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무실 뒤뜰이 아이들의 웅성거림으로 소란하다. 점심시간이면 으레껏 학생들은 운동장 여기저기에서 자신들의 놀이방식으로 후회 없는 시간을 보낸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학생들은 창조적인 방법으로 시공간을 종횡무진 한다. 무리를 이룬 학생들은 그 학생들대로, 혼자인 학생은 또 그 나름대로 1시간이라는 짧지만 귀한 시간을 설계한다. 그 모습은 마치 시간 설계자 같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운동장에 있는 것이 산자연중학교 점심시간의 모습인데, 아이들이 교무실 뒷공간을 점령한 것은 흔치 않는 일이다. 그 공간은 도로와 학교를 구분하기 위해 나
무더위의 연속이었다. 이처럼 더운 날들의 연속이 언제 또 있었을까. 한반도가 정말로 아열대가 되는 것일까. 날씨가 궁금하기는 해도, 주요뉴스가 되기는 드문 일이 아닐까. 지구온난화 탓에 생기는 일이라니 그저 견뎌야 하나. 더위를 식혀줄 소식이라도 한 자락 들려온다면 지친 마음이 쉬어갈 수 있을까. 사람이 만들어 내는 시원한 이벤트라도 한 마당 펼쳐진다면, 고단한 몸에 기운이 조금이라도 솟아오를까. 포항국제불빛축제. 폭염의 한 복판에 축제 마당이 펼쳐졌다. 힘들고 복잡한 일들이 켜켜이 쌓여 숨 쉴 겨를도 없는 판에 축제가 웬 소용일까. 그것도 이렇게 무더운 한 가운데서. 나라 안팎 소식들에도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뉴스가 드물지 않았나. 정치는 우리를 배반하기 일쑤이며 경제는 하루하루 삶을
현재 전국에는 4만개가 넘는 어린이집이 운영되고 있고 약 150만 명의 어린이가 보육시설을 이용하고 있다. 포항에도 약 1만5천명의 영유아들이 보육시설을 이용하고 있으며 500여개의 어린이집이 현재 운영되고 있다. 10년전에 비하면 보육시설을 이용하는 아동수가 2배이상 늘어났다고 한다. 여성의 사회적 진출증가로 맞벌이 부부가 늘어나고, 이에 따른 정부의 보육료 지원정책도 지속적으로 확대돼 앞으로도 보육시설을 이용하는 어린이들은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보육시설은 하루 2번의 간식과 한 끼의 식사를 제공하고 있으며 이는 영유아 하루 필요영양의 3분의1 이상을 차지하는 양이다. 영유아기는 식품에 대한 기호가 결정되고, 식습관이 형성되며 성장의 기초가 형성됨으로써 건강하고 위생적인 양질의 급식이 제공돼야 한다. 그
민족 최대의 명절답게 꽤 긴 연휴였다. 누군가는 가을 휴가라고까지 말했다. 하지만 명절과 휴가 분위기를 내기에는 여러 가지 상황들이 너무 좋지 않았다. 대표적인 것이 5.8 규모의 지진. 예전과는 많이 달랐다. 이번에는 흔들림이 컸다. 그 흔들림에 많은 피해까지 났다. 연휴 기간 내 TV들은 지진 소식을 전하느라 바빴다. 그리고 말했다. 더 이상 우리나라도 지진 안전지대가 아니라고. 국민들을 더 불안하게 만든 건 지진대 위에 원자력 발전소가 있다는 것. 정부는 경주 지역의 원자력 발전소들이 6.8의 지진에도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는 내용을 연일 방송을 통해 내보면서 국민들을 안심시켰다. 선동하기 좋아하는 언론들은 연일 지진 당시 상황을 내보내면서 국민 불안을 조장했다. 언론을
요 며칠 간의 날씨를 가장 잘 나타내는 단어를 들라면 필자는 주저하지 않고 “훅”을 들 것이다. 전국을 절절 끓게 만든 폭염이 “훅” 갔다. 그리고 가을이 “훅” 왔다. 계절의 변화를 준비할 시간도 없이 훅 가고 훅 와버렸다. 훅 떨어진 기온에 은행잎들이 노랗게 질렸다. 곧 맨몸을 드러내야 하는 나무들이 부끄러움에 붉게 물들 것이다. 그럼 올 한해도 다 가고 만다. 김영랑 시인은 이런 상황을 `모란이 피기까지는`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으니 /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 가고 말아 / 삼백 예순 날 하양 섭섭해 우옵네다” 빠름에 중독된 인간들 때문에 자연까지 빨라지고 있는 게 아닌지 걱정이다. 자연은 늘 완충 시간을 두어 인간들에게 변화에 준비할 시간을
