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을 사용하던 인간은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제우스의 노여움을 사게 되면서 불을 빼앗기게 된다. 이후 인간들은 문명의 씨앗과도 같은 불을 빼앗기고서 어둠 속에서 고통을 겪게 된다. 이를 애처롭게 지켜보던 프로메테우스는 대장장이의 신인 헤파이스토스의 대장간에서 불을 훔쳐 인간들에게 전해준다. 이것을 계기로 프로메테우스는 카프카스의 바위산 정상에 쇠사슬로 묶여 매일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벌을 받게 되고, 제우스에 의해 질병과 재앙의 고통이 인간들에게 내려진다. 인간은 신에게서 불을 얻음과 동시에 그에 따른 재앙과 고통을 받게 된다.영화
우리는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영화같은 순간을 만났던가. 우리의 삶은 그 영화같은 순간들이 편집된 기억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기쁨과 슬픔, 감동과 후회, 만남과 이별의 순간들이 이어져 있다. 오랜 세월 영화를 만들어 왔던 감독은 그의 삶에 있었던 영화같은 순간들을 모티프로 작품들을 만든다. 물론 선택된 기억만을 보여주고 필름 위에서 윤색되어 관객을 만난다.반세기 동안 영화를 만들어 온 그의 작품을 몇 편쯤은 보았을 것이다.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이야기 속에서 기쁨과 놀라움, 슬픔과 감탄을 연발해 왔다. 우리는 영화감독이 만들어 놓은
죽음은 온전히 살아남은 자의 몫이다. 망자를 절차에 따라 떠나 보내고 남은 자리엔 ‘정리’와 ‘상실’의 과제가 남는다. 뜻하지 않은 죽음은 ‘만약(if)’이라는 후회와 회한의 절차를 반복한다. 그 반복적인 절차 속에서 상실은 옅어지고 삶에 대한 또 다른 에너지를 얻기도 한다. 그 무엇도 온전히 상실의 빈공간을 채우지는 못하겠지만 무뎌지고 잊혀지면서 상실의 아픔은 아물어간다.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스즈메의 문단속’은 바로 이러한 ‘정리’와 ‘상실’에 관한 영화다.‘너의 이름은’에서도 그렇지만 의미를 알 수 없는 꿈에서 시작된다. 반복
무더운 여름, 한적한 바닷가 마을의 수산물 가공공장으로 청년 야마다가 들어선다. 오징어 배를 따고, 말끔히 손질을 하는 작업이 반복된다. 그에게 사장은 “누구든 다시 시작할 기회는 있는 법이야”라는 말을 건네며 무코리타 연립주택을 소개하고 평화로우며 무료한 이곳 마을에서의 삶을 시작한다. 살다보면 쌓여가는 짐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왔다고 생각했지만 이곳에서의 삶은 또 다른 짐을 만들고 새로운 인연을 만들게 된다.잊고 싶었던 그곳의 인연이 다시 이곳으로 소환되고, 이곳에서 맺어진 인연들과의 사연이 연립주택의 현관문을 넘나든다. 어느
모세가 야훼로부터 받은 ‘십계명(十誡命)’은 행해야 할 두 개의 명령과 하지 말아야할 여덟 개의 금기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으로써 신의 세계로 향하는 엄혹한 규칙이며, 행동과 함께 마음까지 살펴야하는 규범이다. 불교에서는 승려와 신자들이 마땅히 지켜야할 가장 기본적인 계율로 오계(五戒)가 있다. 모두 ‘아니 불(不)’로 시작하는 부정어로 시작한다. 해야할 것보다 하지말아야할 것을 강조한다.하지만 인간은 쉽게 계명과 계율에서 이탈한다. 그리고 반성하고 회개하며 계명과 계율의 궤도로 귀환한다. 인간은 해야할 것과 하지말아야할 것들 사이
쉽지 않았던 만남을 어떻게 정리해야할까. 만남도 쉽지 않지만 헤어짐도 만만치 않다. 시작은 내 모든 것을 내놓으며 어필하지만 헤어질 때는 무엇을 남겨야 하는가의 문제가 있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1’편이 상영된 것이 10년 전이니 이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3’편에서는 강산이 변하는 시간 동안의 추억을 뒤로 하고 아름답게 헤어져야만 한다.10년 전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1’편(2014년), 우주의 어딘가에서 하나 둘씩 모였던 이들은 이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3’편에 이르러 각자의 소망을 담아 흩어진다. 각자가 떠나왔던 곳
