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고 깨끗한 향기와 눈처럼 흰 색깔의 꽃이 핀다. 꽃이 비녀를 닮아서 옥비녀 꽃이라 부르기도 한다. 원산지는 중국이지만 오래전에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토종인 비비추와 닮은 점이 많다. 햇빛이 적당히 드는 반그늘을 좋아하므로 나무 그늘 밑에 많이 심는다. 풍성한 잎이 매력적이며, 꽃은 8월부터 한 달가량 잇달아 핀다. 흰색의 옥잠화 꽃은 오후 4시경부터 꽃잎을 벌리는데, 밤에는 향기가 좋다. 물을 좋아하므로 잎이 나오기 시작하는 메마른 봄철이나 한여름 건조기에는 저녁에 물을 충분히 줘야 한다. 2년에 한 번 정도 포기를 나누어 번식시킨다. 어린잎은 나물로 먹는다. 옥잠화 차는 서늘한 기운이 있어 소변이 불편 하거나 인후염에 효능이 있다. 종기나 상처에 꽃을 짓이겨 붙여 아물게 하는 데 쓴다. 혈관을 확장 시
태고의 신화처럼 좀체 열리지 않을 것 같은 문을 밀고 들어선다. 마치 사십여 년은 기다렸다는 듯 기찻길에서 어른거리는 추억 하나. 아버지를 먼발치에서 보고 쓸쓸히 돌아서서 서울행 기차에 올랐다.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돌아서면 어떡하느냐고 쫓아오던 열이, 눈물이 나서 차마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허랑허랑 꽃잎만 날리고 기차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기적을 울리며 달렸다. 내 열아홉의 봄을 싣고서. 달달한 것을 많이 먹어서 커피를 마셔야겠다는 일행의 말에 내 추억이 화들짝 달아난다. 살아있다는 건 달콤한 브라우니를 먹다가 쓴 커피를 마시는 일. 차창 밖으로 주체 못 할 외로움이 겨울바람에 실린다. 레일 카페에선 지나간 상처도 아름다워진다. 군위군 산성면 화본 마실이다. 인구 250명에 불과한 오지,
한적한 겨울 거리는 바람 소리만 요란하다. 미처 떠나지 못한 낙엽들이 거리를 헤맨다. 저들의 거처는 어디인가. 이 광활한 우주에 떠돌이로 돌다가 생을 마치는 건 아닌지 이름 모를 노숙자들의 삶 같아 쓸쓸하다. 안동은 정신문화의 고장이다.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하회마을을 비롯해 도산서원, 퇴계 종택, 농암 고택, 군자마을 등, 양반 고을의 전통과 문화가 살아 숨 쉰다. 차로 이동하는 중에 독립운동을 한 애국자들의 비석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그러고 보니 안동은 한국 근대 최초의 갑오의병이 일어난 한국 독립운동의 발상지가 아닌가. 전국에서 가장 많은 독립운동 유공자, 자정 순국자가 나온 곳이기도 하다. 내 조상의 고향이기도 해서 더 각별하게 느껴진다. 안동 땅을 밟으니 어린 시절 생각이 난다
소담한 마을이다. 도시의 갑갑함을 버리고 훌쩍 떠나온 길에서 생명 숲을 만났다. 도하송이 허리를 굽혀 반긴다. 섬솔밭에서 불어오는 청량한 바람이 여행으로 지친 몸과 마음을 푸근히 감싸 앉는다. 휴(休). 숲이 주는 치유이다. 호산지당의 빼어나게 아름다운 연못과 울창한 소나무 숲이 원시적 신비로움마저 감돌게 한다. 우주를 품은 듯 생명의 기운이 느껴진다. 이곳에 수기(水氣)를 채우면 인재가 많이 난다고 해서 후손들을 위해 인공적으로 만든 연못이다. 벤치가 좀 쉬었다가라고 말을 건넨다. 고마움에 덥석 앉았다. 잠시 무게에 짓눌렸던 인생의 짐을 내려놓았다. 힘 있는 사람도 힘없는 사람도 자연 앞에서는 평등한 것을. “귀거래 귀거래 말뿐이오. 가리업시 그저 말뿐이듯이….” 성공과 출세가 무에
