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애 류성룡과 충무공 이순신은 16세기 중반 임진왜란 때 조선을 구해낸 영웅이다. 반드시 주목할 점은, 모함과 시기의 덫에 걸려 죽음으로 내몰리는 이순신을 살려낸 이가 류성룡이란 사실이다. 그래서 류성룡 없는 이순신은 있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순신 없는 류성룡은 있을 수 있었을까? 이순신이 없었다면 영의정 류성룡은 있었겠으나 구국의 영웅 류성룡은 있을 수 없었다. 이러한 사정을 환하게 밝혀낸 송복(연세대 명예교수)은 두 사람의 만남에 `위대한 만남`이란 말을 헌사하고, 같은 제목의 책을 썼다. 그로부터 400여년이 지난 20세기 중반, 우리 역사는 또 하나의`위대한 만남`을 낳았다. 박태준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박정희와 박태준의 만남이 근대화 역사에서 `위대한 만남`으로 기록될 것이라 한다. 포항제철
“산업화세력과 민주화세력의 화해는 우리 시대의 절박한 요청이며 과제다.” 이 시대적 숙원을 정치와 통치의 차원에서 처음 외친, 우리 사회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의 과제로 처음 제기한 인물은 고(故) 박태준 선생이다. 그때는 1997년 늦가을이었고, 그해 12월에는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루었다. 한국 헌정사상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 그것은 우리 현대사에 새 지평을 개척한 어마어마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때 박태준의 외침은 고독한 것이었고, 그만큼 사회적 반향이 미약할 수밖에 없었으며, 대통령 김대중은 그 고독한 외침을 하나의 유언처럼 고스란히 후대의 과제로 남겨둔 채 청와대를 나와서 이 세상을 떠났다. 그로부터 정확히 15년 세월이 흐른 올해 12월, 박태준의
내일은 박태준 회장 서거 1주기다. 오전의 국립 서울 현충원 추모식에 이어 오후에는 포스코센터에서 부조(浮彫) 전신상 제막식과 `박태준 사상, 미래를 열다`라는 책의 출판기념회가 열린다. 인생의 황혼을 거니는 한 찰나를 재현한 그 벽에는 6천 쪽이나 되는 `박태준 어록`에서 연대별로 뽑은 그의 말도 한글과 영어로 새겨두었다. 모두 여섯 문장이다. 1969년 12월 “조상의 피의 대가로 짓는 제철소입니다. 실패하면 우향우 해서 영일만 바다에 투신해야 합니다” 이 말은 영일만 신화의 핵이었던 우향우 정신이다. 1977년 5월 “우리 세대는 다음 세대를 위해 순교적으로 희생해야 하는 세대입니다” 순교자적 희생, 가슴을 찌르는 말이다. 1986년 3월 “포항공대 설립은 먼 훗날을 위해서, 국가 장래를 위해서
그저께 밤, 대선후보 3인의 TV토론을 지켜보았다. 자주 짜증이 치밀어서 돌릴까 했으나 혹시 정책 차이를 발견할까 하여 끝끝내 돌리지 않았다. 내 소감은 실망스러운 토론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 모양으로 만든 주요 원인은 이정희 후보와 눈치뿐인 사회였다고 생각한다. 무슨 선거법이 이따위냐 하다가도 3번 후보가 따발총 말솜씨로 떠들어댈 때마다 의구심이 솟구쳤다. 저런 얼굴이 과연 한국 진보의 얼굴인가? 나는 이른바 `이념의 경계`안에 갇혀서 살지 않는 작가지만, 나와 같은 시청자도 지켜보는 그 화면에서 그토록 `목적지상주의`를 맘껏 발휘해도 되는 것인가? 내가 보기에 한국 진보에 가장 시급한 기본자세는 `겸손과 예의`이다. 그러나 목적지상주의에는 겸손과 예의가 존재하기 어렵다. 그 이념, 그 사상에서