`코헬렛`의 저자 솔로몬은 세상의 일을 통하여 깊은 허무를 경험하였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라고 했다. 히브리어에 있어 `허무`는 `입김, 실바람, 수증기`라는 뜻이다. 인간의 권력도, 재물도, 심지어 인간의 목숨까지도 하느님 앞에서는 허무하게 사라지는 수증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가지지 못한 권력에 취해 보고픈 유혹, 맘껏 사용해도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재물이 있기를 바란다. 솔로몬은 `코헬렛`의 마지막 장에서 늙음과 죽음에 관한 생각을 털어놓는다. “젊음의 날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해와 빛, 달과 별들이 어두워지고 비 온 뒤 구름이 다시 몰려오기 전에 그분을 기억하여라…. 은사슬이 끊어지고 금 그릇이 깨어지며 샘에서 물동이가 부서지고 우물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의 시작이다. 그래서 삶의 마지막을 평온한 상태로 보내야 새롭고도 아름다운 세계가 그의 영혼의 면전에 펼쳐질 수 있다. 이러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잡된 것을 털어내고 스스로가 성실하고 진심어린 마음을 갖고자 노력해야 한다. 서서히 죽어가지만 아직 대화가 가능한 자는 그의 말하는 태도나 내용, 또는 죽음을 수용하는 방법에 따라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죽음에 대한 공포와 슬픔을 줄 수도 있고, 반대로 용기와 감동을 선사할 수도 있다. 주위에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어야 하겠다. 임종의 최종적 의미는 `아직 살아 있는 동안 영원한 생명을 가지기 위해 궁리하라`는 신이 인간에게 내리는 무언의 설득이다. 죽음은 단순히 시간적으로 끝없는 세계로의 몰입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보다는 지
오늘도 요양병원 중환자실에서는 누군가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린다. 아마도 어느 나이 많은 노인이 몰아쉬던 숨을 거두어들인 것 같다. 신이 허락해 주신 기간을 다 채우고, 이제는 신에게 그의 인생 족적을 보고하러 떠나 가버린 모양이다. 산다는 것은 피로, 고난, 괴로움, 좌절 등이 동반되는 험난한 과정이다. 그러나 죽어서 신에게 신고식을 할 때 우리는 인생 전체를 그럭저럭 또는 어처구니없이 살아왔다고 보고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지하게 삶을 살지는 못했을 지라도 최소한 사는 동안 계속해서 악을 행하거나 그냥 시간을 낭비하면서 흘려보내지는 말아야 한다. 삶을 끝내고 신을 만날 때 성실치 못한 인생에 대해 후회의 양을 줄여야 한다. 왜냐하면 이 때는 신에게 어리광을 부리면서 선처해 줄 것을 청원해
사람들은 돈이 많으면 행복도 거기에 비례할 것으로 착각한다(전도서. 6장1~3). 국민 소득이 8천400달러였던 1993년에는 52%가 행복하다, 42%는 그저 그렇다, 6%는 불행하다고 답했다. 20년이 지난 2011년 말 국민 소득이 3배인 2만3천달러일 때, 행복 여론 조사에서 52%는 행복하다, 40%는 그저 그렇다, 8%는 불행하다고 답했다. 이것으로 보면 국민의 행복감은 경제 성장과는 비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3배를 더 잘 살아도 행복 지수는 비슷하다. 또 2011년 월 소득이 500만원 이상인자는 57%가 행복하다고 했고, 200만~499만원 정도의 사람은 52%가 행복하다고 했다. 200만원 미만이 사람은 50%가 행복하다고 했다. 이로보아 돈의 많고 적음보다도, 내가 내 삶을 어
정열에 불타던 청춘 시절에 만나 일생을 약속한 부부는 그들만의 `인생 수레`에 두 개의 바퀴가 되어 생명이 다 할 때까지 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그런 과정 동안 둘은 수많은 갈등과 부부싸움, 자식을 낳아 기르고, 재물의 형성이나 파산, 봉변을 당하거나 용서, 출세와 실패 등을 겪어가는 동안 어느새 백발의 머리에 잔주름이 가득한 노부부가 되어서 잘 걷지도 못하게 된다. 어느날 늙은 부부 두 사람이 산책하던 중 부인이 넘어졌다. 평평한 길에서 서로 팔을 잡고 천천히 걸었는데도 갑자기 쓰러지면서 허리를 삐어서 요양병원에 입원했다. 이런 경우에 남편인 할아버지는 병원에서 목욕하기, 화장실 가기, 옷 입기 등을 보조할 수밖에 없다. 할아버지는 여러 면으로 수발을 들지만 힘이 줄어든 상태여서 능률을 전혀 보