삶의 무게를 다 털어내고 서 있는 나목. 초겨울 속으로 짧은 햇살이 스며든다. 마지막 이파리 마저도 갈 길을 가고, 무성했던 지난날의 영화만 남아 오가는 이의 가슴을 적시는구나. `영주 순흥` 하면 무엇이 먼저 떠오를까. 조선 시대 삼백오십 삼 년 동안 사천여 명의 선비를 배출한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일까. 선비들이 실제로 살았던 생활공간을 복원한 선비촌에서 묵객이 되어보는 즐거움일까. 퇴계 이황을 비롯해 수많은 선비가 걸었던 소백산 자락을 따라 걸으며 초겨울의 정취를 느껴보는 낭만일까. 영주 순흥면 마실에선 어떤 꿈도 이루어진다. 금성대군의 충절이 서려 있는 금성단이 발목을 잡는다. 신단은 사적 제491호로 세종의 여섯째 아들 금성대군과 순흥 부사 이보흠 및 고향의 유림과 더불어
파도에 황금빛 꽃들이 몰려왔다 밀려가며 신생의 시간을 만든다. 뜨겁게 달아올랐던 정열과 믿음의 증표는 저 바다에 잠겨 고요하다. 스치고 간 여름날의 흔적이 모래 속에 잠겨 있다. 추억도 오래 묻혀 있으면 암각화로 남아 후세에 전해질까. 칠포 바다는 그저 말없이 낮은 숨결로 노래만 한다. 칠포 해수욕장 뒤편 곤륜산 자락에 들었다. 마땅한 주차장이 없어서 멸치 공장에 차를 부렸다. 조업한 멸치를 쪄서 말리는지 작업하느라 분주하다. 우리나라 어디를 가든지 기피 업종엔 동남아 근로자가 있다. 우리나라도 1965년부터 1975년까지 언니, 오빠들이 간호사와 광산 근로자로 독일에 갔다. 우리나라 경제 발전에 많은 이바지를 했다. 그들도 작게는 가족의 생계를 위한 일이지만 크게는 자국이나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에 기
한기가 든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겨울옷을 준비하지 못한 게 탈이었다. 차가운 공기가 몸을 휩싼다. 기침이 연신 터져 나와 땅 신에게 절을 한다. 단풍든 나무는 여전히 곱다. 가을을 떠나보내기가 아쉬운지 여행자들은 시린 손을 호호 불면서도 카메라에 추억을 담느라 바쁘다. 대릉원 입구에서 미추왕릉을 묻자 안내원은 대뜸 김 씨인 지를 묻는다. “아니, 어떻게 아세예. 김가인가를.” `경주에 점쟁이들이 많다고 하더니 이 사람도 혹시….` “미추왕이 경주 김 씨 조상이라고 카던가….” 안내원은 미추왕릉만 찾으면 모두 경주 김 씨로 보이는가 보다. “전 신라에 멸망한 고령가야 후손 함창 김간데예.” 미추왕릉은 대나무가 병사로 변하여 적을 물리쳤다는 전설이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이서고국이 금성을
가을은 창조주가 가장 아름답게 쓴 한 편의 시다. 미사여구는 군더더기일 뿐이다. 어떤 말로도 방점 찍을 수 없는 어휘력의 부족함, 자연의 힘이다. 산도 울긋, 사람도 불긋, 등산객들의 옷차림이 단풍든 나무다. 하마터면 단풍나무와 은행나무가 걸어가는 것으로 착각할 뻔했다. 사람들의 시선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낙엽 침대 위에 누워 가을 하늘을 올려다보고 싶다. 이 세상 누구의 집이 이처럼 아름다울 수 있을까. 어느 부자도 이런 집에선 살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낙엽 편지가 날아온다. 가을이 주는 축복을 두 손으로 고이 잡는다. 여기저기서 사진 찍느라 바쁘다.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면서. 부부가 다정하게 사진 찍는 것을 보고 시샘 난 일행이 “아즉도 그럭케 부터 있고 십나. 고마 떠러져랴.