오는 12월13일은 박태준 포스코 창업회장의 서거 1주기다. 대선의 아우성이 고인을 추모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얼마나 덮어버릴지 몰라도, 현재 추모사업위원회는 차분하고 조용하게 그날의 일들을 준비하고 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의 눈에 얼른 띄지 않을 일에는 `박태준 연구`라는 학자들의 연구 작업이 있다. 몇 년 전부터 시작한 그것은 올해 4월에 `박태준 연구 총서`다섯 권으로 출간되기도 했고, 이 성과들을 바탕으로 삼아 그의 정신세계와 신념체계를 더 치밀하게 통찰하고 분석한 `박태준의 사상`이 1주기에 맞춰 출간될 예정이다. 지난해 박태준의 서거 당시에 여러 외국 언론과 국내의 모든 언론이 하나같이 그의 영정 앞에 헌화하듯 `영웅, 거인, 거목`을 바쳤다시피, 그는 한국 근대화 시대의 영웅이다. 이 영
사상이 무엇인가? 이 질문 앞에서 보통 사람들은 주눅부터 들어 말문이 막히기 마련이다. 체계와 논리를 정연히 갖춘 거창한 정신세계가 사상이라고 생각해온 오랜 통념이 그 모양으로 만든다. 헤켈, 칸트, 니체, 하이데거, 주자, 왕양명 같은 동서의 고명한 이름들까지 떠올리게 되면, 그만 스스로가 한없이 왜소해 보이고 초라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통념이다. 사상을 그런 측면에서 생각한다면, 그것은 사상이 무언지 모르거나 사상을 너무 현학적으로 맹신해온 탓이다. 사상은 우리 삶과 멀리 떨어져 있는 `고원(高遠)한 무엇`이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현학적이고 고원한 정신세계가 체계와 논리까지 겸비했다면 그것이 사상임에는 분명하지만, 그런 정신세계만이 사상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안철수 후보의 브랜드는 `상식`이다. 나는 그의 상식에 대하여 몇 가지 의문을 품고 있다. 잠깐씩 검증의 대상으로 떠올랐던 딱지 아파트, 아내의 서울대 교수 임용과정, 전세살이 타령, 단란주점 등과 관련된 것이다. 그런데 그저께(13일) 한 언론사의 대선 여론조사를 본 다음에는 이 시점에서 `안철수의 상식`에 대한 나의 근본적 불만을 밝혀도 될 것 같았다. 그 발표에 따르면 `박근혜와 문재인`이 맞붙어도 박근혜가 조금 빠지고 `박근혜와 안철수`가 맞붙어도 박근혜가 조금 빠지는데, 안철수보다는 문재인이 박근혜에게 간발의 차이로 더 이길 것이라고 했다. 이쯤에서 내가 안철수 후보에게 던지는 질문은 이렇다.“대통령이 될 준비, 나라를 통치할 준비, 민족의 운명을 결정할 준비를 아직은 시간 부족의 관계로 인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 포항시 남구 선관위 이마에 붙은 말이다. 다른 선관위에도 붙었는지 모르겠으나, 대한민국 64년사의 산맥 하나는 그 꽃을 제대로 피우려는 고난과 투쟁으로 이루어졌다. 그 꽃은 무엇보다도 대선이 `정책과 인물의 대결`로 이뤄질 때 비로소 활짝 피어난다. 안타깝지만 그 꽃은 이번 대선에서도 시들시들하다. 아직도 정책과 인물의 대결은 성립되지 않았다.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후보가 어떻게 단일화할 것인가? 박근혜 후보와 단일 후보가 맞붙으면 누가 이길 것인가? 이따위에 국민적 관심이 쏠려 있다. 이것은 `안철수의 그늘`이다. 현재까지 그가 가장 잘한 일은 한국정치에 쇄신의 바람을 불러일으킨 것이고 가장 잘못한 일은 정책과 인물의 대결을 실종시킨 것이다. 나는 오래 전부터 주장했지만, 다음의 대