종교에서는 사람들에게 사랑이나 자비, 또는 어진 마음(仁)을 가지라고 한다. 이는 생태적으로 인간은 악의 요소를 소유하고 있거나 태어나서 살아갈 때 악을 먼저 배워버리기 때문일 것이다. 하기야 나 자신도 남들이 보지 않을 때에는 나쁜 짓을 하고 싶기에 다른 사람을 탓하기 전에 나부터 행동을 조심해야 함이 옳은 것이다. 얼마 전 SBS `TV 동물농장`에서 어떤 사내가 자전거에 개를 묶어서 질질 끌고 달리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또 최근 한 신문에서는 화살로 순진한 개의 배를 관통 시켜버린 글을 읽었다. 주택지의 도로에는 방음벽을 설치하여 시민들에게 시끄러움을 줄여준다. 그러나 어떤 곳에서는 투명한 방음벽으로 인해 새들이 부딪혀서 보호종 새들마저 죽어가는 실상을 들어본 적이 있다. 고의는 아니겠지
필자는 TV드라마를 즐겨 보는 편이다. 특히 사극보다는 인생드라마에 좀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소위 말하는 막장 드라마의 마력에 푹 빠져 있는 건 아니다. 그저 인생드라마 속에서 어려운 삶을 극복하며 아름답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풋풋한 사람냄새가 좋기 때문이다. 저품격 드라마라고 통칭하는 막장 드라마도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는 방송물로 마냥 지탄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드라마 주인공의 파란만장한 삶과 보편적 생각을 뛰어넘는 극적인 반전 그리고 시청자들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드라마틱한 줄거리로 구성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저품격 저질 드라마라고 평가한다는 것은 방송이 주는 시각적 재미와 상상력을 무시한 주관적 판단으로 보인다. 반전이 주는 극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내기 위한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 되어 내면을 안착시킬 때 비로소 우리는 평안함을 느낀다. 이런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면 그는 자기 주위마저 안락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사방에서 일어나는 여러 여건들로 우리의 생각에 풍파를 일으켜서 매일의 삶은 불안을 연속시킨다. 인간은 평화를 바라면서도 마음속에는 탐욕과 증오심, 싫어함, 시기함 등으로 꽉 차서 화평한 분위기를 만들지 못한다. 세상은 우리에게 원한과 대결을 계속 부추긴다. 그래서 세상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도 투사정신을 부추기고 전쟁에서 승리하면 영웅시 한다. 과격함을 좋아하고 평화를 지향하면 나약한 사람으로 몰아붙인다. 세상은 한시도 평화로운 시간이 없다. 몇 년 전 복지국가인 노르웨이에서도 극우 청년의 테러로 80여 명이 목숨을 빼앗겼고 그 당시 영국의
지난 8일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안(웰다잉 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우리나라에 호스피스·완화의료 개념이 도입 된지 약 50년 만에 연명의료 중단 결정을 허용하는 법이 제정된 것이다. 10여 년 전부터는 상당수 시민 단체들도 법제정을 촉구하였다. 이 문제는 2008년 세브란스 병원에서 김 할머니 사건이 소송으로 비화되기도 했다. 이 법안은 국민의 80.2%가 찬성을 하고 있고, 죽음이 임박한 환자의 존엄을 보호하는 범위와 한계 안에서 환자의 자기 결정권을 존중하자는 것에 제정 목적이 있다. 그래서 유익하고 필요한 의료 행위와 기본적 돌봄을 마지막까지 행할 것을 이 법에서 명시했다.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연명의료 중단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우리는 3차원의 공간 속에서 살아간다. 4차원 이상 무한 차원까지는 하나님의 작은 가방 속에 하나의 점(點)으로 들어 있어서 인간은 그것을 느낄 수가 없는 모양이다. 마치 우주가 탄생될 때, 빅뱅이라는 사건을 통하여 수백억 도의 열을 뿜으면서 순간적으로 하나의 점에서 우주가 생성되었다는 과학자들의 주장과 같은 원리이다. 시간과 거리를 사람들은 살아가는 것에 맞게 필요한 길이로 토막 내어 작게 쪼개어 두었다. 이제 연말로 접어드는 시간이 되면, 사람들은 지나온 1년 동안 실적을 회상하고, 다음 해에 해야 할 일을 생각하게 된다. 연말인 이때 나는 독자들에게 희망찬 송구영신으로 알찬 내년이 되기를 기원한다. 사업의 성공, 자녀의 좋은 학교 입학, 연구의 실적 쌓기, 더 행복한 가정생활 등을 다음 해
