일은 참 어렵다. 그 어려움은 고시에 합격하는 것과도 다르다. 고시 같은 것은 점수를 높게 받으면 그 순서대로 합격 통지를 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 대학에서는 그와 다르다. 아무리 좋은 학교를 나와도, 아무리 논문 실적이 많아도 그 사람이 취직되리라는 보장이 없는 게 바로 대학의 교원 임용 과정이다. 학과마다 필요로 하는 사람의 특성이 다르고, 그 학과에 이미 형성되어 있는 학맥이나 인맥이 다르다보니 공부를 잘 하는 사람이 꼭 선택된다는 법이 없다. 어떤 때는 남자라서 안 되고 어떤 때는 여자라서 안 된다. 어떤 때는 특정 종교
최근에 백석이 번역한 `테스` 에 대해 글을 쓴 일이 있었다. 백석은 너무나 잘 알려진 시인이지만 이 사람이 토마스 하디의 소설 `테스` 까지 번역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그뿐이 아니다. 백석은 숄로호프의 노벨문학상 수상작 `고요한 돈강`의 1부와 2부까지 번역하기도 했다. 백석은 언어에 달통한 사람인 듯했다. 그는 일찍이 일본에 건너가 영문학을 공부했고, 신문사 기자로 일하기도 했다. 함흥에 있는 영생고보라는 곳에서 교사 일을 하기도 했는데, 그 때 러시아 사람에게 러시아어를 배우는 것을 목격한 제자들의 증언이 있다. 그러니까 백석은 영어나 러시아어, 일본어 같은 외국어들을 상당히 자유자재로 이해하고 구사할 수도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런 백석이라고 해서 시인이 `테
2년 전에 대전에 있는 한의원에 간 적이 있다. 애초부터 한의원에 가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대전은 내가 성장기를 보낸 곳이다. 가끔 혼자 아무 이유 없이 그곳에 가고 싶은 때가 있다. 그곳에는 부모님이 계시지만 이런 때는 부모님조차 뵙지 않는다. 잠행을 하듯이 옛날 추억의 거리들을 둘러보고 돌아오게 된다. 대전역에 내려서 횡단보도를 건너면 아카데미 극장이라는 옛날 극장이 아직도 간판을 붙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뒷문 쪽으로 난 골목으로 접어들면 여인숙 촌이 즐비하다. 이곳은 왠지 은밀한 거래들이 이루어지고 있을 것 같은 인상을 풍긴다. 이 골목을 조금 더 걸어가다 보면 한의원들이 밀집해 있는 거리가 나타난다. 나는 아무 이유 없이 단지 추억을 곱씹으면서 나 자신에 대한 상념이나 즐길
우리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12년이 걸리는 교육제도를 가지고 있다. 12년을 공부한 후 다시 대학에 가서 2년에서 4년 정도 공부를 하고, 남자는 군대에 갔다 와야 비로소 명실상부한 사회인이 된다. 12년 동안 학생들은 매일 아침 학교에 나가 교실에 앉아서 수업을 받게 된다. 이 기간 동안 교과목 교육은 한 층 한 층 얇은 벽돌을 쌓아나가듯이 이루어진다. 국어 과목을 예로 들면, 초등학교 6년 동안 이루어진 성취기준은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와서도 수준을 높여 섬세하고 조밀하게 이루어진다. 세밀한 성취기준에 따라 만들어진 국어 교과서를 중심으로 꽉 짜여진 교육을 받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12년은 너무 길다. 또 학생들의 서로 다른 재능들을 높이 고양시키는 방법이 못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과정에
최근 여러 문제와 관련해서 역사 인식 문제가 화제가 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복잡한 현대사를 헤치고 나왔기 때문에 우여곡절이 많고, 그만큼 논란을 불러 일으키는 사람도 많다. 나는 역사 문제를 역사가들처럼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내 의견을 정면에서 피력하는 것을 피하곤 한다. 역사가들처럼 생각한다는 것은 뭘까? 그것은 인물의 행위를 역사라는 거울에 비춰 판단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역사는 역사가들 마다 다를 것이기 때문에 역사 속의 인물을 판단하는 것 역시 그들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역사가들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속성 가운데 하나는 자신의 역사적 신념에서 벗어나는 인물을 용납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역사가는 친일 행적이 있는 인물, 독재에 협력한 인물들을 뱀 보듯이 하고,
