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월성은 없다. 흔적과 터만 남아있을 뿐 실체는 시간의 안개 저편에 있다. 월성의 최후에 대해서도 견훤이 불을 놓았다는 기록과 몽골 기병이 황룡사를 태웠다는 기록이 엇갈린다. 아무래도 신라 패망 후 방치되다가 화재로 소실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그런데 전화위복이요 새옹지마라 할 만하다. 추정대로 월성이 몽골이 침입했을 때 화재에 의해 일시에 사라진 것이라면 오히려 현재까지 땅속에 상당한 유물이 매장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1970년대 말 월성 내부 시험 발굴에 나섰다가 지하에 너무 많은 유물이 매장되어 있어 당시 기술로는 도저히
열흘 붉은 꽃은 없다던가? 천년은 영화, 그리고 다시 천년은 폐허였다. 신라의 패망으로 더 이상 왕성일 수 없는 월성은 고려의 지배하에 3백 년 동안 방치된 채 잊혔다.한때 ‘황금의 나라’의 왕궁으로서 휘황했던 궁궐은 햇빛과 눈비와 바람과 이슬에 바래고 삭아갔다. 그럼에도 어쩌자고 흔적조차 말끔히 사라졌단 말인가?이에 대해 고고학계는 자연 풍화와 함께 몽골이 침입해 황룡사를 불태우면서 인접한 왕궁과 왕성이 모두 불타 소실됐을 것으로 추정한다. 월성에 대한 가장 오래된 시 ‘포은집’(1439)에 실린 정몽주의 ‘첨성대’. ‘포은집’은
경주에서 십여 년 동안 택시를 운전했다는 기사님도 처음 가보는 곳이라 했다. 네비게이션에 주소를 찍고 지칫지칫 좁은 길을 달려갔다. 로드뷰에도 나오지 않는 진평왕릉은 시내를 벗어나 한적한 마을의 허허벌판에 있다. 겨울이라 더욱 그렇겠지만, 인터넷에 멋들어진 사진과 함께 소개된 산책지로 좋다는 말만 믿고 왔다가는 ‘뭥미?’ 할 것 같다.진기하고 보배로운 것도 너무 많으면 평범하고 대수로울 수 있다는 것을 경주 여행을 통해 새삼 깨닫는다. 그렇다고 진기함과 보배로움이 사라질 것은 아니지만, 귀히 여기며 간직하기가 쉽지 않아진다. 진흥왕
명리학에서 말하는 무토(戊土) 일간이라 그런지 땅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낯선 동네를 지날 때면 주거지와 상가의 앉음새를 유심히 보고 인터넷 부동산사이트에서 시세도 살펴본다.애석하게도, 부동산에 관심이 많은 것과 투자 능력이 있는 건 다르다. 하지만 관심을 가지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살고 싶어 하는, 그래서 집값이 높은 ‘좋은 동네’의 특징 정도는 찾아낼 수 있다. 울주에서 발원해 영일만으로 흘러나가는 형산강은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강.우리나라의 강이 대부분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데 비해 특이한지라, 풍수지리의 신봉자들은 후발주자인
도무지 불혹(不惑)할 것 같지 않았던 미혹(迷惑)의 마흔에 문득 “지금껏 피하고 꺼리던 일을 해보자”며 백두대간 종주에 도전했다. 청계산과 관악산에 둘러싸여 이십 년을 살고도 단 한 번 스스로 산행을 결심해 본 적 없는 ‘평지형 인간’ 주제에 첫걸음이 백두대간이라니! 첫 번째 산행 길에 일찌감치 깨달았다.“이건, 미친 짓이다!”내 발등을 내가 찍었다는 후회를 수십 수백 번 곱씹으면서, 2년 동안 지리산 천왕봉부터 진부령까지의 백두대간 남한 구간을 완주하고야 말았다. 지금 돌이켜 봐도 참으로 미련하고 무모한 짓이었을 뿐더러 일생에 다