패션모델계에서 시작한 영화는 호화 유람선으로 무대를 옮긴다. 잠잠했던 유람선은 바다의 기상에 따라 흔들리고, 해적의 습격을 받아 침몰한다. 그리고 난파된 유람선에서 탈출한 8명의 사람들은 섬에 표류된다. 장소에 따라 모두 세 개의 장으로 구셩된 영화는 1부 ‘칼과 야야’, 2부 ‘요트’, 3부 ‘섬’으로 구성되어 있다.3개의 구성을 관통하는 것은 ‘돈’이다. 돈을 축으로 계급과 인종, 성차별과 권력의 관계를 담는다. 숱한 상징과 은유가 있지만 깊거나 복잡하지 않다. 그래서 표면적이고 직접적이다. 1부인 ‘칼과 야야’에서는 패션모델계
아일랜드의 가상의 섬 이니셰린에서 막역했던 두 사람이 갈등을 빚는다. 절교를 선언한 사람과 느닷없이 절교를 당한 사람. 농담이거나, 알지 못하는 말실수이거나, 기분 탓이려니 이유를 찾아 보지만 알 수 없고 그 사실이 와닿지 않는다. 이제 그 이유를 찾는 과정이 펼쳐진다. 추측이 난무하고 어정쩡한 주변의 조언이 이어지지만 관계는 더욱 더 악화되어 간다.갈등은 점점 극단으로 치닫고, 대수롭지 않은 이유는 첨예한 가치관의 세계로 퍼져나간다. “이유는 없어. 그냥 자네가 싫어진 것뿐이야”라고 시작했던 절교. 남은 삶을 사색하고, 작곡하고,
20년이 지난 기억은 어떻게 남아 있는가. 31살의 아빠와 11살의 딸이 함께했던 튀르키예 여행은 어떤 이미지로 기억되어 있는가. 그날의 온도와 날씨, 대화와 음식, 사건과 풍경들은 잊혀진 것인가 감춰진 것인가. 샬롯 웰스 감독의 영화 ‘애프터썬’은 다시 회상하는 기억(추억)의 의미를 더듬는다.다시 회상하는 기억의 동기가 되며, 기억의 보조 장치로 등장하는 캠코더. 11살의 여름, 아빠와 함께했던 며칠 간의 여행은 딸의 시선과 아빠의 시선으로 파편적으로 캠코더에 담겨있다. 흐릿한 기억과 파편적으로 담겨 있는 기록. 기억과 기록의 행
정점을 향한 여정에 이제 한 발짝만을 남긴 인물이 있다. 물론 그 정점 너머 또 다른 목표지점이 나타나겠지만 아무도 도달하지 못한 지점의 초입에 다다른 사람.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최초의 여성 지휘자이며, 8개의 말러 교향곡 실황 녹음에 마지막 5번 교향곡 실황녹음을 앞두고 있는 ‘리디아 타르’. 물론 가상인물이다. 베를린 필은 한번도 여성 지휘자를 선임한 적이 없다.영화는 초반부 상당한 시간을 할애하여 ‘타르’가 쌓아 올린 음악에 대한 업적과 생각, 일관된(절대 다양하지 않다는 점이 중요하다) 견해를 듣는다. 이 모든 것들은
남을 것인가 떠날 것인가. 제2차 세계대전의 프랑스. 시시각각 독일군이 프랑스로 진군하면서 사람들은 ‘이곳’을 떠나 그곳’으로 가기 위해 마르세이유로 몰려 든다. 이제 마르세이유는 떠나기 위해 머물러야 하며 머무르기 위해 떠나야 한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장소가 된다.1940년 파리가 함락되고 프랑스 의회 결의를 통해 전권을 위임받은 페탱이 독일과의 협상에 의해 프랑스 북쪽은 독일이, 남쪽은 괴리정부인 비시정부가 들어서게 되면서 프랑스를 떠날 수 있는 비자를 발급받을 수 있는 곳은 니스와 마르세이유 단 두 곳뿐이었다. 프랑스를 탈출
영화는 삶과 죽음, 사랑과 이별, 유령이라고 하면 떠올릴 수 있는 일반적인 요소들을 태연하게 펼쳐 놓는다. 특히 침대보를 뒤집어 쓴 유령이 등장하는 장면은 노골적이다. 눈구멍 뚫린 침대보를 뒤집어 쓴 유령이 그가 살던 집으로 걸어가는 장면에서는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교통 사고로 갑작스럽게 사망한 C는 유령이 되어 그가 살던 집에 남은 사랑하는 M의 곁에 머문다. 그리고 M의 슬퍼하는 모습과 극복의 과정을 목격한다.죽음은 살아남은 자의 몫이라고 생각했지만 이 영화는 죽은 자의 몫으로 그린다. 살아남은 자의 시선이 아니라 철저히 죽은
우리의 삶은 숱한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오늘 점심은 무엇을 먹을까에서부터 맘에 드는 물건을 살 것인가 말 것인가,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신발을 신고, 약속을 할 것인가, 전화를 할 것인가 등등 사소한 선택에서부터 시작해 무수한 선택의 과정을 통해서 오늘의 내가 있고 내 삶이 이루어졌다고 하겠다. 물론 그 선택이 늘 옳은 것은 아니다. 최선의 선택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떤 결과가 만들어졌을까.선택은 의심과 후회로 이어진다. 현실의 삶이 불만족스러울수록 과거의 선택은 후회와 회한으로 남는다. 그때 내가 다른 선
한 남자가 산에서 떨어져 죽는다. 형사(해준)는 살인인가 자살인가의 의문에서 출발해 증거를 수집한다. 죽은 남자의 부인인 서래는 용의자와 피의자 사이를 오가며 의심과 신문(訊問)의 과정 속에서 스스로의 알리바이를 증명해 나간다. 형사와 용의자는 신문(訊問)과 증명(알리바이)을 주고 받으며 혐의를 입증할 것인가 벗어날 것인가의 추리 수사물의 전형적인 구조를 가진다.남여가 만난다. 호감을 가지고 상대의 마음을 확인하기 위해 애쓴다. 대화하고 관찰하고 모든 행동과 대화를 되새기면서 어떤 의도로 그렇게 말했는가를 파악하기 위해 각자의 위치