고향 독자들과 생각을 나눈다는 봉사의 마음으로 이태에 걸쳐 거의 매주 월요일마다 `세상읽기`를 했다. 새해부터는 다른 글쓰기에 쫓겨 멈춰야 하니, 이제 인사를 겸해 세모(歲暮)의 소회를 밝힐까 한다.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가 “한국의 영웅이 떠났다”고 보도한 고(故) 박태준 선생을 서울 현충원 국가유공자 묘역으로 모시려는 어느 시각이었나 보다. 평양에서 김정일 위원장이 심장을 뚝 멈췄다. 올해는 `세계 독재자들의 수난의 해`로 기록될 만 하다. 1월에는 노점상 청년 부아지지의 분신자살이 촉발한 재스민혁명이 튀니지의 23년 독재자 벤 알리를 축출하더니, 2월에는 이집트의 30년 독재자 무바라크를 쫓아내고, 4월에는 코트디부아르의 10년 독재자 로랑 그바그보를 법정에 세우고, 10월에는 리비아의 42년 독재
“안철수씨가 30% 정도 지분을 갖고 있는 안철수연구소가 올해 들어 주가가 500%나 뛰었다는데, 이는 안철수씨의 대권행보에 영향을 받은 주가 상승이다. 적절히 정치권에 왔다갔다하면서 자신의 높아진 정치적인 인기 때문에 안철수연구소 주식이 계속 고가를 유지하도록 교묘하게 개입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지난 10월25일, 안철수 교수가 박원순 캠프에 레터를 들고 찾아간 다음날에 `대통령을위한기도시민연대(PUP)`가 발표한 성명의 한 구절이다. 문득 이것이 궁금해진다. 오늘이라도 그가 대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안철수연구소 주가는 곧바로 곤두박질칠 것인가? 안철수 교수의 느닷없는 등장은 가장 극적으로, 가장 적나라하게 한국정치를 혁신대상의 실체로 시대적 무대 위에 세워놓았다. 치솟은 주가총액 중
24년 전 이맘때는 드디어 내 인생도 삼십대의 문지방에 닿은 초겨울이었다. 세계의 변혁에 대하여 진정으로 고뇌하는 인간은 삼십대라는 시절에 청춘의 순정한 열정적 관념을 전략으로 가다듬는다. 또한 그것을 자신의 신념과 사상이라 자부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일에 대하여 `진보와 정의와 선(善)을 위한 투쟁`이라 확신한다. 마르크스, 히틀러, 호치민이 그랬다. 하얼빈 역두에서 권총을 쏘는 안중근은 삼십대였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는 예수도 삼십대였다. 존재의 본질, 세계의 변혁에 대한 탐구와 번민으로 술을 마시며 청춘을 탕진한 즈음에 맞이한 삼십대의 문지방에서 나는 폭음의 음주벽에 휘둘리고 취할수록 `더러운 것들`에 대한 분노가 더 명징해지는 인간이었다. 이미 작가였지만 작중 인물의 고민과 발
1986년 11월22일 덴마크 코펜하겐 공항. 평양에서 날아온 세 사내가 입국 심사대로 걸어가 일렬로 선다. 맨 앞은 덴마크 주재 북한 대사, 다음이 조선로동당 지도원, 그리고 오길남 박사. 오길남이 누구인가? 현재 통영시민이 북한에서 송환하려는 `통영의 딸 신숙자`의 남편이며 이들 부부의 두 딸 혜원과 규원의 아버지다. 25년 전 그날 오길남은 코펜하겐 공항 입국 심사대에서 탈북을 시도한다. 창구로 밀어 넣는 여권 위에 감쪽같이 쪽지를 얹는다. 독일어와 영어로 “제발, 제발 나를 도와 달라!”고 적은 것이다. 쪽지만으로 못 미더워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독일 박사학위논문까지 잽싸게 밀어 넣고는 눈을 감는다. 억센 손아귀가 진땀에 젖은 그의 몸을 당긴다. 순간적으로 대기실로 끌려간 그는 탈북에 성공한다.