요한은 예수님을 두고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고 하며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온 분”으로 소개하고 있다. 바오로는 필립비인들에게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리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고 알려준다. 따라서 우리에게 오신 아기 예수님은 모든 것을 버리고 우리와 같이 되신 분이시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신다. 그 실천의 모습은 어떤가? 요한은 예수님이 벳자타 못 가에서 서른여덟 해나 앓는 사람에게 다정하게 질문하는 분으로 묘사했다. “건강해지고 싶으냐?” 직역하자면, 온전해지고 싶으냐이다. 마음에서 원의를 일으킨 다음 말씀으로
태어난 후 줄곧 시골에서 살았다. 60년 전 초등학교 6학년 11월에 전학하기 위하여 트럭을 타고 밤에 대구에 도착했을 때, 가로등 불빛에 번쩍거리는 길을 나는 얼음이 얼어서 번들거리는 줄 알았다. 그것은 처음 본 아스팔트길이었다. 6·25사변 직후에는 길이나 산에서 총알을 줍기도 하고, 상이군경이 많았다. 길거리에는 거지와 부모를 잃은 고아도 많았다. 그들은 지금 돼지나 먹을 수준의 열악한 음식을 얻어먹으면서 살아갔다.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하여서 기뻐하는 신문기사를 읽기도 했다. 산길을 걷다가 노루, 토끼, 여우는 물론이고, 산돼지를 본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중학 시절에 흑백 TV가 나왔고 TV가 있는 상점 앞에는 동네 주민들이 모여서 왁자지껄거리면서 시청을 하였다. 볼펜이 생산되기 시작했
신은 만물 중 가장 좋은 최후의 작품으로 자유 의지와 다양성을 가진 인간, 남녀를 만들었단다. 그래서 그들에게 외롭지 않게 가정을 이루게 했다. 사랑을 가슴에 품고 서로를 위하면서 살아가도록 했단다. 이렇게 처음 만난 낯선 두 사람은 어떻게 성장해 왔으며, 성격은 어떤지 전혀 몰랐다. 생면부지인데도, 어떻든 살아가는 것을 보면 신기하다. 남남이던 두 사람은 살면서 일생동안 지지고 볶는다. 때로는 기뻐하거나 슬퍼하기도 하고 괴로워서 울기도 많이 한다. 삶에서 다툰 횟수를 합하면 벌써 원수가 됐고 깨어진다면 100번도 더 부서질 듯이 살아 왔는데…. 그런 상대의 죽음 앞에서 남은 자가 눈물을 흘린다. 그렇게 싸우면서도 헤어짐에서 울다니…. 이것이 바로 `가정의 신비`라는 것이다. 이런 각도에서 보면
작자와 창작연대 미상의 고전소설 `장화홍련전`은 배좌수의 딸 장화가 정혼을 하게 되자, 혼수를 많이 준비하려는 남편의 의도에 불만을 품은 재취가 자신의 재산 몫이 줄어들 것을 염려해서 흉계를 꾸며 장화를 죽인다. 동생인 홍련의 꿈에 죽은 장화가 현몽하여 홍련은 장화가 원사한 사실을 알게 되고, 장화가 죽은 못을 찾아가 물에 뛰어들어 죽는다. 그 뒤 부사로 부임했던 정동우(鄭東佑)가 장화와 홍련이 겪은 억울한 죽음의 진실을 밝혀주었다는 잘 알려진 서사이다. 서사에서 말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장화와 홍련의 계모, 즉 배좌수의 재취이다. 장화와 홍련이 죽고 없는 시점에서, 진실을 말하든지 거짓을 말하든지는 순전히 그녀의 마음이다. 그녀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진실을 은폐하고 거짓 증언을 선택한
일제 시대 때는 공산주의자와 자유주의자가 세계를 양분하여서 서로 총을 겨누고 있었다. 그때에는 공산주의가 유행병처럼 퍼져나갔다. 그러나 1989년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잇달아 독일 통일과 소련 공산체제가 무너졌다. 일제 강점기에 많은 사람들은 모두 잘 사는 세상을 지향한다는 공산주의에 매혹을 느꼈다. 공평하게 모두 다 잘사는 사회를 건설 한다는데, 누가 `그건 나쁜 생각이야!`라고 할 수 있었겠는가. 빼앗긴 조국을 찾으려 노력한 사람들의 많은 수가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특히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앞장서서 지지를 하였다. 일본만 물러가면, 서로 춤추며 잘 살 수 있는 세상이 온다는 기대감에, 자원하여 공산당에 입당했다. 또 6·25 사변으로 남침을 당하였을 때, 북한 공산군인은 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