불현듯 삶이 공허해진다. 안정적인 직장에 원만한 결혼생활, 경제적인 안정까지 꾸준히 쌓아 올렸던 일상, 정답이라고 생각했던 일상에 의문이 든다. 진정 내가 원했던 삶은 무엇인가. 누구나 살아오면서 한번쯤 던졌을 질문이 시작된다. 우리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인생의 행로를 수정하며 살고 있는가. 쉽지 않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여정이 얼마나 큰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가를 깨닫는 순간 의문 가득한 불안한 일상 속에 머문다.물론 누군가는 과감히 떨치고 반복되는 일상의 궤도를 이탈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어진 여건(
영화를 이끌어가는 두 개의 대사가 있다면 그것은 “왜?”라는 질문과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이다. “왜”는 살인의 동기를 묻는 질문이고, “당신은 누구야”는 “왜”라는 질문을 하는 이에게 되받아 치는 질문이다. 이 두개의 질문은 반복된다. 답을 요하는 질문에 서로가 질문으로 맞서니 실마리는 풀리지 않고 사건은 미궁으로 빠진다.세 번째 살인. 세기말의 도쿄에서 유사한 형태의 살인사건이 연이어 발생한다. 범인은 다르지만 똑같은 방식으로 살인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모방범죄이거나 살인을 저지르게 된 동기의 유사성이 아닐까 추측한다. 평범
‘애프터 양’은 근원적인 슬픔을 내포한 영화다. 이 슬픔은 두 가지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하나는 삶의 주기가 다름에서 오는 것이다. 인간과 안드로이드가 함께 살고 있는 시기를 알 수 없는 미래, 탄생에서부터 죽음까지 일정한 성장과 성숙의 속도를 가진 인간에 비해 안드로이드의 탄생(생산)과 죽음(폐기)은 필요성에 의해 그 시기가 결정되며 인간과의 그것과는 다른 양태를 띤다.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인간의 모습과 생산되어 폐기되기까지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안드로이드. 서로의 시간은 상대적이다. 일정한 삶의 주기를 살다가는 인간의
1789년 프랑스는 구체제인 절대왕정을 무너뜨리는 시민혁명이 일어난다. 바로 프랑스 혁명이다. 그러나 절대왕정이 무너진 자리를 대체했던 정치체제는 쉽게 자리를 잡지 못했고, 세 차례의 입헌 군주정과 짧은 두 번의 공화정, 두 번의 제정 등 80년 간 여러 정치체제를 겪는다.프랑스 혁명 이후 부침이 심했던 프랑스는 1870년에 들어와서 프랑스 제3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이후 1940년까지 약 70년간 안정적인 공화정 체제를 구축한다. 이 시기 프랑스 혁명 때 사용됐던 구호인 ‘자유, 평등, 박애’가 국가이념으로 굳건하게 자리 잡는다.19
이것은 한 도시에 관한 영화다. 수 천년의 찬란한 유산과 숱한 이야기들을 쌓아 올린 거대하고 아름다운 도시 로마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로마의 역사와 유적, 그 속에 담긴 어떠한 이야기도 끄집어 내지 않는다. 지금 현재 로마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지중해를 중심으로 거대한 제국을 형성했던 로마는 통치를 위한 각종 제도를 만들고, 제국의 이름에 걸맞는 부를 형성하고 그 기반 위에 유적과 유물, 풍습을 만들어 나갔다. 어느 것은 거대했으며, 어느 것은 치밀했으며, 어느 것은 독창적이었으며, 어느 것은 복합적인 정서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벨파스트’는 북아일랜드의 수도이다. 영국의 서쪽에 위치한 아일랜드 섬. 그 섬의 북쪽 영국령에 속하는 지역이 북아일랜드다. 그곳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이 아일랜드 공화국이다. 16세기 잉글랜드 왕국의 핸리 8세에 의해 아일랜드가 점령당하게 되면서 원주민과 이주민, 가톨릭과 개신교의 갈등이 시작된다.가톨릭을 믿던 아이리쉬(아일랜드인)와 잉글랜드인에 의해 전파된 개신교 간의 갈등은 지배와 피지배의 권력다툼과 맞물려 오랫동안 아일랜드에 갈등을 일으키고 피바람을 불게 했다. 중세부터 시작된 잉글랜드의 지배는 수백년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