서울시장에 뽑힌 박원순. 내가 그의 진정한 친구라면, 과연 축하선물로 무엇을 보내야 할까? 오래 고심한 끝에 `거울`을 택하겠다. 미당 서정주의 시 `국화 옆에서`에 등장하는 그 거울, 머나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돌아와 이제는 거울 앞에 선 누님이 자기 삶을 성찰하려는 그 거울. 오늘 아침에도 박 서울시장은 거울 앞에서 얼굴을 살폈겠지만 내 주위 사람들은 언론에 비친 그의 얼굴이 말끔해 보이고 승리의 기쁨과 벅찬 감격 탓인지 피로의 낌새도 없는 얼굴이라 말했다. 그러나 내 눈에는 그의 얼굴이 멍투성이로 보였다. 눈두덩이 시퍼런 것 같고 광대뼈에도 땡감이 달라붙은 것 같았다. 내 눈에 보이는, 그의 얼굴에 남은 그 시퍼런 멍들은 검증의 펀치를 얻어맞은 상처들이다. 박 서울시장은 보름 남짓 진행된 선거운동
`인생은 아름답다. 미래의 세대로 하여금 인생에서 악과 억압과 폭력을 일소하고 삶을 마음껏 향유하게 하라` 참 아름다운 말이다. 러시아 혁명을 주도한 트로츠키의 것이다. 레닌이 후계자로 점찍었지만 그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 스탈린에게 권력을 빼앗기고 졸지에 떠돌이 신세로 전락해 머나먼 멕시코까지 도망쳤다가 스탈린의 자객에게 무참히 쓰러진 `영구혁명론`의 트로츠키. 20세기 초 레닌과 함께 세계 재편의 뇌수 역할을 했던 그의 명민한 머리와 뜨거운 가슴은 영구혁명으로써 미래 세대에게 저 말이 실현된 체제를 물려줄 수 있다고 꿈꿨다. 그가 지목한 `악과 억압과 폭력`이란 제정러시아 짜르체제, 스탈린의 무자비한 폭력정치, 시장 질서의 비인간적 횡포였을 것이다. `월가를 점령하라!` 미국 전역을 넘어 세계로 번지는
우리나라 `국군의 날`인 10월1일은 중국 공산당 창당일이다. 이번 토요일에 그들은 창당 90주년을 맞는다. 오늘의 중국 공산당에 공산주의는 있는가? 붕어빵에 붕어가 없는 것처럼, 중국 공산당에는 공산주의가 없다. 공산주의의 지상과제는 프롤레타리아혁명의 계급해방과 사유재산 철폐의 분배평등이다. 당연히 자본가는 타도 대상이다. 그러나 1989년 6월 천안문사태 직후에 출범한 장쩌민의 중국 공산당은 당헌(헌법)에 `사유재산 보장`을 집어넣어 사영기업 경영자들도 대거 당원으로 받아들였다. 마침내 부자(농업중심시대의 `지주`)들도 합법적이고 공식적으로 타도 대상에서 동지 신분으로 바뀌었다. 물론 그러한 변화는 현재 중국의 빛과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 빛은 중국을 G2로 성장시킨 것이다. 2008년 미국 리먼사태
올해는 일제 식민지시대에 중국 동북지역에서 한인 독립군을 양성했던 신흥무관학교 개교 100주년이다. 딱히 그것을 기념하려는 뜻은 아니었지만, `일본 천왕의 신민(臣民)`으로 전락한 조선인들이 `만주`라 불렀던 중국 요녕성(랴오닝성)을 두루 돌아다녔다. 버스에 몸을 싣고 대련, 여순 감옥, 단동, 통화, 유하, 심양(옛 봉천) 등에 차례로 머물렀다가 다시 대련으로 돌아온 그 여정은 총 2천100km로, 한국(남한) 육지의 테두리를 따라 한 바퀴 도는 것과 맞먹는 거리였다. 만주 곳곳에는 망국 시대를 감당한 조선인의 피와 땀과 눈물이 배어 있었다. 이제는 그 터마저 옥수수 밭으로 변한 신흥무관학교는 피와 땀과 눈물로써 민족정신을 깨우고 가꾸며 미래의 희망을 부여잡은 독립투쟁의 상징이었다. 1909년 만주