계절을 느낄 수 없는 동해, 해안도로를 따라 넘실 넘어가 본다. 휘드린 내 운명을 틀고 틀어서 바다에 잠재운다. 속이 후련해진다. 파도는 사탕 발린 유혹처럼 거침없이 끌어당긴다. 못 이긴 체 알몸으로 서서 가을의 허기를 채워 볼까나. 어느 가을, 월송정 앞바다에서 연인이 바다를 거닐고 있었다. 십 원짜리 동전 한 개가 남자 눈에 띄었다. 둘은 아이들처럼 깔깔거리며 네 잎 클로버를 찾듯 모래를 뒤적이다 몇 개 더 주워 가슴에 넣었다. 동전엔 샤머니즘의 흔적이 거무튀튀하게 남아 있었다. 아마도 용신에게 바친 동전이었나 보다. 그날은 이상하게도 파도에 쓸려온 것들이 많았다. 모래 틈에서 뭔가 반짝이는 물체가 눈에 띄었다. 터지지 않은 총알이었다. 남자는 여자가 변심 하면 그 총알로 자신의 심장을 쏠 거라며
상주 박물관 가는 길은 볼거리가 많다. 전통의례관 옆, 의우총(義牛塚)은 동화책과 매스컴을 통해 소개된 의로운 소 무덤이다. 임봉선 씨가 키우던 암소 누렁이가 갑자기 고삐를 끊고 자취를 감췄다. 마실을 뒤지던 소 주인은 김보배 할머니 묘소 앞에 멍하니 서 있는 누렁이를 발견했다. 생전에 김 할머니는 누렁이를 따뜻하게 보살폈다. 사랑을 받았던 누렁이는 자신을 돌봐준 이가 죽자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주인이 달래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누렁이는 김 할머니 집에 가서 문상하듯 영정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상주들은 문상 온 누렁이에게 막걸리, 두부, 양배추를 대접하고 예를 갖췄다. 소가 죽자 사벌면 주민들이 장례식을 치렀다. 누렁이는 꽃상여를 타고 동네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상주박물
논두렁을 덮고 물결치는 은빛 억새들의 군무가 장관이다. 그 자체로 그림이 되는 들녘, 가을이 지닌 풍경이다. 난데없는 강풍이 몰아친다. 몸조차 가눌 수 없이 휘청거리지만 억새는 부러질 듯하면서도 굽히지 않는 기품을 지녔다. 매딥매딥에서 들려오는 서걱거림, 한 계절이 가고 있다. 나비 부인의 기를 살려주지 않았더니 보란 듯이 다른 길로 안내한다. 게으른 주인에 대한 경고가 따끔하다. 자칫 경북대학교 상주 캠퍼스에서 내 젊은 날의 추억만 회상하다 돌아올 뻔했다. 길을 잃으면 길을 발견한다고 하지 않던가. 길이 없다고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헤매다 보면 새로운 길을 개척하게 된다. 인생은 헛길로도 가봐야 바른길로 갈 수 있는 지혜도 생긴다. 시행착오는 돌아보면 삶의 조각으로 나름의 자리에서 제 역할을 해내고
누가 끌지 않아도 달려만 가고 싶은 길, 가을 들녘이다. 세상의 낮고 누추한 곳에서부터 높고 부유한 곳까지 내 애마는 말없이 동행한다. 행장을 꾸리지 않고 가다가 지치면 아무 곳에나 애마를 세워두고 휴식을 취한다. 이게 내가 여행을 즐기는 법이다. 특히 가을은 빈 몸으로 느껴보고 싶은 계절이라 더 가볍게 떠난다. 문학 하는 동료의 집으로 여럿이 소풍을 갔다. 농수로에서 졸졸 흘러내리는 물소리를 들으며 별마루 정자에 드러누워 본다. 한숨 자고 나면 모든 피로가 풀릴 것 같다. 어느 왕가의 별장보다 부러울 게 없다. 떡순이가 으르렁거리며 낯선 객을 대한다. 새끼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예민한가 보다. 어미 개는 연신 새끼를 핥고 빤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새끼 사랑이다. 동료들은 아이들과 도토리를