그날 나는 학교 가는 버스를 타고 있었다. 중학교 2학년. 내가 살던 동네 태평동도 변두리지만 학교는 더 먼 변두리에 있었다. 학교에 가려면 시내버스나 스쿨버스, 아니면 자전거를 이용해야 했지만 그 어느 것도 시간이 꽤나 걸렸다. 시내버스가 다니는 신작로까지 한참 걸어간 후 버스를 타야했다. 등교시간에는 언제나 만원. 버스 안내양 누나가 배로 금방이라도 터질 듯 한 김밥 버스에 밥알들을 밀어 넣으며 오라이를 외치면 버스 기사 아저씨가 급브레이크를 밟아서 김밥 속을 정리했다. 버스 앞문과 뒷문 중간쯤에 겨우 버티고 서서 한손으로는 터질 듯한, 또 다른 김밥 책가방을 붙들고, 다른 한 손으로 천장에 매달린 손잡이를 잡고 거친 운전솜씨에 적응하려고 안간힘을 쓰다보면 어느 사이엔가 라디오 소리가 귀에 들어오기
이번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중국의 모옌으로 결정났다. 말로는 말하지 않고, 글로나 말하겠다는 뜻에서 필명을 말 막자, 말씀 언자, 莫言으로 했다는 작가다. 우리에게는 장예모 감독이 연출한 영화`붉은 수수밭`의 원작자로 더 잘 알려져 있고, 작가 이름만 가지고는 낯설게 느낄 작가다. `붉은 수수밭`을 본 것은 한참 된 일인데, 화면에 흐르던 중국적인 붉은 색채와 지독한 고량주 냄새는 생생하기만 하다. 주연을 맡은 공리는 이 영화로 일약 스타덤에 올라 그 뒤로 숱한 명작들에 출연하는 명배우가 되었다. 모옌에게 명성을 선사하고, 끝내는 그를 노벨문학상 수상자로까지 만들어준, `붉은 수수밭`의 원작 이름은 `홍까오량 가족`이라는 상당히 긴 장편소설이다. 이 소설은 연작 장편소설로 영화 `붉은 수수밭`에
무라카미 하루키를 향한 내 의문에 답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하루키도 이미 변했다. 하루키라는 존재가 한국문단에 그 존재를 뚜렷이 한 때는 1990년대 전반기. 그때 문학사상사에서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을 `상실의 시대`로 번역해 들인 것이 공전의 히트를 쳤다. 일본 68혁명 세대의 패배를 노래한 이 음유시인 기질의 작가는 한국에 들어와 80년대 학생운동의 패배감에 젖어 있던 세대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특히 당시의 X 세대들은 그의 신도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1980년대에 학생들이 `창작과 비평`이나 `김수영시전집`을 들고 다녀야 고상한 티가 났다면, 그때는 하루키 책 한 권쯤은 들고 다녀야 시대를 아는 청년으로 취급되는 듯했다. 하루키의 어느 단편소설에서 주인공이 이렇게 독백했
올해 추석은 아주 길었다. 마음이 한가로워서였을 것이다. 8월, 9월은 몹시 힘들게 보냈는데, 급한 일들을 어떻게든 마감을 짓자 갑자기 시간이 느리게 흐르기 시작했다. 추석 전전날에 대전에 내려갔다. 전날에는 고등학생 때 추억이 깃든 옛 도시 중심가를 걸었다. 그곳도 역시 변하기는 했다. 옛날에는 브라암스가 있었고, 얼마전까지 쌍투스라는 커피숍이 있었다. 지금은 젊은이들이 왁자지껄 드나드는 로바다야키가 들어섰다. 대신에 쌍리라는 조용한, `요즘스럽지` 않은 찻집이 생겼다. 오래 못 만난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웠다. 차례를 지내고 서울로 올라와 장인이 계신 파주에 다녀오자 어쩐지 모든 의례를 다 끝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다음날은 일찍 학교에 나갔다. 월요일이었을 것이다. 불교방송 라디오에 잠깐
바야흐로 한국, 중국, 러시아와 일본의 영토 전쟁이 심각하다. 한국의 독도, 중국의 댜오위다오(센카쿠 열도), 러시아의 북방 4개 섬을 두고 동아시아 관련 4개국이 각축을 벌이고 있는 현장에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것이다.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했을 때 여론이 엇갈렸다. 그때는 한창 대통령 인기가 떨어지고 있을 때였고, 한일 정보보호협정 문제로 논란이 많았기 때문에 대통령의 독도 방문은 인기 제고책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일본 여당은 그때 세금 문제로 급박한 위기에 처해 있었다고 한다. 내막은 잘 알 수 없지만 일본 여당 역시 `내우(內憂)`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때문인지 일본 수상은 독도 방문에 즉각 반응하며, 국내 여론의 관심을`외환(外患)`쪽으로 돌리려 했다. 일본의 반응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