“한나라당이 재집권을 위해서는 날로 심화돼 가고 있는 사회 양극화를 완화해야 한다.” 지난 19일 한나라당 홍준표 대표가 내놓은 발언이다. 그가 말한 `사회 양극화`란 무엇일까? 경제적 문제로 범위를 한정하면, 당연히 저 외환위기(IMF사태) 때 결정적으로 굳어진 `20 대 80`의 사회구조를 다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부터 14년 전인 1997년 겨울부터 한국에서 살아온 대다수 한국인은 `아이엠에프사태`라는 말에 진저리를 친다. 그 국가부도위기 사태가 한국사회를 돌이키기 어려운 `양극화` 체제로 굳어지게 했다. 이것은 우리 시대의 상식이다. 그해 겨울에 한국경제는 국제통화기금(IMF)의 식민지 체제로 합병됐다. 그해 여름, 4년여 만에 조국으로 돌아와 포항 북구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승리한
문학의 기능에는 `사회의 부족한 것`을 드러내고 `부조리에 저항하는 것`이 포함돼 있다. 이것을 문학인은 특권처럼 종종 누린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주장해 왔다. “문학의 이름으로 한국 정치판을 비난하고 비판하려면 문학단체에 깊이 관여하는 문학인들이 정치판 뺨치는 짓거리를 하지 말아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정치판을 향해 손가락질하지 말고, 그 손가락을 그러한 문학인들 쪽으로 돌려야 한다” 공자의 말씀에도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한다”는 금언(金言)이 있지만, 인간이 사회적 존재로서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자신의 직무에 충실한 사람`이다. 문학에서는 문학적 본분에 충실한 사람이 `좋은 문학인`이다. 인생에 대하여, 사랑에 대하여, 죽음에 대하여, 사회에 대하여,
1979년 11월 어느 날, 구상(具常, 1919~2004) 시인이 애잔한 표정으로 강단에 섰다. 문득 나는 긴장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신념과 규율이 강고한 사람이었다. 그것이 한국 산업화의 동력이었다. 그러나 영혼에 대해 깊이 고뇌하진 않았다. 그것이 오늘의 비극을 불렀다. 이제는 저승 가는 발길에 자녀들만이 걸리기를 바란다” 은사의 오래된 말씀을 지금도 나는 똑똑히 기억한다. 박 대통령의 오랜 친구였던 구상 시인. 술자리에선 대통령을 `박 첨지`라 부르고 장관직 제의를 사양한 시인은 그이의 죽음에 조시(弔詩)를 바쳤다. `설령 그가 당신 뜻에 어긋난 잘못이 있었거나 스스로 깨닫지 못한 허물이 있었더라도/그가 앞장서 애쓰며 흘린 땀과/그가 마침내 무참히 흘린 피를 보사…` 시인은 `독재자에게 조
올해 내가 읽은 책들 중에 강렬한 인상을 남긴 한 권은 `가장 근원적인 것에 대하여`(인간사랑, 379쪽)이다. `허화평의 개헌청원론`이란 부제가 붙은 그 책의 저자는 포항 출신 허화평 전 국회의원이다. 지난 90년대에 포항시민이 두 차례 국회로 보내기 전의 그는 `5공의 설계자` 또는 `5공의 키 플레이어`로 불렸다. 그것은 그에게 정치적 강점인 동시에 약점이었다. 국가적 위기와 혼란을 극복한 용기와 지혜와 능력을 겸비한 인물이라는 이미지를 풍겼던 반면, 5공의 과오나 악덕과 분리할 수 없는 인물이라는 선입견을 줬던 것이다. `가장 근원적인 것에 대하여`를 읽어보면 그의 정치적 강점으로 작용했던 그 이미지가 결코 과장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사색과 논리와 주장은 `지금 여기서 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