빠알간 옷으로 단장한 고추가 가을 낮잠을 즐기고 있다. 넓은 주차장에서. 동네 아주머니들은 느티나무 밑에 앉아 아들, 딸 자랑을 하다가 `슈퍼맨이 돌아왔다` 얘기로 가을 볕에 얼굴 타는 줄도 모른다. “송일국 아 왜 그……누구제? 차만 보면 날리지기는 아. 있자나 밍국인가?” “아이다, 니가 말하는 아는 만센기라” 서로가 좋아하는 애들 얘기에 웃음꽃이 핀다. “고곳들 나올 시간되면, 요 안잤다가도 텔레비 볼라고 얼릉 들어가지요.” 나보고 들으라고 하는 얘기 같다. 숫기 없는 코스모스는 끼어들지 못하고 연신 고개만 끄덕인다. 들깨 냄새가 고소하게 풍겨 온다. 뉘 집에서 타작을 하는가 보다. “부산성 가려는데 여기서 얼마나 가야 하나요.” “요길로 쪽 올라가면 되요.” “차는 올라갈 수 없나요.” “차 가지고
추수를 앞둔 벼들이 황금들판을 이루었다. 여물지 못한 인격도 가을엔 농부의 마음이 된다. 서로의 일상을 염려하고 안부를 물어주는 지인과 만나 옛길을 걸어본다. 처음 보는 남정네를 만날 때처럼 가슴이 뛴다. 우정도 곰삭아야 맛이 깊은가 보다. 돌담 너머로 초가집이 보인다. “엄마” 부르면 금방이라도 버선발로 달려 나와 덥석 안아줄 것만 같다. 굴뚝에선 연기가 몽개몽개 솟아오른다. 엄마 치맛자락을 잡고 졸졸 따라 나오던 동생의 입이 까맣다. 아마도 구운 감자를 까먹었나 보다. 그 꼴이 우스워 깔깔거렸었는데 지금은 별이 되었다. 갑자기 그 아이가 보고 싶다. 할머니 한 분이 호박을 따 담고 있다. 늙은 호박과 애호박이 섞여 있다. “호박으로 뭐하시게요” “늙은 호박은 나돗따가 호박범벅 해먹을라꼬. 양
바람이 불지 않아도 흔들리는 계절. 내가 쓸쓸할 것 같아서 사 들고 왔다는 지인의 국화꽃도 위안이 되지 않는다. 담이라도 훌쩍 넘어 나락 익는 냄새라도 맡고 와야 할 것 같다. 가을을 사랑하면서도 두려운 건 그가 주는 상처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경은 아는 사람들이 많아서 좋고 내 어린 날 추억이 있어서 그립다. 그렇다고 전화를 걸면 신발 벗어들고 쫓아 나와 반겨 줄 이는 없다. 모두 이 모양, 저 모양 사는 것이 바쁘다. 시간을 내서 차라도 한잔 나누는 친구는 정말 고맙다. 친구를 만날 때면 주머니는 되도록 내가 여는 편이다. 얼마 안 되는 찻값이나 식사비로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진 않다. 살아오면서 내가 지키는 철칙이다. 문경 능이족살찌개 집에서 지인은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토암
똑똑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정겹다. 비를 맞으며 골목길을 꽉 메운 사람들이 보인다. 이 많은 사람이 기다리는 것은 무엇일까. 안을 기웃거리기도 하고 낯선 여행자들과 얘기도 나누며 달랜다. 우리 일행도 간이 의자에 앉았다. 언제 올지도 모르지만 고도를 기다리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같다. 저 안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기에 삼십여 분을 기다려도 밖으로 나오는 사람이 없을까. 까치발을 하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허름한 탁자 네 개에 커다란 솥이 올려 져 있다. 김치하고 멸치에 고추장만 있는 소박한 밥상이다. 시장함에 침이 넘어간다. 지인은 구룡포에 오면 세 가지 음식은 꼭 먹어 봐야 한다고 했다. 구룡포 초등학교 앞에 있는 `철규 분식집의 찐빵과 단팥죽`, 그리고 `까꾸네 모리국수`라고 했다. 육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곳으로 가네.” 