반짝이는 것들이 모두 보물은 아니다. 그러나 보물, 진정 드물고 귀한 가치를 지닌 보배로운 것은 기어이 반짝이게 마련이다. 세월의 먼지를 들쓰고 땅속 깊이 묻혀도 훼손되지 않는다. 훼손될 수 없다.(신문)왕이 행차에서 돌아와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의 천존고(天尊庫)에 간직하였다.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나으며, 가뭄에는 비가 오고 장마는 개며, 바람이 잦아들고 물결이 평온해졌다. 이를 만파식적(萬波息笛)으로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 ‘삼국유사’ 기이 편에는 신라의 보물을 보관한 월성의 보물창고가 나온다. 이름
경주에 다녀온 뒤 만나는 사람마다 잡고 말했다.“경주에 갈 일이 있다면, 황룡사지는 꼭 가 보세요!”겨울이고, 저물녘이라 더욱 그랬을 것이다. 봄이나 여름이나 가을이고, 새벽이나 한낮이라도 나름의 정취는 고스란했을 것이다. 예술품에 ‘완벽하다’는 말이 쓰일 수 있다면 석굴암에 그러할 것이라 했는데, 폐허에 ‘완벽하다’는 말을 쓸 수 있다면 황룡사지에 그럴 것이다. 폐허가 완벽하다니, 짐짓 ‘형용모순’ 같기도 하다. 모든 것이 파괴되고 황폐한 터, 그런데 그 아무것도 없음과 텅 비어있음이 결함 없이 완전하다는 느낌을 준다. 나처럼 웬
나는 ‘믿는’ 사람이 아니라서 ‘믿음’의 경로를 잘 모른다. 하지만 믿음이야말로 인간의 고유한 마음이며, 그 마음이 지극해지고 신실해질 때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신비를 발휘한다는 것은 안다.지금은 탑과 당간지주, 주춧돌과 장대석 등의 치석재로만 남아있지만, 신라시대 월성 주변에는 황룡사를 비롯해 분황사, 미탄사 등 사찰들이 하고많았다. 법흥왕14년(527) 스무 살을 갓 넘긴 청년 이차돈이 자신의 몸을 던져 서라벌에 꽃비를 뿌린지 17년이 지나자 “(서라벌에) 절과 절들은 별처럼 벌여 있고, 탑과 탑들은 기러기 행렬인양 늘어섰다.
최치원은 난랑비의 서문에서 말하기를, “나라에 현묘한 도(道)가 있으니, 이것을 풍류(風流)라고 한다. 가르침의 근원에 대해서는 선사라는 책에 잘 설명되어 있는데, 실로 이는 유교 불교 도교의 3교를 포함하고 있어 뭇 백성들을 감화시킨다. 집안에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밖에서는 나라에 충성함은 노나라 공자의 가르침이다. 무위에 머물며 말없는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주나라 노자의 뜻이다. 모든 악행을 멀리 하고 모든 선행을 받들어 행함은 천축국 석가의 교화이다”라고 하였다. 신라인의 ‘풍류’란 자연스러운 놀이가음악과 시와 종교 등과 만나
처음에는 날씨 탓을 했다. 월성과 경주 곳곳을 헤매며 느낀 쓸쓸함이랄까 공허함이 한겨울의 회색 하늘과 찬 공기 때문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희뿌옇게 번져가는 입김과 함께 퍼뜩 깨달았다. 유적지에서 느껴지는 공허함은 피와 살을 지닌 사람의 온기가 없기 때문이다. 삶이 불공평했을지라도 죽음은 만인에게 평등할지니, 왕후장상부터 필부필부까지 모두가 시간을 따라 사라져버렸다.1730년 남산 동쪽은 김씨 왕릉서쪽의 것들은 박씨 왕릉으로김씨 문중·박씨 문중 ‘대타협’신라 왕릉 중 확실한 피장자는태종무열왕릉·흥덕왕릉 2기 뿐선덕여왕릉 등 5기 학