김광석 노래가 귓전에 울려 퍼진다. 방천시장은 추석 전인데도 한산하다. 방앗간 열린 문틈으로 파리 몇 마리가 넘나든다. 졸음을 쫓고 있는 할머니의 고개가 무거운 오후이다. 방천시장은 경대병원역 3번 출구로 나와 수성교 쪽으로 가다 보면 오른편에 있다. 일본, 만주 등지에 피해 있던 전재민들은 해방이 되자 여기에 모여들어 장사를 시작했다. 먹고 사는 방편으로 터를 잡은 것이 시초가 되었다. 방천시장 남쪽 10m 지점에 죄수들의 채소밭과 벽돌 굽는 공장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높은 건물들이 들어서서 옛 모습은 찾을 길 없다. 방천시장은 1960년대부터 싸전과 떡 전으로 유명세를 탔다. 번성기에는 100여 개의 점포가 즐비했던 대구의 대표 재래시장 중
어딘가로 떠나고 싶은 계절이다. 연서 안에 리처드 클레이더만의 `가을의 속삭임`이 잔잔히 흐른다. 가슴만 훑고 지나갈 가을이 서럽다. 뜨겁던 열정마저도 타버린 지 오래다. 오는 걸 원치 않아도 오고 가는 걸 잡지 않아도 가버리는 자연의 섭리 앞에 그저 겸허해질 뿐이다. 오래 갇혀 있던 흑백사진에 이름을 부여하는 것이 역사이다. 낡은 사진첩 속에서 잠자는 시간을 깨워 보련다. 시간이 그림이 되는 그곳으로 마실 여행을 떠난다. 아담한 옻골 마실이다. 슬픈 홍자빛 얼굴로 애타게 임을 기다리나. 정자 옆에 소복이 고개 내밀고 서 있는 배롱나무. 백일도 모자란 슬픈 기다림이여. 백일 동안 피어 있다고 어떤 이는 도도하다고 하나 나는 오래도록 지지 않는 그 열정을 사랑하련다. 나른하던 몸이 솔 향에 가뿐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빗속을 뚫고 내 차는 달린다. 노란 우산에 노란 장화를 신은 꼬마가 자박자박 걷는다. 빗물이 통통 튕긴다. 꼬마 뒤를 따라 할머니도 저벅저벅 따라 간다. 한참을 달려도 목적지가 안 나온다. 나비부인의 머릿속에는 입력되지 않은 길이다. 어림짐작으로 나선 길이라서 나비부인을 탓하지도 못한다. 막다른 골목길에 부딪히는 상황을 되도록 만들지 않지만 인생살이에서 피할 수 없는 운명 같은 길을 만날 때가 더러 있다. 그럴 땐 참 난감하다. 갈 수만 있다면 큰길로 가길 원한다. 시골 길이 도시처럼 넓은 곳이 얼마나 된다고 내 생각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몇 번이나 돌면서 망설이다가 농로로 들었다. 우회전하려고 핸들을 돌리는데 돌아가질 않는다. 비는 쏟아지고 내 차는 논 가운데 서 있
슬쩍 스쳐 지나간 사람을 찾아 나서듯 부지런히 핸들을 돌렸다. 옥곡 마실에 들어섰다. 학원과 음식점, 미용실, 옷집이 즐비하다. 김밥도 사고 길도 물어볼 겸, 김밥집에 들렀다. 아가씨의 건조한 말투가 38도의 무더위를 싸늘하게 한다. 옥곡 마실은 몇 년 전에 지인이 살고 있어서 들린 적이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버스가 자주 다니질 않아서 교통이 불편했었는데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상가가 밀집해 있어서 문만 열고 나가면 모든 것이 이 마실 안에서 해결되는 느낌이다. 시선이 상가로 쏠린다. 사람들로 북적인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시속 10km로 액셀레이트를 밟고 있는 것 같다. 서울 살 때는 사람들한테 떠밀려 다녀도 불편하다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었다. 자연스러웠고 그게 사람 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