“먹기 위해 사느냐, 살기 위해 먹느냐?”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만큼이나 오래된 질문이다. 누군가는 먹는 행위 자체가 삶의 목적이며 즐거움이라 하고, 다른 누군가는 삶의 최소 조건이자 구차한 일상이라 한다. 이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욕망이기에, ‘먹다’와 ‘살다’라는 단어가 엄연함에도 ‘먹고살다’라는 단어가 따로 존재한다. 생계를 유지하다, 즉 살림을 살아나갈 방도를 보존하고 지탱한다는 뜻인데, 그야말로 삶 자체다.‘먹방’이 유행이 되다 못해 범람하는 세상이다. 고전적인 요리 프로를 비롯해 요리사들끼리의 경연, 맛집 탐방으로도
한사코 손사래를 쳤다. 아는 게 없어 할 말이 없고, 누군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 했던 적도 없다고 했다. 하지만 천년의 잠에 빠졌던 월성의 속살을 가장 깊숙이에서 온종일 어루더듬는 사람들의 말이 어눌할지언정 어찌 헐후할까? 월성의 주인은 알에서 태어난 조상을 가진 왕족들이었지만, 월성을 만든 사람은 흙투성이 손을 두려워하지 않는 평범한 백성들이었을 것이다.처음에는 1970년대 황룡사지 발굴 때부터 40여 년간 일해 온 경주 문화재 발굴조사의 ‘산증인’ 최태환 씨와의 만남을 시도했다. 하지만 개인적인 사정으로 최태환 씨의 인터뷰가 여
미국이 멈췄다. 정당간의 협상 실패로 새해 예산안이 통과 시한을 넘기는 바람에 정부기관이 폐쇄되는 ‘셧다운(shutdown)’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미국은 물론 세계 경제를 강타한 사상 초유의 최장기 셧다운은 ‘반(反)이민정책’이라 할 만한 트럼프 대통령의 이민정책 때문이었다.트럼프는 후보자 시절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세우고, 그 비용을 멕시코가 내게 하겠다!”고 공약했는데, 농담처럼만 들리던 그 말이 ‘카라반(Caravan)’을 둘러싼 갈등과 대립으로 현실화된 것이다. 신라시대 흙으로 만든 형상 ‘토우’월성 해자에서 사람형상
공포이기도 하고 미개의 상징이기도 하다. 영화에나 가끔 등장하는 인신공양 혹은 인신공희(human sacrifice·人身供犧) 의식은 현대인들에게는 믿기지 않고 믿고 싶지도 않은 야만이다.그런데 인류의 역사를 두고 보면 인권은 물론이거니와 합리적 이성조차 근대에 이르러 증기기관차처럼 ‘발명’된 개념이다. 수렵시대와 유목시대를 지나 농경시대까지도 고대 문명의 발상지에서는 동서양 가릴 것 없이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풍습이 있었다. 페니키아에서는 몰렉 신에게, 마야에서는 우신(雨神)에게, 아즈텍에서는 태양신에게 제의를 올리며 사람을 제물
“책임감? 월성만큼 크고 무겁습니다.”그 또한 경주에서 나고 자랐다. 1970년에 그가 태어난 황남동은 경주 시내의 주택 밀집지였다. 현재 천마총부터 황남초등학교를 거쳐 황리단길로 이어지는 지역이다. 무덤 위에 지은 삶터, 그의 동네와 그의 집 아래도 전부 신라 무덤이었다.지금 왕성이라고 이야기하는 월성도 학창시절 즐겨 찾던 소풍 장소였을 뿐이다. 유적과 사적은 특별한 관심거리라기보다 공기처럼 익숙한 공간이었다. ‘어쩌다 보니’ 정해진 길을 따르는 듯, 경주에서 초중고를 졸업한 뒤 경북대에서 고고학을 전공했다. 이후 학예연구사로 문
월성은 흙으로 성벽을 쌓은 토성(土城)이다. 동서 길이 890m, 남북 길이 260m, 바깥 둘레 2340m로 총 면적은 22만2천㎡에 이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둘레가 3023척, ‘동경잡기’에는 1023보로 규모가 기록되어 있다. 말하자면 축구장 27개 가량인 셈인데, 한눈에 그 넓이가 느껴지지는 않는다. 경계가 명확하지 않은 언덕인데다 발굴조사를 진행 중인 지역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여전히 평범한 소나무 숲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천년의 깊은 잠을 자던 월성이 단번에 눈을 뜰 수는 없다. 그럼에도 발굴조사가 시작된 후로 변
북극의 한기가 남하하면서 한반도를 꽁꽁 얼린 날이었다. 북극하면 빙하와 에스키모와 새하얀 곰부터 떠오른다. 여름에는 해가 지지 않는 백야 현상이 나타나고 겨울에는 해가 뜨지 않는다는 곳이다.그런데 뺨이 에이고 손이 얼어붙는 것이 ‘북극 한파’ 때문이라니, 공간의 경계가 일시에 사라진 듯 야릇한 기분이 든다.월성 앞에 선 기분도 그만큼이나 기묘하다. 동지섣달 칼바람 속에서 시간의 멀미증을 느끼며 천년 왕성의 흔적을 찾아 헤맨다. 조심스럽게 모습을 드러낸 월성의 속살은 비밀 같기도 하고 상처 같기도 하다.맹추위에 중단한 발굴조사 구역의
육당 최남선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서슴지 않고 후자를 택할 것이라고 했다. 시인이자 연구자인 고운기는 ‘삼국유사’를 한마디로 ‘길 위의 책’이라고 했다. 사가(史家)들보다는 작가들이 사랑한 책, ‘삼국사기’의 사(史)와 달리 일 혹은 이야기라는 뜻의 사(事)를 쓰는 ‘삼국유사’에는 ‘월성(月城)’이라는 단어가 8회 등장한다. 연오랑·세오녀의 비단 간직한 ‘귀비고’국보 ‘만파식적’ 간직한 나라창고 ‘천존고’일곱 길의 물이 솟아났다는 ‘금광정’ 등삼국유사 속에서 여덟 차례나 등장귀신의 자식 ‘비형랑’의
역사를 소재로 한 소설을 쓰노라니 “어떻게 소설을 쓰느냐?”만큼이나 자주 듣는 질문이 “어떻게 소재를 얻고 취재를 하느냐?”는 것이다. 독자들뿐 아니라 연구자들까지 역사를 이야기로 만드는 과정을 궁금해 하는데, 사실 대답은 간단하다.“공부합니다.”졸작 ‘미실’을 쓸 때부터 밑도 끝도 없는 공부가 습관이자 의식이 되었다. 일단 그 시대의 기록에 풍덩 빠져 허우적거리다 보면 짐짓 근엄하고 복잡해 보이는 역사 속에서 이야기의 실마리가 보인다. 그 순간 그것을 거머채면 그만이다.원칙적으로 시작은 정사(正史)를 읽는 일로부터 출발한다. 삼국
본지는 올해 연중 특별기획으로 ‘소설가 김별아의 경주 월성을 걷는 시간’을 연재한다. ‘신라 천년의 역사 현장’이라 불러도 모자람이 없는 월성을 둘러싼 갖가지 이야기와 그 속에서 명멸했던 인물들을 현대로 불러올 기사가 모두 20회에 걸쳐 독자들과 만나게 된다. 발굴이 한창 진행 중인 월성 현장 르포와 신라 역사 속 숨겨진 미스터리, ‘월성의 주인’이었던 왕과 여왕들, 석굴암과 황룡사지 등의 유적지 탐방이 게재될 것이다. 이번 특별기획은 2019년 오늘, 천 년 전 신라 사람들의 얼굴을 다시 만나는 유의미한 체험을 독자에게 제공할 것